보통 초등학생은 돈이 없다. 12살짜리 꼬마에게 일주일 동안 온갖 사치를 부리며 넉넉히 쓸 수 있는 용돈을 주는 부모는 아마 없을 거다. 그건 우리 엄마 아빠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내 일주일 용돈은 1,800원. 금액을 책정한 건 엄마인데, 일요일은 돈 쓸 일이 없으니 토요일까지 6일로 계산하여 하루에 300원씩 쓰라는 셈이었다. 그 시절, 초코파이 한 개는 200원이었고, 300원이면 작은 사탕 2개가 들어있는 조잡한 로보트 장난감을 살 수 있었다. 논두렁 밭두렁 한 세트, 꾀돌이 한 봉지, 20원짜리 풍선껌 5개, 28개들이 복숭아 맛 알약 사탕과 그 외 각종 불량식품들, 별이 그려진 종이 딱지 20장, 문방구 오락기 한 판 등 단돈 100원으로 할 수 있는 것도 많았다. 이렇듯 초등학교 5학년짜리 꼬마에게 하루 300원이면 그렇게 부족한 용돈은 아니었다.
문제는 그걸로 누군가의 선물을 살 만큼 큰돈을 모으긴 어렵다는 것이다. 가끔 반 친구 생일파티에 초대되면 선물 살 돈은 엄마가 따로 주셨다. 그건 문제없었다. 할머니 할아버지 생신 때 드릴 선물은 보통 엄마나 아빠가 챙겼으니까 그것도 문제는 없었다. 그런데 엄마 아빠 생신은 순전히 내 몫인 것이다.
5,000원, 그해 엄마 생신 때 드릴 선물을 사기 위한 목표 금액이었다. 그리고 어린이날 전까지 4,000원을 모았었다. 1,000원만 더 모으면 곧 목표 금액에 도달할 터였다. 사실 그 돈을 모으는 데 그 애 역할이 꽤 컸다. 그동안 학교가 끝나면 곧바로 그 애에게 붙들려 갔으니, 현우 집에 가기로 한 날이 아니라면 군것질을 하거나 오락을 하는 등의 짬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애가 날 기다리지 않게 된 그 날 이후 나는 그 돈을 조금씩 탕진하기 시작했다. 터미널로 먼저 간 그 애를 따라가지 않은 날은 현우와 거의 배로 써댔으니, 그동안 받은 2주 치 용돈을 더해도 3,700원밖에 남지 않게 됐다. 그때 나는 선택해야 했다. 원래 엄마한테 드리고 싶었던 별이 달린 은색 팔찌를 포기하고 다른 3,500원짜리 물건을 알아볼 거냐, 아니면 다음 주 용돈을 가불 받을 거냐.
작년의 나라면, 그저 그런 2,000원짜리 머리핀이나 샀을 거다. 진짜 작년엔 머리핀을 샀다, 1,500원짜리. 하지만 그해 나는 후자를 선택했다. 이제 12살이나 먹었으니 나잇값을 해야지.
다음 주 용돈을 가불 받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아빠한테 미리 도움을 요청하니, 엄마한테 다음 주 용돈을 가불해달라고 말할 때 아빠가 거들어 줬던 것이다. 대신 엄마는 너무 일찍 줄 순 없으니 토요일에 주겠다고 했다. 그래서 그 주 토요일은 엄마 선물을 사러 가야 했다.
“엄마 생일?”
“어... 그래서, 내일 먼저 집에 가 있을래? 선물만 사고 금방 갈게”
엄마가 굳이 토요일에 돈을 주겠다고 하니 어쩔 수 없었지만, 집에 놀러 오라고 했으면서 먼저 가 있으라고 말하는 내 마음도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그 애한테 토요일에 놀러 오라고 말한 다음 날부터 우린 공식적으로 집에 같이 가는 사이가 됐다. 뭐, 원래도 거의 매일 같이 가긴 했지만, 터미널에서 우연히 마주쳐 같은 버스를 타게 되고 집이 같은 방향이니까 의도치 않게 집에도 같이 걸어가게 되는, 그런 것과는 달랐다. 그 애는 여전히 복도에서 날 기다리진 않았지만, 우린 약속이나 한 것처럼 터미널에서 만났고, 버스를 같이 탔고, 서로 옆집에 살기 때문에 집에도 같이 걸어갔다. 만일 내가 늦어 버스를 놓치게 되면 그 애는 내가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같이 다음 버스를 탔다. 그래서 그날은 그 애가 기다리지 않게 먼저 가 있으라고 한 것이다.
“내 방에서 비디오 보고 있어도 돼”
그러니 그 애는 뭐라 말하려는 듯 잠시 뜸 들이더니, 이내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용돈을 가불 받은 그 주 토요일엔 비디오 빌리는 돈을 받지 못했다. 사실, 비디오 빌리는 용돈 500원을 매주 달라고 하는 건 눈치가 보여, 암묵적으로 비디오 용돈은 격주로 받기로 돼 있었다. 그리고 그 주가 바로 비디오 용돈을 달라고 할 수 있는 토요일이었다. 그런데 용돈을 가불 받으니 왠지 비디오 용돈까지 달라고 하기엔 눈치 보였던 것이다.
하지만 빈털터리로 다음 주를 보내기로 이미 각오한 나는 엄마 선물을 사고 남은 500원으로 비디오를 빌리기로 마음먹었다. 왜냐면 내가 그 애를 초대한 셈이니까, 뭔가 그 애 취향에 맞는 그 애가 좋아할 만한 걸 해주고 싶었다. 하! 내가 전 재산까지 털어가며 저를 위해 이렇게까지 해준 걸 알면 고마워서 어쩔 줄 몰라 할 테지. 그러면 앞으로 날 제멋대로 휘두르려 하지 않고 내 말에 고분고분 잘 따라 줄지도 모른다.
강시선생2. 그 애가 좋아하는 괴물이나 귀신이 나오는 영화는 내겐 아직 너무 큰 모험이었고, 그 애가 가지고 있는 비디오 중에 그나마 재밌게 볼 수 있던 건 강시선생이었다. 언젠가 강시선생 시리즈를 비디오 대여점에서 본 적 있는데, 그중 2편을 그 애를 위해 바로 오늘 빌릴 셈이다. 정말이지 그 애는 나 같은 친구를 또 어디서 만날 수 있을까.
“오늘 진짜 우리 집 안 갈 끼가?”
마지막 교시를 남긴 쉬는 시간. 화장실에 가자고 할 게 아니라면 평소엔 그냥 제 자리에 조용히 있을 현우가 별안간 다가와 옆에 앉는 것이다.
“어, 오늘은 집에 빨리 가야 돼서... 엄마가 바로 오라 해갖고...”
거짓말하는 게 미안해 은근히 녀석의 눈을 피했다. 그 애와 놀기로 했다는 걸 말했다간 분명 또 놀려먹으려 할 게 뻔했으니까.
가끔은 현우가 우리 집에 와서 노는 걸 상상하곤 했다. 서로 집이 가까웠다면 주말에도 자주 같이 놀았을 텐데. 만약 오늘 녀석도 우리 집에 와 그 애와 셋이서 논다면 얼마나 재밌을까. 아, 그런데 현우는 낯을 많이 가리니까 괴팍한 성격인 그 애와 친해지려면 좀 오래 걸릴지도 모른다.
“그러면 집으로 바로 가나?”
“어, 바로 가야지, 아, 엄마 생일선물 사러 모아모아 들렀다가”
그러고는 주머니에 있던 꾸깃꾸깃 접은 천원짜리들을 꺼내 보였다.
“내 용돈 모은 거라, 니 이리 큰돈 모아 본 적 있나”
그런데 갑자기 녀석이 돈을 쥐고 있는 내 손을 책상 밑으로 끄집어 내리는 것이다.
“야 넣어, 그걸 와 꺼내노”
“어?”
다소 심각한 표정을 한 녀석의 눈빛이 순간 흔들렸다.
“얼른 넣어”
잡은 내 손을 주머니 쪽으로 밀어 넣으니 어쩔 수 없이 돈을 도로 넣어야 했다.
“어, 와 그라는데?”
그러니 내 눈을 피하듯 어색하게 고갤 돌린 녀석이,
“아이라, 있다가 같이 가자”
그러곤 자기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다.
사실 현우와 모아모아에 같이 가는 건 그렇게 나쁜 아이디어는 아니다. 최소한 심심하진 않을 테니까. 다만 오늘은 상황이 좀 다를 뿐. 가뜩이나 그 애보고 집에 먼저 가 있으라고 한 터에 서둘러 뒤따라가지는 못할망정 현우놈과 시시덕거리며 시간을 지체할 순 없었다. 녀석은 분명 걸어가는 와중에도 시시콜콜한 농담을 하거나, 날 놀려먹으려고 하거나, 혹은 자기 집 게임기가 얼마나 재밌는지, 자기가 게임을 하며 얼마나 재밌게 놀 건지를 굳이 설명하며 날 유혹하려 들것이다. 그것뿐인가. 예쁘고 신기한 물건들이 많은 모아모아에서 이것저것 구경한답시고 내 발목을 잡을 게 뻔했다.
“야, 같이 가자고!”
“나 진짜 빨리 가야 돼, 미안 다음에 가자”
학교 앞 골목에 녀석을 남겨 둔 채 모아모아로 통하는 좁은 골목으로 뛰어들었다. 뒤에서 녀석이 뭐라고 소리쳤지만 알아듣지 못해 그냥 길을 재촉했다. 서둘러 가야 따라붙지 않을 테니 바쁜척하며 약간 뛰듯이 걸었다. 선물을 사고 비디오 대여점에 들른 후 버스 시간까지 맞춰야 했으니 진짜로 바쁘긴 했다.
주택들 사이에 문방구와 분식집, 식당, 전파사 등이 자리 잡은 학교 앞 골목은 토요일 하교 시간이면 1학년에서 6학년까지 모든 아이들이 뒤섞여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하나같이 책가방을 뒤로 맨 꼬꼬마들이 왁자지껄하며 교문을 통과해 한 방향으로 휩쓸고 지나가는 그 광경은 일주일에 한 번 볼 수 있는 장관 아닌 장관이었다. 그 와중에, 어딘가로 서둘러 뛰어가는 아이들과 삼삼오오 모여 느긋하게 떠드는 아이들과 실내화 가방으로 베개 싸움을 하는 아이들과 잡기 놀이 하듯 서로 쫓기도 쫓기기도 하는 아이들이, 마치 축제라도 연 듯 상기된 채 각자의 주말을 향해 가고 있었다.
여느 골목이 그렇듯 학교 정문서부터 시작해 차도까지 이어지는 학교 앞 골목도, 주택과 상가로 이뤄진 블록들 사이로 크거나 좁은 골목들이 교차하며 읍내 여러 곳으로 통하는 지름길을 이었다. 골목들 중엔 학교 앞 골목을 반으로 가르는 꽤 넓은 길이 있었는데, 그 길은 버스터미널부터 동쪽 네거리까지를 잇는 아주 유용한 지름길이었다. 하교하는 아이들 중 거의 절반은 그 길을 애용했다. 버스 타러 가는 아이들도, 읍내 가장 번화한 곳으로 놀러 가는 아이들도 굳이 빠른 길을 두고 차도 쪽으로 돌아서 가진 않았으니까.
각양각색의 예쁜 팬시용품과 아기자기한 액세서리 등을 파는, 당시 읍내에서 제일 힙했던 모아모아는 동쪽 네거리와 가까워 그 길을 통해 갈 수도 있었지만, 한시가 바쁜 나는 좁지만 조금 더 빠른 다른 골목을 통해 갔던 것이다. 토요일 초등학교 앞 하교 시간의 소란함에도 불구하고 그 좁은 골목길은 인적이 거의 없어 적막하다 못해 스산하기까지 했다. 주택의 대문과 담벼락만이 이어져 퍽 삭막한 그곳은 공교롭게도 중학교로 이어지는 길과 교차해, 종종 쪼그려 앉아 담배를 피는 중학생 형들이 생각 없이 그곳에 발을 들인 멍청한 초등학생들을 노려보며 눈치를 주곤 했다.
그럼에도 그날 그 골목으로 들어선 건 순전히 내 객기였을까. 글쎄, 그렇진 않을 거다. 무려 미성년자가 접해선 안 되는 담배를 보란 듯이 피우는 무섭기 그지없는 그 형들도, 눈을 내리깔고 잔뜩 주눅 든 채 저들 앞을 지나가는 초등학생 꼬마를 노려만 볼 뿐 굳이 불러세우거나 하진 않았다. 그리고 그 길로 들어선다 한들 그 형들을 무조건 만날 수 있는 것도 아니거니와, 더욱이 학교 앞 문방구로 가지 않고 그 골목을 지나는 초등학생은 대부분 돈이 없기도 했기에 주머니를 뒤져본다 한들 얻을 게 없다는 걸 저들도 알고 있을 터였다.
그날 내겐 5,500원이라는 거금이 들려있었지만, 만약 그 형들을 마주쳐도 평소처럼 조용히 지나가든가 아니면 슬며시 되돌아 나가면 그만이었다. 그리고 그때까진 나는 한 번도 돈을 뺏겨 본 일이 없었다.
골목을 들어서고 조금 더 들어가니 현우의 말이 들려오지 않아 조금은 여유롭게 속도를 늦췄다. 그래도 평소의 느긋한 내 발걸음 보단 조금 더 빨리 걸어야 하긴 했다. 모아모아까지 그 골목을 통하더라도 어린아이 걸음으로 10분은 족히 걸어가야 했으니, 다시 돌아와 터미널까지 가려면 적어도 30분은 잡아야 했다.
골목 저쪽에서 문득 어느 아주머니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 무서운 중학생 형들은 보이지 않고 어른이 지나가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파로 보이는 채소의 초록색 줄기 끝이 삐죽 튀어나와 있는 장바구니를 들고 약간은 걷는 게 지쳐 보이는 아주머니가 무심히 곁을 지나쳤다. 인적 없고 적막한 그 골목은 생각보다 그리 길진 않았다. 곧 저쪽에 중학교 앞 큰길로 나가는 골목 끝이 빼꼼히 보였다. 아직까진 모든 게 순조로운 듯했다.
험악해 보이는 중학생 두 명이 문뜩 골목으로 들어서기 전까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