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은 그때 얘길 꺼내곤 한다. 오래된 책장에 목석같이 꽂혀있는 어떤 거룩한 고서처럼, 우리 역사 한 페이지에 소중히 기록된, 이제는 추억으로 길이 남은 그날의 사건. 그러면, 피식 웃음 짓는 너의 표정을 따라 뭐가 그리 웃긴지 나도 끌끌대기 시작하지. 생각해 보면 영화 속 주인공이라고 꼭 모두가 악당을 물리쳐야 하는 건 아니었던 거야.
그들은 날 불러세우더니 별안간 벽으로 몰아붙였다. 그리곤 어떻게 알았는지 내 주머니를 뒤져 천 원짜리 뭉치를 꺼내 드는 것이다. 모든 일이 순식간에 벌어져 어떻게 대처할 새도 없었다.
“맞네, 이 새끼 ㅋㅋㅋ”
그들은 내게서 뺏어낸 천 원짜리들을 세어보더니 흡족한 듯 서로 마주 보며 낄낄거렸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잠시 멍한 채 있던 난, 까무잡잡한 피부에 눈이 가로로 쭉 찢어져 퍽 못생긴 그놈이 들어 보인 천 원짜리 뭉치가 눈에 들어오자 퍼뜩 정신이 들었다. 날렵함이나 기민함과는 거리가 멀었던 내가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진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 순간 나는 그걸 다시 뺏어내는 데 성공했다. 그리곤 뺏기지 않으려 양손으로 품에 안아 숨겼다.
지들 딴엔 하찮은 초등학생에게 들고 있던 돈을 뺏긴 셈이니 자존심 상했겠지. 놈들은 곧 욕지꺼릴 하며 다시 날 몰아붙이더니, 이내 내 머리와 등을 때리기 시작했다.
돈을 껴안은 채 구부리고 있으니 뒤통수가 후려지는 충격으로 머리가 자꾸 흔들렸고, 주먹으로 등을 내리치는지 뭉툭한 통증이 사정없이 꽂혀왔다. 키가 한 뼘은 큰 덩치 둘이서 무자비하게 후려대니, 결국 얼마 버티지 못하고 돈을 다시 뺏겨야 했다.
서러움이 북받쳐 주저앉아 엉엉거렸다.
우는 소리가 꽤 컸던 듯싶다. 놈들은 욕설을 내뱉으면서도 당황한 듯 자릴 벗어나려 걸음을 옮기려 했고, 그때까지도 나는 무슨 생각이었는지 그중 한 놈의 다리를 붙잡고 늘어졌다. 그러니 그들로선 어쩌겠는가. 발로 차대며 떨어내려 할 수밖에.
사람의 발에 밟히고 차이는 건 아프기도 했지만 비참함이 더 컸던 거 같다. 내게 붙잡힌 놈은 잡힌 다리를 흔들어대며 손바닥을 내게 휘둘렀고, 다른 한 놈은 신발 끝으로 차기도 하고 내 등과 어깨를 지그시 밟으며 떼 내려 하기도 했다.
당최가 이게 무슨 일인지, 두서도 없이 벌어진 비참한 상황이 서럽고 억울하기 그지없었다. 눈물인지 콧물인지 끈적하고 축축한 게 온 얼굴을 치덕하니 적셨고, 해피가 우리 집에 온 첫날 꼬물이 같은 녀석이 낑낑거리며 울었던 것처럼 애달픈 소리가 자꾸 목으로 새어 났다. 그래도 버티는 데까진 버티려 바짓가랑일 꽉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이야아아아아!”
그때 별안간 우레 같은 고함소리가 온 골목을 울렸다. 저쪽에서 누군가 달려오며 내는 소리 같았다. 그 소리는 크기도 컸지만, 할 수 있는 한 있는 힘껏 소리치려 하는 건지 목울대가 갈라지는 소리까지 겹쳐져, 마치 악에 받친 듯한 서늘한 느낌마저 들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종종 보곤 한다. 정의로운 주인공이 위기에 처하면, 갑자기 친구가 뿅 하고 나타나 함께 위기를 헤쳐 나가는. 그 얼마나 멋지고 아름다운 장면인가. 그래서 그때 나는 저 목소리가 현우가 날 도와주기 위해 달려오는 소리는 아닐까, 아주 잠깐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럴 리는 없다. 녀석은 악당에게 달려들기보단 우두커니 서서 최대한 크게 울며, 마치 사이렌처럼 주위에 상황을 알리는 걸 더 선호하는 쪽일 테니. 더군다나 녀석은 저런 악에 받친 소리는 내지도 못한다. 그렇다면 이제 내게 남은 친구는 그 애 하나인데, 그 애는 먼저 집에 갔을 테니 그 애일 리도 없다. 그럼 저건 누구지?
여기저기 차이느라 정신없던 그때, 그 고함소리의 주인공이 내게 다리를 붙잡힌 이놈에게 달려든 건지, 별안간 놈이 뒤로 나자빠지며 머리를 부딪친 듯 쿵 하는 소리가 났고, 나도 바닥에 나뒹굴게 됐다. 그 순간에도 나는 벌떡 일어나 혹시 자빠진 이놈이 내 돈을 갖고 있는지, 누워서 끙끙대는 그 몸뚱아리 주변을 살폈다.
유감스럽게도 내 돈을 들고 있는 건 서 있는 다른 쪽이었다. 그놈은 별안간 끼어든 불청객을 황당하다는 듯 쳐다보더니 이내 그쪽으로 발길질을 시작했다.
“아아아아악!”
악에 받친 고함소리가 다시 울렸다. 얼핏 봐도 나랑 키가 비슷하고 덩치도 좀 있어 보이는 고함의 주인공은, 몇 번 발로 차였지만 끝끝내 일어나 놈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어쩔까. 초등학생이 저보다 몸집이 배나 큰 중학생을 이길 순 없다. 그는 억세고 무자비한 놈의 발길질에 받혀 이쪽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현실은 영화랑 다르다. 영화에서는 정의로운 주인공이 아무리 사악하고 교활한 악당을 만나더라도 끝끝내 물리치고 이겨낸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날 도와주는 유일한 동료가 맥없이 쓰러지는 모습을 보니, 안 그래도 낑낑거리며 세어 나던 애달픈 소리가 더 큰 울음으로 터져 나왔다. 그저 서럽게 우는 거 말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영화의 주인공과는 다른 현실의 무기력함을 자각하며.
놈은, 아까 꽤 세게 넘어졌는지 아직도 땅에 나자빠진 채 끙끙거리던 다른 놈을 일으켜 세우더니 곧 우리에게 다가왔다. 뭐라고 지껄이는지 작게 읊조리는 상스런 욕설이 얼핏 들려왔다. 아까보다 더 화난 거 같았다. 그리곤 이내 주저앉아 있는 우리에게 번갈아 가며 다시 발길질을 해댔다.
“아아아악! 아아악! 아악!”
그 와중에 또 고함이 울렸다. 아까보단 현저히 작았지만, 그 악에 받쳐 찢어지는 서늘함은 여전했다. 문득, 그 억센 발길질이 꽤 아팠을 텐데도 악을 쓰며 저항하는 모습이 경이롭게 느껴졌다. 그래서 나도 그 순간 할 수 있는 걸 했다.
“아아아앙! 아아앙!”
그 용감한 고함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할 수 있는 한 큰 소리로 울부짖었다. 둘이서 소리 내니 아까의 우레같은 고함에 비할 만큼의 큰 소리는 났던 거 같다.
우리에게 흠씬 발길질하던 놈들은 소리가 점차 커지자 이내 그곳을 벗어났다. 골목 저편으로 사라지는 놈들을 보고 있자니 끝났다는 안도감이 들면서도 잃어버린 돈이 생각나 연신 눈물이 흘렀다.
그렇게 한동안 골목 바닥에 주저앉아 울고 있으니, 곧 팔을 잡아끄는 손길이 날 일으켜 세우는 것이다.
“울지마, 이제 괜찮아”
고함을 있는 대로 질러댔으니 목이 쉴 법도 하지. 쇳소리가 조금 섞인 목소리로 날 다독인 그 손길은, 곧 엄지손가락으로 내 눈물을 훔친 후 골목 바닥을 나뒹굴 때 묻었던 내 옷의 흙과 모래를 털어주었다. 축축이 젖은 두 눈 위를 훑고 지나갈 때 닿았던 그 손가락들의 촉감이 기억난다. 어쩌면 그토록 따듯할 수 있었을까.
“가자”
그리곤 내 손을 잡아끌더니 골목 밖으로 이끌었다.
골목을 다 벗어나고 나니 다시금 서러움이 북받쳐 왔다. 대체 왜 남의 돈을 뺏는 거야 백정 놈의 자식들. 내겐 엄마 선물을 사려고 모은 귀중한 돈인데, 그 자식들은 분명 오락실에 가거나 담배 사는 데 쓸 게 뻔하지. 혀가 만 바리가 빠져 뒤질 놈들.
“흐으윽, 흐끄으응...”
눈물이 그득하게 앞을 가려 얼굴 위로 축축하게 번져갔다. 크게 소리 내 울진 못해 서러움을 억지로 삼키려니 코가 시큰해지며 걸쭉한 울음이 목구멍에서 꿀렁였다.
“왜 자꾸 울어, 맞은 데가 많이 아파?”
날 이끌던 손길이 걸음을 멈추고 다가와 얼굴을 훑으며 눈물을 닦아 주었다. 그러니 그 모습이 이제야 눈에 들어오는 것이다.
단정하게 뒤로 묶었던 머리는 머리카락들이 삐져나와 헝클어졌고, 턱이 긁히고 한쪽 볼이 뻘겋게 멍들어 있는 얼굴로 앞에 서 있었다. 여기저기 모래와 흙이 묻어 지저분해진 옷은 팔꿈치 한쪽이 찢어져 붉은 피가 얼핏 보였다. 문득 머리 한쪽에 허옇게 묻은 골목 바닥의 먼지가 눈에 들어왔다.
목구멍에서 꿀렁이던 묵은 울음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