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중 그 애 14화

14. 그 애가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by 차태주

그 애가 선명비디오라고 크게 쓰인 유리문을 힘껏 밀어젖혔다.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그 애 손에 이끌려 한쪽 팔을 앞으로 뻗은 채 뒤따라 들어갔다.

자연스레 공포영화 코너로 다가가는 우리에게, 저쪽에서 어린이용 비디오를 정리하던 누나가 돌아보며 인사했다.

“어서 와, 어쩐 일이야? 간만에 같이 오네?”

“안녕하세요, 언니!”

팔꿈치에 피딱지가 앉고 머리를 산발한 채 한쪽 볼이 멍들어 있는 모습과는 어울리지 않게 그 애의 목소리는 씩씩하고 밝았다. 아니 그것보다, 그 애가 누나한테 언니라고 부르며 살갑게 인사하는 건 처음이었다.

자기를 향한 그 애의 살가운 목소리를 처음 들은 건 누나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러니 조금 의아한 표정으로 굳이 진열대 모퉁이를 돌아와 우리를 살핀 거겠지. 그리고 곧 누나는 입이 벌어지며 몹시도 놀란 표정이 되어선 우리에게 얼른 다가왔다.

“어떻게 된 거야? 괜찮니?”

동그래진 눈으로 우릴 훑어보는 누나의 심각하게 놀란 표정을 보니 나도 꽤 많이 다쳤나보다 싶었다. 이마와 턱 한쪽이 욱신거리기도 했고 어깨와 무릎도 아팠다. 무릎은 아마 바지를 걷어보면 멍들었거나 피가 나 있을지도 몰랐다.

“괜찮아요, 중학생이랑 싸웠는데, 우리가 이겼어요”

응? 얘가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지?

어이가 없어 그 애 뒤통수로 눈길이 고정된 채 한동안 굳어버렸다. 어처구니없는 그 애의 발언에 경악한 건 누나도 마찬가지였다. 한껏 벌어진 채 다물어지지 않은 입 위로 일그러진 표정이 압권이었다.

“아아악! 하면서 팍! 미니까 뒤로 날아가는 거 있죠, 그리고 막, 아아아아악! 하면서 고함치니까, 겁먹었는지 도망갔어요, 히히히”

구급상자에서 꺼낸 약품으로, 긁힌 턱이 소독되는 와중에도 그 애는 중학생과 대등하게 싸워 이겼다는 그 말도 안 되는 무용담을 쉰 목소리로 자랑스레 늘어놓았다. 간간이 한숨을 쉬며 애잔한 표정으로 그 애의 얼토당토않은 허풍을 듣고 있는 누나는 당연하게도 그 얘길 믿는 눈치는 아니었다.

잠시 뒤, 멍든 그 애 볼에 연고를 다 바른 누나가 이윽고 그 애의 양어깨를 잡고 다그치듯 말했다.

“이기면 뭐 하니? 몸이 이렇게 다쳤는데, 숙녀 얼굴이 이게 뭐야! 예쁜 얼굴에 흉터라도 나면 어쩌려고 그래!”

“그럼 어떡해요, 얘가 맞고 있는데”

그 애가 당돌하게 대꾸하며 날 가리켜 보였다.

그러니 누나가 여전히 심각한 표정으로 이쪽을 돌아봤다. 화도 조금 난 거 같았다.

“너도 그래, 그 돈 그냥 줘버리지 왜 맞고 있어! 그렇게 얻어맞고 집에 들어가면 부모님 심정이 어떻겠니!”

시무룩해져 고개가 숙어졌다.

누나는 곧 멍든 내 얼굴과 무릎에도 연고를 발라준 후 그 애의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하려 고무줄을 풀었다. 그러다 그 애의 피딱지가 앉은 팔꿈치를 발견하곤 다시 구급상자를 가져와야 했다.

“어휴 정말,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그 애는 강시선생 2편을 이미 봤다고 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다른 공포영화를 빌리기로 했다. 그날은 괴물이나 악마 따위가 나오는 미국 영화보다는 여곡성 같이 처녀귀신이 활약하는 우리나라 영화를 보자고 했다. 그리곤 그 애는 엄청나게 무서운 영화를 추천해달라며, 넉살 좋게도 마치 원래부터 꽤 친한 사이였던 양 누나 손을 잡아끌며 공포영화 코너로 이끌었다. 그러니 누나는 사글사글 웃으며 올려다보는 그 애를 잠시 못마땅한 얼굴로 내려다보더니, 이내 피식 웃으며 그 애 머리를 쓰다듬었다.

집에 도착하니 한바탕 난리가 났다.

일찍 퇴근하고 집에서 TV를 보던 엄마가 마루로 올라선 내 몰골을 보더니 방에서 뛰쳐나와 경악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옆집에서도 곧 할머니와 아주머니의 기겁하는 비명이 얼핏 들려왔다.

우리는 아랫방 부뚜막 옆에 나란히 앉혀졌다. 어른들은 그 앞에 허리를 숙인 채 우리를 굽어보며 어떻게 된 일인지 따지기 시작했다. 하나같이 심각하게 놀라고 화가 난 표정이었다. 그 와중에 또 그 애는 뭐가 그리 자랑스러운지 의기양양하게 제 무용담을 읊기 시작했다. 저가 중학생들을 물리쳤다는 대목에서는 어이없을 정도로 터무니없는 내용이라 당연히 어른들도 믿는 눈치는 아니었다. 다만, 내가 인적 없는 골목에서 중학생 2명에게 돈을 뺏기고 얻어맞았다는 사건의 전말을 굳이 내 입으로 설명하지 않아도 돼서 편하긴 했다.

“이 기집애가 진짜! 똑바로 말 안 해!”

아주머니는 특히나 화가 많이 나신 거 같았다. 하나뿐인 딸내미가 얼굴에 생채기를 2개나 내고 왔으니 오죽했을까. 그러니 철딱서니 없이 뿌듯하다며 들떠있는 그 애에게 꿀밤을 때리셨겠지. 그러니 신기하게도 그 애 입이 꾹 다물어지는 것이다.

“아이고 와 그라노, 아아가 그랄수도 있제!”

그 모습을 본 옆집 할머니가 그 애를 감싸며 아주머니를 나무라셨다. 엄마는, 몹시도 억울한 듯 표정이 잔뜩 일그러져 곧 울 거 같은 그 애를 껴안아 주며 다독였다.

옆 마을에 다녀오신 우리 할머니도 내 모습을 보곤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엄마에게 자초지종을 전해 들은 할머니는 잔뜩 노하신 얼굴로 특유의 그 케케묵은 욕설을 내뱉으셨다.

“요런 백정 놈들! 수운 백정녀네 자식들!”

논에 나갔다 들어오신 할아버지도 그랬다.

“이런 쎄가 빠져 뒤질 놈들! 쎄가 만 바리가 빠질 놈들!”


그해 엄마 생신 선물은 결국 못 하는 걸로, 그냥 단념하기로 했다. 어쩌겠는가. 지난 일을 되짚으며 아쉬워한들 괴로움만 쌓일 뿐이다. 그냥 이번 한 번만 조금 무관심한 아들이 되어 보는 거다. 그래도 별이 달린 그 은색 팔찌는 비싼 만큼 꽤 예뻤는데, 그건 좀 아쉽긴 하다.

그래도 우리 집에 초대한 그 애에게 비디오라도 보여 줄 수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 멍청한 놈들이 천 원짜리만 가져가고 주머니에 500원이 남아 있는 건 몰랐던 것이다. 초등학생 꼬마가 의외로 그렇게나 저항해대니 더 뒤져 볼 생각도 못 하고 서둘러 피한 거겠지.

“아! 으...”

어제 빌려온 테이프를 비디오에 꽂아 넣고, 자리로 돌아와 튀밥강정을 한입 베어 문 그 애 입에서 문득 신음이 흘러났다.

“으... 말할 땐 몰랐는데, 뭐 먹으려니 여기가 아프네”

그 애가 부어오른 제 볼을 어루만지며 표정을 찌푸렸다. 어제는 뻘겋기만 하더니 이제는 약간 푸릇해지기까지 했다. 턱에는 아침에 새로 약을 바른 건지 붙여놓은 거즈가 깨끗해져 있었다.

나도 그랬다. 어제 점심 먹을 때까지만 해도 놈들에게 맞은 한쪽 턱이 약간 욱신거리기만 했지, 그렇게 아픈 줄 몰랐는데, 저녁에 밥을 먹으려니 음식 씹을 때마다 턱 쪽의 뼈가 자꾸 따끔거려 평소처럼 양껏 먹지 못했다. 그 애도 어제 점심은 꽤 잘 먹더니 저녁엔 밥을 굶은 걸까.

우리가 얻어터진 채 집으로 돌아온 그날, 옆집 할머니와 아주머니, 그리고 우리 엄마는 오후 늦게까지 큰방에 모여앉아, 그냥 지나치기엔 꽤 심각한 그 사안을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지 의논하셨다. 그래서 오후가 다 지날 때까지도 우리는 어른들 옆에서 자릴 지키고 있어야 했기에, 원래 계획했던 대로 같이 놀진 못했다.

그 애가 반쯤 베어진 강정을 소쿠리에 내려놓더니 입맛을 다셨다.

푸릇하게 부어오른 그 애 볼을 보고 있으니 어제 일이 떠올랐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정말 그 중학생들을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걸까. 아니면 무모한 줄 알면서도 무작정 놈들에게 달려든 걸까. 저가 놈들을 이겼다며 떠벌거리는 걸 보면... 아니 잠깐만, 이 애는 정말 저가 놈들을 이긴 거라고 믿는 걸까? 이 영특하고 교활한 애가? 응...? 교활하다고?

그때 문득, 뭔가 놓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 애에게 한 번쯤 물어봤어야 하는 거였는데 경황이 없어 잊고 있었던 것이다.

“근데 너 어제, 거겐 어짠 일로 왔노?”

별안간 건네진 질문에 그 애가 이쪽을 돌아봤다.

“어제 먼저 집에 간 거 아니었나?”

그런데 순간 그 애 눈동자가 작게 흔들리는 게 보이는 것이다. 왠지 긴장한 듯 동그래져 떨리는 눈과 무심하게 다물어진 입이 이윽고 부자연스런 표정을 만들었고, 거기에 퍼렇게 멍든 볼이 어째 기묘한 분위기마저 연출했다. 그렇게 한동안 그 애는 그 이상한 표정으로 내 눈을 쳐다보기만 했다.

TV 화면에선 한창 비디오가 재생되며 공포영화의 그 스산한 배경음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와, 와 그라는데?”

문득 싸늘한 기분이 들었다. 조금, 소름이 돋는 거 같기도 했다. 생각해 보라. 얼굴 한쪽이 퍼런 여자애가 이상한 표정을 한 채 뚫어져라 날 쳐다보고 있다. 뭐라 말을 건네도 아무런 대꾸도 없이 그저 가만히 보고만 있는 것이다. 더군다나, 때마침 흘러나오는 비디오의 음산한 소리마저 그 애의 낯선 모습을 더욱 소름 끼치게 만들었다. 얘가 갑자기 왜 이러는 거지?

그 순간 비디오에서 어떤 여성의 음습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뒤엔 어느 중년 남성의 외마디 비명까지 이어졌다.

별안간 전개된 섬뜩한 상황에 놀라 조금 뒤로 물러났다. 그런데 어색하게 떨리던 그 애 눈동자가 물러나는 나를 따라 움직여 오는 것이다. 그냥 날 쳐다보고만 있는 것도 이상한데, 부릅뜬 눈으로 눈동자만 움직여 따라오는 그 시선은 언뜻 기괴해 보이기까지 했다.

“와... 와 그라는데, 그라지 마”

점점 무서워져 더욱 뒤로 물러났다.

그 애에게서 한걸음 정도 멀어졌을 때, 이윽고 고개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몸은 전혀 움직이지 않고 구태여 고개만 돌려오는 그 섬뜩한 모양은, 저번에 그 애가 가져온 영화 사탄의 인형의 처키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자꾸 와 그라는데... 고마해...”

이젠 겁에 질렸는지, 그만하라고 말하는 내 떨리는 목소리에서 어느새 울먹이는 소리까지 섞여 나오고 있었다. 대체 왜 저런 행동을 하는 거지. 뭔가가 잘못된 걸까.

조금 더 뒤로 물러났다. 이대로 도망칠까도 싶었다.

고개가 이쪽으로 끝까지 돌아오자 이제는 몸이 움직여 왔다. 여전히 부릅뜬 눈으로 소름 끼치는 표정을 한 채, 상체를 이쪽으로 돌리는가 싶더니 이내 한쪽 손을 뻗어 바닥에 내디뎠다. 그리곤 곧 엉금엉금 기는 동작으로 양손을 번갈아 디디며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와악!”

내가 뒤로 물러남에 따라 점점 다가오는가 싶더니, 별안간 와악 하고 소리치며 한달음에 코앞까지 기어 온 것이다.

“흐아아아아!”

순간 시야가 빨개졌다. 눈앞에서 일렁이는 별도 몇 개 보였던 거 같다. 오줌도 조금 지렸었지.

영화에서는 괴물이나 귀신이 나타나면 사람들이 놀라 도망가지만, 그거 다 거짓말이다. 너무 놀라면 몸이 굳는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푸흡, 하하하하”

한동안 몸이 굳어 움직이지 못하고 있으니, 곧 그 애가 낄낄거리며 웃었다.

한순간 긴장이 풀려 몸이 축 처졌다. 놀랐던 심장이 찌릿하며 풀어졌다. 놀랄 때 갑자기 들이쉬었던 숨이 안도의 한숨으로 나오는가 싶더니 이내 눈물도 찔끔 나왔다.

“하이 씨! 와 그라는데 진짜!”

잔뜩 놀랐던 가슴이 진정되자 찔끔 나왔던 눈물이 곧 그렁그렁하게 맺히다가 이윽고 울음이 터졌다.

“흐윽... 윽윽 흐으윽...”

뭐가 그리 재밌는지 한껏 웃어 제끼던 그 애가 웃음을 멈추고 다가왔다.

“히히히... 미안, 울지마 장난이야”

양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흐느끼고 있으니, 그 애가 내 팔을 살며시 잡는 게 느껴졌다. 그리곤 얼굴을 감싼 내 손을 들추는 것이다. 손이 들춰지며, 빼꼼히 들이대는 그 애 얼굴이 울렁이는 눈물 너머로 힐끗 보였다. 괘씸한 기집애. 날 거의 기절시키려고 했으면서 아직 웃음기도 가시지 않은 얼굴로 그러는 것이다.

“아아! 저리가!”

약이 올라 손을 뿌리쳤다.

그때 알았어야 했다. 그 애가 이제 슬슬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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