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박사 학위를 하는 동안 학부 수업 조교 (Teaching assistant)를 하거나 Research assistant 등을 통해 돈을 받아 박사학위를 하는 내내 부모님에게 손 벌리는 일 없이 학비와 생활비를 모두 해결할 수 있었다. 간혹 인턴을 나가 필요한 돈을 충당하기도 했다.
박사 학위를 하는 동안 내 생활은 매우 단순했다. 하루종일 연구실에 앉아서 논문을 읽거나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돌리는 등 혼자서 연구를 하고 일주일에 몇 시간 되지 않는 대학원 수업 강의를 들었다. 그러다 보니 수업 조교를 하는 일은 내가 박사 학위를 하는 도중 유일하게 했었던 다른 사람과 함께 했던 일이었다.
처음 학부 수업 조교를 한 것은 석사과정 때였다. 내 지도교수는 학부 4학년 수업에 해당되는 전력전자라는 과목을 강의했는데 그 과목은 실험 수업이 포함되어 있었고 그 실험수업은 대학원생들이 조교가 되어 이끌어갔다.
처음 조교를 할 때 나는 여러모로 어설펐다. 특히 어설펐던 부분은 나 스스로가 실험에 익숙하지 않은 상태에서 학생들의 실험을 도와줘야 했던 것이다. 전력전자 실험실에는 Oscilloscope, power supply, probes 등등 다양한 실험 장비들이 있었는데 대학원에 입학해서 겨우 어떻게 동작하는지 기초적인 것을 배웠을 뿐이었다. 그러다 보니 학생들이 실험이 잘 되지 않는다고 도움을 요청해도 나 또한 어떻게 해결하는지 학생들과 함께 배워야 했던 처지였다. 학생들 중에는 회사 인턴 등을 통해 이미 실무를 많이 익혀서 나보다도 더 실험 장비를 다루는데 익숙한 학생들마저 있었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은 실험이 시작하기 전에 미리 익히고 연습하고 실험을 해보는 방법밖에 없었다.
두 번째로 내가 어설펐던 부분은 학생들을 다루는 것이었다. 학부를 이제 막 졸업한 나는 그야말로 조교라는 나의 권위를 어떻게 이로운 방향으로 이용해야 할지를 몰랐다. 학생들 중에는 정말 똑똑하고 성실한 학생들도 있지만 조교인 내가 아무 말을 하지 않으면 정말이지 마음대로 행동하는 학생들도 있었다. 실험 시작시간 1시간이 훌쩍 지나 실험실에 들어와 자기는 지금 실험을 시작하고 싶다는 학생을 보면 말문이 턱 막혀버릴 때도 있었다. 결국 그런 경험이 여러 번 쌓이고 나서는 수업 시작부터 제대로 된 규칙을 정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학기 초부터 학생들에게 엄격한 규칙을 적용하는 조교가 되었다.
전력전자 수업의 조교를 시작으로 다양한 수업의 조교를 했다. 그 과정에서 좋은 친구들도 많았고 좋은 교수들도 만났으며 또 좋은 학생들도 만났다. 단조롭고 큰 이벤트가 없는 대학원생 생활에 때로는 활력이 되기도 했다.
조교를 하다 보니 학생들이 어떻게 행동하고 생각하는지 자세히 관찰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알게 된 것이 있는데 학생들의 노력에도 두 가지가 있다는 점이었다. 어떤 학생들은 어떻게든 학점을 잘 받기 위해 또는 조교나 교수가 정해놓은 기준을 맞추기 위해 갖가지 애를 쓴다. 반대로 다른 학생들은 자신이 배워야 할 내용을 제대로 배우기 위해 열심히 노력한다. 미국의 대학에는 이렇게 자신이 배우는 것에 애정을 가지고 그것을 잘 배우기 위해 노력하는 학생들이 꽤 많았다. 누가 더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는가?라는 질문에 당연히 두 번째 부류의 학생이 더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는 것을 여러 번 목도했다. 나보다 훨씬 더 뛰어난 능력과 가능성을 지닌 학생도 여러 번 만났는데 항상 두 번째 부류의 학생들 중에서 그런 학생들이 나왔다. 내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조교를 하면서 학생들을 통해 배운 것이다.
대학원 수업 조교를 하는 것은 나에게 너무나 소중한 일자리였다. 덕분에 학비를 내지 않고 많지는 않지만 학교에서 나오는 생활비를 받아 생활을 꾸려나갔다. 많은 실험 장비를 다루는 법을 배웠고 학생들과 소통하는 방법도 배웠으며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나가야 할 것인가에 대한 기준도 세울 수 있었다.
가끔 문뜩 궁금해지기도 하다. 과연 학생들은 어설펐지만 나름대로 애를 썼던 나를 어떤 조교로 기억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