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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는 엔지니어
Nov 04. 2024
미국에서 엔지니어로 살기로 결심한 이상 가장 중요하게 해결해야 할 점은 바로 영주권을 받는 것이었다. 나는 미국에서 공학박사 학위를 받았기 때문에 학교를 졸업한 후에 최대 3년 동안 미국에서 일할 수 있었고 취업을 한 후에 H1B라고 불리는 취업 비자까지 받게 되면서 미국에서 취업비자로 6년간 문제없이 일을 할 수 있긴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영주권이 없이 미국에서 살아가는 건 여러모로 불편했다. 특히 영주권자만 뽑는 회사들이 적지 않게 있어서 내가 갈 수 있는 회사가 상당히 제한적이고 이직을 할 때마다 비자를 다른 회사로 옮기는 절차를 밟아야 하는 것도 여간 귀찮은 것이 아니었다. 뿐만 아니라 취업비자로 있는 경우 직장을 잃게 되면 60일 이내에 재취업을 하거나 혹은 본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규정까지 있었다. 그래서 취업 비자를 받자마자 영주권을 신청해야겠다는 생각을 어렴풋이 했다.
나의 이런 생각에 불을 지핀 사람은 두 번째 회사에 들어갔을 때 나에게 무척이나 잘해주었던 한 나이 많은 엔지니어의 조언이었다. 영주권을 받는 데에는 두 가지 길이 있었다. 한 가지 방법은 회사가 나의 영주권을 신청해 주는 경우였다. 이 경우 나는 돈도 내지 않고 회사가 모든 것을 알아서 해주기 때문에 비교적 절차상 비교적 수월하게 영주권을 받을 수 있었다. 문제는 이렇게 회사를 통해 영주권을 받는 경우 회사에 묶인다는 문제가 있었다. 영주권을 받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 회사를 옮겨버리면 회사가 영주권을 취소할 수도 그리고 영주권에 들어간 비용을 나에게 청구할 수도 있었다. 다른 방법은 National interest waiver, 흔히 NIW라고 불리는 방법을 사용해서 영주권을 신청하는 것이었다. 이 방법은 주로 이공계에서 논문과 특허를 보유한 사람들이 흔히 쓰는 방법으로 회사를 거치지 않고 스스로 영주권을 신청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충분한 수의 논문, 특허 그리고 그것이 미국의 국익에 이로운 것이라는 것을 스스로 증명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그리고 다른 엔지니어의 조언은 회사에 기대지 말고 스스로 영주권을 빨리 처리하는 게 여러모로 나을 것이라는 조언이었다.
나는 박사학위를 하는 도중에 몇 개의 논문을 쓰기는 했지만 실적이 뛰어나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회사를 통해 영주권을 신청하는 것도 영 내키지 않았다. 우선 회사가 영주권을 입사 후 바로 신청해 주는 것이 아니라서 그 시간을 기다리는 것도 부담이었고, 영주권 절차가 끝날 때까지, 끝나고 나서 한동안은 회사에 묶이는 신분이 되는 것이 싫었다.
나는 모험을 강행하기로 했다. 논문 실적이 많지는 않지만 NIW를 통해 스스로 영주권을 신청해 보기로 한 것이었다. 그리고 여러 변호사를 통해 문의를 하기 시작했다. NIW를 통해 영주권을 받을 확률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렸다. 한 곳에서는 내가 영주권을 받지 못할 경우 변호사 비용을 환불해 주겠다는 조건을 내걸었다. 다른 곳에서는 영주권을 받을 수 있을지 확실치 않으니 선택을 하시라고 했다. 그리고 다른 한 곳에서는 더 자세한 스펙을 물어보면서 보다 신중한 답변이 돌아왔다. 나는 결과적으로 가장 신중한 답변이 돌아온 곳을 택했다. 대강 보낸 나의 문의 이메일을 신중하게 검토하고 답변한 변호사의 성의가 믿음직스러웠기 때문이다.
영주권 절차는 크게 두 단계로 나뉘었다. 첫 단계는 I-140이라고 불리는, 영주권을 받을만한 자격이 있는지를 심사하는 것이었고 두 번째 단계는 I-485라고 불리는 신분을 영주권 신분으로 바꾸는 절차였다. I-140을 NIW로 통과하기 위해서는 추천서가 필요했다. 내가 졸업한 대학원의 교수들에게 추천서를 받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문제는 나를 잘 모르는 사람에게 받는 추천서였다. NIW는 나를 개인적으로 잘 알고 있는 사람뿐만 아니라 나를 잘 모르지만 오로지 나의 논문으로만 나를 아는 사람에게도 추천서를 받아야 했다.
대체 나를 모르는 누가 내 논문만을 보고 추천서를 써줄 것인가? 답은 하나였다. 내가 가만히 있으면 아무도 써주지 않을 것이다. 그날부터 나는 생판 한 번도 만난 적도 없는 전력전자 분야를 연구하는 대학 교수들에게 무작정 이메일을 보내 추천서 부탁을 하기 시작했다. 대다수의 경우 답장이 오지 않았다. 그럼에도 계속해서 이메일을 보내고 기다리기를 반복했다. 결국 몇몇 교수들이 추천서를 써주겠다는 긍정적인 답변을 해주었다. 드디어 NIW를 내기 위한 서류 준비를 시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보내진 I-140 서류. 교수들의 추천서, 나의 논문실적, 나의 박사 학위 등등 나의 우수함을 증명할 수 있는 모든 서류를 보냈다. 빠르게 결과를 얻고 싶어서 일부러 돈을 더 주고 빠르게 결과를 내주는 premium으로 지원했다. 그리고 2주도 채 지나지 않아 결과가 나왔다. 통과였다. 무척이나 기뻤다. 취업비자를 얻고 9개월이 지난 무렵에 영주권 I-140까지 통과한 것이다.
그런데 더 긴 기다림이 기다리고 있었다. 다음 단계인 I-485를 지원해서 최종적으로 영주권을 받기 위해서는 내 차례가 돌아와야 하는데, 하필 내가 I-140을 통과했던 2023년 6월부터 I-485를 지원하기까지 무려 1년 3개월이 넘는 기간 동안이 나는 내 차례가 돌아올 때까지 하염없이 기다려야 했다. 이 기다리는 시간은 정말이지 랜덤인데, 어떤 때에는 기다리는 시간이 전혀 없이 바로바로 영주권을 받기도 하고 또 나처럼 운이 없으면 1년이 넘는 대기시간을 기다려야 하기도 한다.
그렇게 나는 1년 하고도 3개월이 더 넘는 시간을 기다려 2024년 10월에 드디어 실제로 영주권을 받게 되는 I-485를 신청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2024년 11월 나는 영주권 신청을 위한 모든 절차, I-485서류를 제출하고, 신체검사를 하고, 지문을 찍는 등의 모든 절차를 마무리하고 최종적으로 영주권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사실 영주권이 없이 미국에서 학교를 다니고 취업을 하는 그 과정이 쉽지 않았다. 이전 글에서 이직을 하려고 결심했는데 결국 이직을 하지 않기로 결심한 이유 또한 I-485 신청 때문이었다. 이직을 하게 되면 장기로 미국 밖 해외 출장을 가야 했는데 I-485 신청이 막 열리는 바람에 영주권을 신청해 두고 오래 미국 밖을 나가고 싶지 않아 이직을 포기한 것이다.
나는 박사 학위를 하는 도중에 정말 그냥 학교를 그만두고 취업을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 때도 있었다. 그런데 영주권이 없는데 학교를 그만두고 미국 취업을 하려면 비자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잘 몰라서 결국 끝까지 박사학위를 마칠 수밖에 없었다. 회사에서 해고가 일어날 때 두려웠던 이유도 영주권이 없는 상태에서 해고가 되면 60일 이내에 재취업을 해야 하는 규정 때문이었다.
사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부모님이나 친척의 도움으로 미국 영주권을 가지고 있는 친구들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영주권만 있으면 나도 내 마음대로 학교도 그만두고 이직도 할 수 있고 해고되어도 걱정도 없을 텐데 하면서 말이다.
이제 영주권을 위한 모든 절차를 마치고 영주권이 나오기만을 기다리면서 돌이켜보면 영주권 없이 미국에서 살아가기는 나에게 절제를 하면서 살아가도록 만든 것 같다. 박사 학위를 포기하지 않고, 조금 싫다고 바로 이직을 해버리지도 않으며, 끝없이 나를 갈고닦아 우수함을 증명하면서 살아가도록 말이다.
그리고 이렇게 영주권을 받고 나면 스스로의 능력으로, 스스로의 우수함을 증명해 내어 미국 영주권을 받았다는 그 자부심으로 앞으로는 더 잘 살아나갈 수 있을 것 같다. 자수성가한 부자들은 부를 쉽게 잃지 않지만 운이 좋아 로또에 당첨되거나 거액의 자산을 상속받은 사람들이 어처구니없이 그 돈을 잃는 것을 간혹 목도하곤 한다. 아마도 스스로 얻은 것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 그리고 그 소중함에 대한 인식차이가 운명의 차이를 만들지 않을까 생각한다.
나도 그렇게 내 힘으로 스스로 얻은 영주권에 대한 긍지를 가지면서 내가 미국에 살고 싶었던 이유, 엔지니어로서 마음껏 성장하면서 기회를 누리며 살고 싶다는 그 소망을 실현하면서 살아갈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