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개의 오퍼를 모두 거절하고 난 후 지금 다니는 회사가 마음에 안 들어서 일단 뽑아주는 곳으로 이직하는 것은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보다 거시적으로 앞으로 전력전자 엔지니어로서 어떻게 포지셔닝을 할 것인지 구체적인 앞으로의 커리어에 대한 계획을 세워보기로 했다.
우선 나의 현재 상태에 대한 점검이 필요했다. 나는 박사 학위를 받을 때는 태양광 변환을 위한 DC-AC 컨버터에 대한 논문을 썼지만, 실제로 인턴과정을 거치고 회사일을 2년 넘게 하면서 DC-DC 컨버터에 대한 일이 나와 더 잘 맞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의 강점은 많은 전력을 요하는 높은 전력 밀도를 가진 복잡한 회로를 잘 다룬다는 것과, 회사에 들어오고 나서 거의 실험실에 살다시피 하면서 실험을 통해 많은 것을 배운 것, 그리고 복잡한 회로를 잘 이해하고 잘 분석한다는 정도였다. 그리고 회사 일 자체가 스위칭 소자 중심이기 때문에 그에 대한 이해도도 높은 편이었다. 스위칭 소자는 모든 전력전자에 포함되는 부품 중 하나이기 때문에 이를 잘 이해한다는 것은 큰 장점이었다.
하지만 이직을 위해 많은 면접을 통해 얻은 것 중 하나는 어디가 나의 약점인가 하는 것을 알게 된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가장 큰 약점은 전력전자 엔지니어는 제어에 대한 지식이 많이 요구되는데 나는 이론으로만 이해하고 있을 뿐 실제로 제어 이론을 현업에서 적용해 본 경험이 매우 적은 편이었다. 뿐만 아니라 전력전자 엔지니어가 일하는 회사는 크게 보면 두 개의 종류가 있다. 첫 번째는 나처럼 전력반도체를 만들어내는 반도체 회사에서 일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전력반도체를 직접 사용해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회사였다. 나의 경험은 반도체 회사에만 국한되어 있다는 것이 나의 한계지점인 것 같았다.
그래서 이렇게 계획을 세웠다. 첫 직장생활 10년간은 내공을 쌓는 기간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무언가를 성취해야 한다는 목표보다는 최대한 많은 것을 배우고 10년 후 잘하는 전력전자 엔지니어가 되는 계획이 현실성이 있는 것 같았다. 회사에 취업한 지 2년이 넘었으니 앞으로 7-8년 동안 나는 어디서 어떻게 성장해야 할까? 내가 내린 결론은 앞으로 두 번의 이직을 통해 몇 개월 다니지 않고 그만둬버린 첫 번째 회사를 제외하고 첫 10년 동안 총 세 개의 회사를 제대로 경험해 보기로 결심했다. 지금 현재는 보다 단순한 구조인 스위칭 소자에 집중하고, 다음 이직에서는 반도체 회사가 아니라 전력 반도체를 이용해서 무언가를 만드는 전기차 회사, 많은 전력을 소모하는 데이터센터를 가진 IT회사 등등에서 전력반도체를 사용하는 사용자의 입장이 되는 회사 경험을 해봐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리고 그 후 또다시 한 번의 이직을 통해 내가 부족한 제어이론에 대한 경험을 쌓을 수 있는 IC 위주의 회사를 경험해 보기로 결심했다.
이렇게 나의 미래에 대한 청사진을 그리자 이것을 그려보는 것만으로 눈이 부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물론 계획이라는 것이 많은 경우 뜻하지 않게 잘 지켜지지 않지만 그럼에도 계획을 해봄으로써 내가 가고 싶은 길에 대한 더 강한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계획대로 풀리지 않더라도 나의 목표는 또렷하게 보였다. 정말 잘하는 전력전자 엔지니어가 되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내가 잘하고 또 좋아하는 DC DC 컨버터라는 영역에서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싶다.
이렇게 앞으로 10년 동안 내가 걸어가고 싶은 길이 또렷하게 보이자 지금 내가 해야 할 것도 선명해졌다. 연봉이 적다고 불평하면서 불만을 품고 시간을 흘러 보내기에는 지금은 너무 귀한 시간이었다.
현재 직장의 큰 장점은 나의 제품을 가질 수 있는 것이었다. 그것이 실패가 되든 성공이 되든 내가 처음부터 시작해서 마무리까지 하게 될 반도체를 가질 수 있다. 그것에 더 많은 애정을 가지기로 했다.
그리고 내가 지금 있는 자리는 새로운 것을 많이 시도할 수 있는 자리이다. 많은 동료들이 자신의 특허를 쓰거나 논문을 쓰곤 한다. 나도 그렇게 하기로 결심했다. 학생 때처럼 무작정 많은 논문이나 특허를 쓰는 것보다는 정말 퀄리티가 좋은 논문이나 특허를 써보기로 결심했다.
내가 부족한 제어 이론에 대한 공부 또한 지속하기로 결심했다. 비록 지금 직장에서 제어이론을 깊이 있게 경험해 볼 기회는 적지만 그럼에도 다음에 그 기회가 왔을 때 놓치지 않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공부의 끈을 놓아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바랬던 기회를 찾는 것이다. 내가 경험하고 싶은 것을 경험하게 해 줄 수 있고 또 나의 성장을 도와줄 자리가 난다면 과감하게 움직일 생각이다. 하지만 그전까지는 나의 지금 직장에서 최대한 많은 것을 배우고 성장하기로 결심했다.
이렇게 미래에 대한 청사진을 그리고 내가 지금 해야 할 일들을 정리하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처럼 내가 하고 싶은 일에서 기회를 얻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원하는 기회를 찾을 기회조차 없이 살아간다. 내가 조금만 운이 나빴다면 나 또한 평생 동안 내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고 싶은 않은 곳에서, 부딪히기 싫은 사람들과 부대끼면서 살아가야 하는 운명에 처했을 것이다.
그렇게 결심했다. 앞으로 엔지니어로 살아가면서 우여곡절을 겪어야 될 것이다. 어쩌면 해고를 경험할 수도, 어쩌면 나쁜 직장 상사나 동료들을 만날지도, 어쩌면 내가 했던 일들이 수포로 돌아가는 일도 겪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내가 원하는 일을 하고 있다는 그 자부심을 잃지 않기로. 나는 삶에서 남들은 누리지 못하는 많은 기회들을 얻었고 또 미래에도 얻을 것이라는 것을 항상 기억하기로.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내가 일하는 분야에서 정말 최고의 실력자가 되기로, 내 능력으로 내가 어디까지 해낼 수 있는지 끝까지 가보기로. 그렇게 결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