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나는 요즘에 새로운 한국인(특히 한국에 사는)을 만나면 첫인사와 더불어 건네는 당부의 말씀이 있다.
"제가 겉모습은 이래도 반 외국인이니, 혹시 결례를 범하더라도 너그러이 봐주소서."
한국말을 어눌하게 구사하지는 않으니 다들 "잉? 말 잘하는데?" 하시는데 이건 비단 언어에 국한되지 않은 나의 전반적인 한국식 에티켓에 대한 이야기로, 인생의 반 이상을 내 나라를 떠나 외국에서 산 사람이 본인의 자연스럽지 않은 말과 행동에 대한 양해를 미리부터 구하고자 날리는 양해 선빵이랄까?(언어 죄송)
지금은 한국어로 글도 쓰지만 나는 8세까지 한국어도, 한글도 쓰지 못하는 미쿡 아이였다. 40이 넘은 지금도 어린 시절 미국에서의 자아가 불쑥불쑥 튀어나올 때가 있는데, 특히 미국인들을 만나면 뭔가 익숙한 것이, 그 분위기에 스며들어 나도 모르게 미쿡식 유머를 시전 하는 나 자신에 당황하기도 한다(눈치채셨을지 모르겠지만 개그 욕심 있는 거 맞습니다). 내 안에는 참 많은 내가 있다.
지금 우리 애들이 내가 아무리 한국말로 질문해도 독일어로 대답하는 것처럼 나도 부모님의 질문에 영어로 대답하던 시절이 있었었다. 어쩌면 그래서 내가 우리 아이들의 한국어 교육에 태평인지도 모르겠다고 지금 이 순간 깊은 깨달음이 왔다(나의 9세, 5세 딸들은 한글을 읽지도 쓰지도 못하는 문맹이다ㅎㅎ 미안하다). 나도 우리 친언니도 꽤 커서까지 한국말을 잘 못했는데 지금은 수다 9단이니 늬들도 언젠가는 읽고 쓰겠지.. 나나 잘하자... 하는 마음이다.
나는 사람의 국민성을 형성하는데 중요한 시기가 중. 고등학교 시절이라고 생각하는데 그 시기에 인생 살면서 필요한 지식, 상식, 사회성 등을 가장 많이 배우고 스펀지처럼 흡수하기 때문이다.
중. 고등학교를 한국에서 나온 덕에 나는 "우리 미쿡에서는~" 스러운 어눌함은 없지만 성인이 되어서부터는 유럽물이 들어 자세히 들여다보면 "뭔가 좀 다른데?" 하는 면이 분명히 있다!
사실 지금 나는 한국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스위스 취리히 공항으로 향하는 기차 안이다. 부모님도 뵙고, 볼 일도 있어서 짧게 일주일 다녀오려는 것인데 그러고 보니 오늘이 무슨 요일이지? 헉, 수요일!
독자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후훗) 노트의 글을 부리나케 컴퓨터에 옮겨 쓰고 있다. 취리히행 기차에서 노트북을 펴고 앉아 마감에 쫓기는 작가 스타일로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자니 이 기분 마치 캐리 브래드쇼. 쫌 좋은데?
유럽에 20년 넘게 사는 아주미가 한국에 가면 가장 당황스러운 순간이 있으니, 그것은 훅 들어오는 외모 지적이다. 유럽에 오래 살다 보면 우리나라에서 흔히 당하는 외모지적에 허걱쓰!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약하게는 "너 오늘 피곤해 보인다.", "살쪘네."로 시작해서 강하게는 "어머, 피부가 왜 그래?! 왜 뒤집어졌어?"....
서양권에서는 상대방에게 하면 굉장히 실례인 외모 지적들이 오고 간다. 돌이켜보니 서양권에서는 외모에 대한 코멘트 자체를 잘하지 않는다. 특히 외모의 결점에 대해서는! 혹시나 해도 뒤에서 몰래몰래 할지언정 당사자 얼굴에 대고 하는 경우를 본 적은 없다.
우리 남편과의 일화가 하나 있다.
예전부터 가수 성시경의 팬인 나는 늘 시경오빠를 따라 다니는 수식어, '우유빛깔 성시경'을 한번 남편을 향해 "우유빛깔 토마쓰~"로 바꿔 외쳐준 적이 있다(맛있는 걸 사줬나? ㅎㅎ).
한국말 웬만한 건 알아듣는데 못 듣던 말인데? 싶었는지 무슨 소리야? 묻는 남편에게 설명을 해 주었더니,
"헉, 그렇게 심한 말을! "깜짝 놀라며 "지금 내 몸이 허여멀건하다고 놀리는 거야?!" 라며 두 손으로 윗몸을 가린다. 아맞다, 방금 생각났는데 이 대화는 야외 수영장 어딘가에서 오고 갔었다.
"아니, 당신 예쁘다고. 얼굴도 하얀 것이. "
"뭐야, 자꾸 하얗다고 그러고!"
"응..?"
알고 보니 백인들은 하얗다고 하면 싫어한다!! 대부분의 백인들은 햇빛에 적당히 그을린 섹시한 구릿빛 피부가 로망으로 우리 남편도 본인이 저~기 어디 스페인 섬에 가면 돌아다니는 근육도 적당히 있고, 피부도 올리브톤의 hot guy였으면 좋겠단다.
응..................? ㅋㅋㅋㅋㅋㅋㅋ나 잠깐 좀 웃을게! ㅋㅋㅋㅋㅋㅋㅋ
남편, 나는 당신을 엄청 사랑하지만 당신은 그쪽이 아니야. 유희열과인 우리 남편이 김종국이 장래희망이었다니!
그 후에 나는 당신이 하얘도 좋아. 지금 그대로가 제일 멋져. 나 원래 유희열과 좋아해(남편에겐 Mark Zukerberg 과라 설명함. 참고로 남편은 Mark Zukerberg의 팬이다. 나의 빅픽처) 한참을 떠벌떠벌 삐친 걸 풀어줬었다. ㅎㅎㅎㅎㅎ 아이고, 이게 이럴 일이냐!!
그 이후로 나는 홍길동이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했듯이 백인에게 피부가 하얗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한다.
그 외에도 우리는 칭찬으로 자주 하는 "너 얼굴 진짜 작다. 소두다.(헉!)"은 들어 본 적도 없고, 외모의 결점이 될 수 있는 요소, 피부 트러블이라든지, 떡진 머리, 구겨진 옷 등은 더더욱 가족이 아니고선 절대로 지적하지 않는다. 개인주의의 좋은 예이다. 내 친구가 피부가 뒤집어지든지 말든지 '그러든지 말든지' 관심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런가 보지', '그럴 수 있어' 상대방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것이다.
나의 위치가 애매할 때는 애매해도 유럽과 아시아의 다른 점, 장단점을 객관적인 시각으로 보기에는 이만한 명당이 없는데 외모에 대해서 왈가왈부, 이것만은 정말 개선되길 바란다.
이상, 한국행을 앞두고 안 그래도 외모비수기인데 나를 향해 꽂힐 이런저런 비수들이 두려운 스위스 아주미의 일장 연설이었습니다. 혹시라도 저를 보시거든, 외모 지적은 꿀꺽 삼켜놓으셨다 저-기 숲 속에 들어가서 '아주미 귀는 당나귀 귀!' 한번 시원하게 외쳐 주시기 바랍니다.
난 이제 비행기 타러 가야 해서 이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