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출할 때는 풀을 뜯어먹어보아요
어느 날씨 좋았던 주말, 재즈 음악을 들으며 남편이 아침에 빵집에 가서 사 온 따뜻한 크루아상과 커피로 여유로운 아침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띵동 초인종이 울린다.
누군가 나가보니 전에도 한 번 등장한 적 있었던 윗집 슈테판.
"너네 오늘 뭐 해? 우리랑 오후에 어디 가까운 데 가서 산책할래? "
"그래, 좋아! 몇 시쯤 떠날까?"
"점심 먹고 준비해서 2시쯤 출발하자."
"좋아. 이따 보자."
이 가족은 우리 윗집 사는 스위스 가족으로 슈테판, 플로린, 그리고 7살짜리 아들 리안. 부부는 나와 동갑이고 아들 리안은 우리 애들과도 친하고 잘 놀아서 한 번씩 같이 나들이도 하고 어쩔 때는 애들 재워 놓고 어른들끼리 번개로 와인 한 병들고 만나 한잔 하는 친구들이다. 갑자기 계란이나 우유가 떨어졌을 때, 부담 없이 서로 띵동 거리며(요즘에는 라헬과 리안이 열심히 심부름 다니기도 함) 좀 빌려달라 얘기할 수 있는 편한 사이이다.
약속 시간이 되어 애들 등산화 신겨서 차고로 내려가보니, 윗집 가족도 다들 등산복 입고 배낭 메고 준비 완료 상태이다. 역시 스위스인들은 약속한 시간에 정확히 나타난다!
우리가 오늘 갈 곳은 옆 칸톤 Zug에 있는 Zugerberg으로 해발 1000m 정도로 이곳에서는 귀여운 언덕쯤 되겠다. 차를 세워놓고 Bergbahn이라 불리는 산악열차(아래 첫 번째 사진)를 타고 쭉 올라가서 그 위에서 산책하는 코스다.
열차를 타고 올라가 산공기 마시며 걷고 있는데 앞서 가던 라헬과 리안이 멈춰 서서 입을 오물거리고 있는 거다. 다가가 "너네 뭐 먹어?" 물어보니,
"우리 풀 먹어. 이거 먹어도 되는 풀이야."
"응? 풀? 풀을 왜 먹어? 누가 그랬어?"
"학교에서 배웠지!" 둘이서 합창을 한다.
알고 보니 초등학교에 있는 과목 중 NMG라고 Natur.Mensch.Gesellschaft라는 과목으로 자연. 인간. 사회에 대해 배우는 시간인데 (이 과목이 전에 얘기한 인문계 학교로 진학 가능 여부를 판가름하는 내신성적에 반영되는 중요한 과목 중 하나이다), 이 수업시간에 뭘 배웠는지 둘이서 풀이름을 줄줄 읊고 이거는 식용이고 저거는 독초고..
스위스 학교에서는 유치원에서부터 정기적으로 숲 속 체험을 가는데 이때 산에서 불 피우기, 독초 혹은 독버섯 구분하기, 꿀벌과 일벌 다른 점, 발자국만 보고 무슨 동물인지 맞히기 등등 숲 속 체험 한번 다녀오면 애들이 거기서 배운 외계어를 쏟아내는데 그래서인지 같이 등산을 가 보면 스위스인들은 등산 행동 강령이 몸에 배어있다.
'내 딸이 저런 걸 다 알다니! 학교 보낼 맛 나는구나. 다 컸네 다 컸어.'
잠시 감상에 젖어 있는데,
"엄마도 먹어봐."
라헬이 풀 한 줄기를 건넨다.
"으.. 응? 아니, 엄만 괜찮아." (엄마 개인적으로 별로 안 먹고 싶어.)
"먹어야 해!"
뭔가 라헬이 엄청 바라는 눈치다. 옆을 보니 플로린과 슈테판도 질겅질겅 한 줄기씩 씹고 있다.
아오.
이걸 먹어야 하는 이유 누가 나에게 설명 좀.
샐러드 먹으라 하면 입에 갖다 대줘도 안 먹는 라헬이 풀을 우걱우걱 씹고 있으니 좋아해야 하는 건가?
일단 입에 조금 넣어봤다.
풀이 쓰지 뭐. 풀맛이었다.
라헬 안 볼 때 손에 있던 풀을 자연스럽게 방생(?)하고
"가자 이제." 하며 앞으로 나가는데, 남편이 쓰윽 다가와 내 손을 잡으며, "맛있었어? "하며 씩 웃는다.
아놔 ㅎㅎ
한참을 가니 등산로 곳곳에 바비큐를 할 수 있게 해 놓은 Grillplatz에 도착했다. 잠시 쉬어가려 다들 모이자 슈테판이 말하길,
"이제 불 한번 피워볼까?"
"응? 불은 왜? 우리 점심 먹고 와서 아무것도 안 가져왔는데?"
"아, 이 도시사람 (친구들이 나를 놀리려고 자주 부르는 Stadtmensch). 등산은 이거 하러 오는 거지. "
" 아 ㅋㅋ 그래, 하자. 담에는 우리도 가져올게."
그들이 넉넉히 우리 것까지 가져온 소시지를 굽고 플로린이 가져온 빵 반죽을 나뭇가지에 돌돌 말아 불 위에서 구워 먹는 Schlangenbrot (Schlange는 뱀이라는 독일어로, 뱀 모양 빵) 도 만들어 불 위에 올려 타닥타닥 불 소리를 들으며,
"아, 좋다. 이거 하러 오는 거 맞네."
"그럼 한잔 해야지."
"응? 술도 있어?"
슈테판이 배낭에서 와인 한 병과 플라스틱 와인잔 4개를 꺼낸다.
" 옴마야! 이건 언제 챙겼어?! "
" 우리 모임에 와인이 빠지는 건 옳지 않아."
"꺄악! 좋아요! "
그들은 그렇게 항상 배낭 안에 등산용 와인따개, 와인잔, 접시, 포크와 나이프가 들어있어 언제든지 출발할 수 있게 현관에 걸어 둔다 한다. 아, 너무 현명한데?
그날 그렇게 잘 얻어먹고 집에 가는 길에 들른 휴게소에서 간식은 우리가 쏜다, 조금이나마 고마운 마음을 표현했다. 오늘의 교훈, 스위스인과 산에 갈 때는 만반의 준비를 해서 가야 함. ㅎㅎ
한 번은 유나 친구 가족과 함께 Arnisee라는 곳으로 등산을 갔을 때이다.
스위스 등산로에는 가끔 등산로를 벗어나 소들의 영역을 가로질러 다시 등산로로 가야 하는 곳이 있는데, 그런 곳을 지나야 했다. 울타리가 쳐져 있어도 가까이 가기 부담스러운데 그 안으로 내가 들어간다고? 오마이.
"꼭 여기로 가야 해? 나 좀 무서운데.."
"엄마~엄마~엄마~"
라헬이 우리 엄마 못 말린다는 뜻으로 고개를 저으며 보란 듯이 소들 쪽으로 걸어간다.
앞서 가던 친구들도 소 옆에서 사진을 찍으며 나를 기다린다.
"괜찮아, 빨리 와."
남편이 말하는데,
'오마이, 내가 왜 그래야 하지? 누가 설명 좀... 저 소 옆을 지나가야 한다고? 그들의 영역이라며, 공격하면? 아오!'
별다른 수가 없어서 얼른 남편 옆으로 가서 최대한 멀리 피해 가는 내 모습이 우스웠는지 라헬이 친구에게
"우리 엄마 겁쟁이야."라고 말하는 소리가 들린다.
나 겁쟁이 아니고 차도녀거든, 구두 안 신고 온걸 다행이라 생각해!라고 허공에 대고 외쳐본다!
그렇게 안 느껴졌을 수도 있겠지만, 나는 자연 친화적인 스위스의 라이프 스타일을 좋아한다(믿어주세요). 차가운 도시 여자, 나만의 템포로 자연을 즐기며 천천히 알아가련다. 스위스 아주미는 아직 진화중!
다음 주말에는 배낭에 소시지, 옥수수, 그리고 와인 한 병 챙겨서 윗집 초인종 한번 눌러봐야겠다.
"슈테판, 우리 등산 가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