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sto appassionato
낮잠에서 깨어나 잠시 여긴 어디? 나는 누구? 모먼트가 지나고,
'아, 나 한국이었지.'
다시 이불을 재정비해 덮고 휴대폰을 찾는다.
거실에서는 엄마, 아빠가 스포츠 경기를 시청하며 나누는 이야기 소리가 들린다.
유학 가기 전까지 대학생 시절 내 방이었던 이 방에서 나 혼자 자고, 옷 갈아입고, 20년 전이랑 똑같은 포즈로 거울 앞에서 화장을 하고... 내 몸에 이 집 사용 설명서가 프로그래밍되어 있는지 이 방에만 들어오면 스위스 아주미 모드는 사라지고 대학생 나로 돌아가 엉망진창 옷도 늘어놓고 나도 늘어져서 넷플릭스에서 볼 것이 있느냐 없느냐가 지금 나에게 닥친 최대의 난제이다. 팔자 좋은 외동딸놀이(언니, 메롱!).
일주일 한국. 그것도 애.들.없.이.
애들이랑 같이 오면 물론 너무 좋지만, 난 내 남편과 애들을 사.랑.하.지.만!!
딸린 식구들 없이 혼자 와서 나 하고 싶은 것 위주로 하는 자유부인 일주일. 이거 너무 괜찮다.
공항에는 오랜 친구 진박사가 나왔다. 평소 같았으면 나온다는 친구에게 나오지 말라고, 혼자 간다고 했을 텐데 요즈음에 내가 좀 달라졌다. 신세도 질 줄 알아야 한다는 생각이다. 본인이 할 만하니까 제안했겠지.
"좋아! 데리러 와 줘. 앗싸! "
"너 내가 저녁까지 데리고 다닐 거니까 비행기에서 올 때 자고 와!"
"넵! 예쓰 맴!"
이 친구로 말할 것 같으면 타고난 체력특전사, 놀 때와 돈 쓸 때만큼은 절대 지치지 않는 에너자이저인데 오마이, 비행기 11시간 타고 가서 만나 바로 놀려면 비행기에서 좀 자고 가야겠구나.
처음 스타트는 우리는 지금 인천에 있으니 조 to the개 to the 구 to the 이!
진박사님이 이끄는 대로 간 조개구이집은 역시나 맛있었고, 오늘은 피곤해서 술 안 마실래 했다가, 그럼 딱 한잔만으로 노선을 틀어 (이걸 어떻게 소주 없이 먹어?!) 진짜로 나만 딱 한잔 마시고 남은 술은 친구가 집에 가져갔다 한다(친구 남편 둥절).
그렇게 스타트 끊은 후 그다음 날은 노래노래하던 1년에 한 번은 괜찮아 곱창에 소주 한잔하고 옷에 밴 냄새 걱정하는 척하며 친구가 사랑하는, 나는 정작 처음 가본 하얏트 라운지에서 번개도 하고, 그 다음다음 날은 네가 좋아할 거라며 친구가 데리고 간 도방에서 스위스 집에 데려갈 귀염둥이 달 항아리도 만나고, 미술박사 진박사님의 인솔하에 사간동 갤러리들도 가고..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다는 미술 하는 여자와 미술품 보러 가기 (이 작품 보면 어떤 생각이 들어?라는 질문에 스위스 아주미는 아무 생각 안 들어.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오랜 친구가 이렇게 취향 저격으로 데리고 다녀주니 새삼 그녀에게 고맙고 잘해야지 다짐도 해보지만 그것도 잠시, 첫날에는 이렇게 하루종일 붙어 다니니 우리 여행 온 거 같지 않냐며 꽁냥 거리던 그녀들도 사흘 연속 만나자 티격거리며 아, 우리는 여행 3일 이상은 안 되겠다고 ㅎㅎ 찐친모먼트가 있기도 했다.
나는 새로운 나라나 도시, 심지어 사람에 대한 감상을 정의할 때 나 혼자 중요한 포인트가 있는데 그것은 Tempo이다. 그것이 단어 그대로 속도로 해석되든 음악적 용어의 템포로 해석되든 맥락은 같다. 내가 음악 하는 사람이라 이것에 예민할 수도 있는데 내 주위의 나와 유대관계가 있는 모든 것들의 Tempo가 나에게는 중요하다. 이것을 이렇게 정의하게 된 지도 얼마 안 되는데, 그전에는 내가 그냥 예민한 사람인 줄 알았다.
자라면서 무던한 친언니와 달리 예민보쓰 스타일로 좀 별난 아이로 커왔던지라 예민함이 나의 약점이라고 생각하던 때도 있었는데 처음으로 나 자신을 납득되게 나에게 설명해 준 사람이 우리 남편(a.k.a 라헬 아부지)이다.
"당신은 세상에서 제일 예민한 작업을 하는 예술가잖아. 예민함이 너의 무기야. 그래야 남들이 느끼지 못하는 포인트를 느끼고 표현해 내지. 미세한 움직임에 따라 음이 달라지는 걸 예민하지 못한 사람이 어떻게 캐치해 내?"
아, 뭔가 눈물 나게 고마웠다.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는 나의 그런 부분을 이해해 주는 남편.
그렇지만 이 아름다운 결혼 11년 차 부부의 이야기도 요즘엔 예민보쓰 부인이 마구 예민해지기 시작하면 남편은 자꾸 괜찮냐며 (괜찮은 사람한테 자꾸 괜찮냐고 묻기 기술 들어감) 가서 자라고 한다는 들려오는 소문이 있다. ㅎㅎ 아놔
다행히 나의 이 예민함은 나 자신에 대한 예민함이지, 다른 사람에게는 또 관심이 없어서 다른 이가 뭘 어쩌는지는 내 눈에는 안 보이는 경우도 많으니, 내 주위분들 긴장하실 필요는 없다. 물지 않아요.
다시 Tempo 얘기로 돌아가서, 스위스의 템포는 매우 느리다. 파리는 서울과 스위스 중간에서 서울 쪽에 더 치우친 템포. 뉴욕은 서울과 좀 더 가까운 템포. 이태리는 좀 특이한데 겉에서 보기에는 빠른 템포인데 들어가 보면 엄청 느린 반전 템포이다.
내가 느끼는 서울의 템포는 매우 빠름이다. 음악 용어로 하면 presto는 너무 가볍고 presto appassionato 쯤? 빠르고 열정적이라는 이태리어로 내가 느끼는 서울의 템포이다. 사람과 차의 움직임, 유행이 번지는 속도, 대화 주제의 변화무쌍함.. 이 시골 아주미 따라가기 숨차다!
지하철을 타고 내리는 사람들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잘 짜인 군무처럼 빠른 속도로 내리는 이들과 그와 동시에 타는 이들이 뒤섞이는 카오스 속의 질서가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가쁘게 한다.
예전에는 한국의 이 템포가 오랜 유럽 생활을 한 나에게는 버거워 한국에 가면 스트레스를 받기도 했었는데 이제는 나도 안다. 그 템포가 오늘날의 한국을 만들었다는 것을. 그렇게 빠른 템포로 사느라 다들 수고가 많다. 진심이다.
내 친구 진박사와 나는 정말 다르다. 진박사는 친구도 많고 막시멀리스트로 하고 싶은 것도, 가고 싶은 곳도, 사고 싶은 것도 내가 아는 사람 중에는 최대인 사람이고, 나는 그의 정반대 미니멀리스트, 친구도 한정적, 정말 하고 싶은 일만 골라하는, 진박사가 20년째 옆에서 뽐뿌질을 해대도 내가 사고 싶지 않은 물건이면 절대로 지갑을 열지 않는 사람이다.
친구와 함께 간 백화점에서 맘에 드는 물병을 발견, 한 3개 사서 스위스 돌아가서 친구 몇 명 줘야겠다 하면, 진박사는 옆에서 당장 "좀 더 사가서 나눠줘" 나보다 더 아쉬워한다.
친정집에 커피콩이 떨어져 마침 바로 옆 식품코너에서 커피콩을 사려 하자 "여기 말고 나가서 더 맛있는데서 사."라며 아쉬워한다.
지나가다 옛날부터 멋있다고 생각한 그림을 판화로 팔고 있기에, 어, 저거 맘에 든다! 하고 둘러보고는 떠나려는데, "안 살 거야?"라며 아쉬워한다.
이렇게 이 친구는 내가 좋은 걸 하길 바라는 마음이 넘쳐 이것도 권하고 저것도 권하고 이렇게 하고 저렇게 해. 저렇게 하지 말고 이렇게 해. 오른손 들고 왼손 들지 마. 왼발 올리고 왼손 들고 오른손 들지 마. 나에게 많은 추천과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다들 눈치챘는가? 그녀의 템포는 나에게는 너무 빨랐다. 나보다 빠른 템포로 따라가는 것도 버거운데 그 빠른 템포로 내가 하고 싶지 않은 이유, 사고 싶지 않은 이유를 설명하려니 숨이 가쁘고 방어적이 되었다. 조금의 반항심이 생겨서 오기로 더 안 한 것도 있다 (미안하다 친구야).
셋째 날에 쌓아왔던 게 튀어나왔다.
경복궁 모양의 팥빵을 먹으려 앉아있는데 나에게 핸드백을 메고 있는 게 불편해 보인다며 친구가 "가방 내려놔" 하는데 날 생각해서 한 말인 줄 알면서, "아냐, 괜찮아." 하다가 잠시 후에 튀어나온 말.
"야, 근데 너 좀 심해. 너무 행동 하나하나 이렇게 해, 저렇게 해. 내가 하고 싶으면 할 테니 그만 좀 얘기해. "
"응...? 아니, 난 너 편하게 있으라고 그런 거지."
"Nein heisst nein이라는 말이 독일어에 있어. No means no라고 자꾸 또 얘기하고 또 얘기하지 말라고!!"
뭐가 문제였을까? 친구는 나 좋은 거 하라는, 편한 거 하라는 좋은 의미였을 텐데 내가 또 예민하게 반응한 건가? 아니다. 누구 하나 잘못한 사람이 없어도 서로의 템포가 안 맞으면 이럴 수 있지. 같은 실내악곡을 연주하면서 서로 다른 템포로 연주하면 불협화음이 나듯이 말이다.
다행인 건 이 템포라는 게 조절이 가능해서 서로 조금만 조절하면 맞춰질 수 있다는 거다. 나의 곁에 두고 싶은 이를 위해서라면 나의 템포를 기꺼이 조절하리라! 잘 늙기 위한 나의 프로젝트 중 요즘 나의 최대의 과제인 어떻게 하면 상대방과 반대되는 나의 의견을 목소리 높이지 않고, 얼굴 붉히지 않고, 서로 기분 나쁘지 않게 전달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있는데 아직 좀 더 연구하고 연습해야겠다. 아직 멀었다!
지금 나는 스위스에 돌아왔다. 와서 하루가 지나니 벌써부터 서울의 그 빠른 템포가 그립다. 그리우면서도 이곳에서의 창밖의 소들이 풀 뜯어먹는 템포가 좋기도 하다. 내가 사랑하는 서울! 더 멋져져라. 나도 더 멋져져서 우리 그 중간 템포 어디선가 만나자! 곧 또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