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에 한참을 멍하니 있다가 얼른 집 정리를 끝내고 빵을 사러 나간다. 에어컨 아래 있다가 거리로 나가야 비로소 느낀다. 아, 여름이다. 말레이시아다.
아이들과 점심을 먹고 아이들은 어학원으로, 나는 말레이시아 관광센터로 간다. 화요일과 수요일에 무료 공연이 있는데, 마침 집 근처라 덥지만 천천히 걸어간다.
공연장은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꽉 찼고, 공연은 한 시간 정도 진행되었다. 말레이시아를 구성하고 있는 말레이, 인도, 중국, 사라왁과 사바주의 토착문화와 관련된 춤이었다. 한 시간 내내 경쾌하고 즐거운 시간이었다. 참으로 신기한 나라다. 이토록 다양한 문화가 어울려 한 나라가 된다는 게 단일민족을 자부심으로 배운 내 머리로는 잘 이해할 수 없었지만, 내 이해가 대수랴, 이렇게 엄연히 존재하거늘! 한 시간의 춤으로 여러 가지를 배운다.
집으로 돌아와 영어 스트레스를 풀어야 한다는 둘째의 말에 포켓몬가오레를 하러 간다. 내가 이곳에서 세 번 포켓몬 가오레를 하러 가면서 느낀 건 여기도 고인 물이 있다는 거다. 어린이뿐 아니라 어른들도, 투명박스에 칩을 넣어와서 진지하게 오랫동안 게임을 한다. 그리고 옆 사람을 봐 가며 칩을 빌려주거나, 그냥 주기도 하고 서로 도와준다. 진귀한 풍경이다. 이런 세상이라니! 아들의 게임을 존중하리라 마음먹는다.
돌아오는 길에, 더 늦기 전에 트윈타워 야경을 찍는다. 타워의 높이가 바벨탑이라, 담기가 어렵다. 가까이 갈수록 더 담기가 어렵다. 반짝반짝 빛나는 트윈타워를 가까이에서 온전하게 담고 싶은데, 크고 반짝이는 건 거리를 두어야 더 아름다운 것 같다. 선을 지키지 않으면 왜곡된다.
저녁을 먹으며 우리는 두런두런 이야기를 했다. 첫째는 여기 와서 외국인 친구들을 만난 게 참 좋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의 편견도 들여다보았다고 한다. 머릿속에 있던 동남아는 시골이었는데, 와 보니 이렇게 큰 도시여서 놀랐다고 한다. 그리고 여기서 만난 아시아와 아프리카 친구들이 정말 친절하고 낯가림이 없어서 막연히 가지고 있던 벽이 무너진 느낌이라고 한다. 둘째는 요즘 영어가 낯설지만, 재미를 붙여가고 있다고 한다. 영어가 안 들려서 스트레스를 받고 있지만, 그래서 더 열심히 해야 한다는 생각도 든다고 한다. 둘째는 여기 와서 영어를 접했다는 게 중요한 것 같다. 게다가 실은 먹고 싶은 음식 실컷 먹고, 하고 싶은 체험도 실컷 했다. 그리고 물건 금액을 보면 바로 환율계산을 해버리는 대단한 재주가 있다는 걸 이번에 알게 되었다. 후후.
우리 집으로 돌아갈 날이 점점 다가올수록 이상한 감정이 든다. 뭐랄까 집으로 가게 되어 좋기도 하고, 좋지만 아쉽기도 하고, 또 삶에 부대끼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 조금은 부담스럽기도 하다.
사실 여기 와서 제일 좋았던 건
나와 내 아들들에게 집중할 수 있었던 시간이다.
그 누구도 우리에게 뭐라 말하지 않으니, 우리에게 더 집중할 수 있었다. 길을 가면서 사춘기 아들 손을 꼭 잡고 걷고, 그 어느 때보다도 포옹을 많이 했으며, 속 이야기도 자주 했다. 서로의 마음을 헤아리고 그것을 표현하는 데 결코 인색함 없이 우리는 넉넉했다.
그 누구와도 부대끼지 않을 때 오는 평안을 나는 충분히 누리고 있다. 그 맛을 알아버려서 다시 웃고 인사를 하고 질문에 대답을 하고, 적절한 질문을 해야 하는 그 평범한 삶이 조금은 버겁게 느껴진다.
그래도 나는 이곳에서 나를 조금 더 알게 되고 있으니, 타인을 배려하듯 나를 배려하면서 살 작정이다. 조금 더 느슨하게, 조금 더 긴 호흡으로 그렇게 해볼 생각이다.
나에게도 아들에게도 그 누구에게도 다그치지 않는 삶.
남은 일주일, 애정 어린 눈으로 들여다보아야겠다.
영희가 사는 삶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