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 좀 절약하고 씨앗 좀 심을까?
행복 적금을 타는 방법
고등학교 남학생들의 에너지는 달궈진 양은냄비에서 자글자글 끓고 있는 돼지짜글이와도 같다. 한 번 운동을 시작하면 이마에 땀방울은 기본 사양이고 땀으로 온몸이 흠뻑 젖을 때까지 그들의 에너지는 꺼질 줄을 모른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학생들은 감옥 같은 교실에 갇혀 무미건조한 수업을 듣는 것보다 본인들의 에너지를 뜨겁게 데울 수 있는 체육 수업을 가장 기대하고 선호한다. 그들이 이토록 농구와 축구에 진심인데 우리나라 국제대회 성적은 왜 잘 나오지 않는 걸까? 잡음이 끊이지 않는 엘리트 체육 시스템이 문제 일려나. 잠시 이야기가 샛길로 샜지만 다시 학교 이야기로 돌아와, 피치 못할 사정으로 수업 결손이 생겨 학생들에게 체육 시간을 이용해 보강을 하겠다고 공지하는 날엔 학생 봉기나 쿠데타쯤은 각오할 용기가 필요했다.
"얘들아, 연휴 때문에 국어 수업 한 시간 빠졌으니 체육 시간에 보강해도 되겠니?"
"War!!!!!!!!!!!! 선생님, 지금 저희들하고 전쟁하시자는 거죠?"
"샘이 경솔했다. 다른 시간 알아볼게..."
총기 소지가 안 되는 우리나라 대한민국은 참말로 안전한 곳임을 다시 한번 실감한다. 내 학창 시절을 되돌아보면 아이들이 이토록 체육에 매달리는 이유가 일절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었다. 차츰 나이를 먹다 보니 까마득히 잊고 있었을 뿐 나 역시 둥근 공 하나만 있으면 주인이 던진 원반을 쫓는 개처럼 혓바닥을 할딱거리며 운동장 곳곳을 누비고 다녔다. 점심시간에는 축구 골대가 두 개뿐인 좁은 운동장에 백여 명의 학생들과 섞여 이리 치이고 저리 차이며 더운 땀방울을 운동장 곳곳에 흩뿌리기도 했다. 선생님도 니들 나이 때엔 체육에 진심이었단다.
이처럼 운동 시간은 행복의 온도가 들끓었지만 가끔 사고가 난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사고라는 것이 언제 어디서든 돌발적으로 일어날 수 있기에 평소 선생님들이 시어머니의 귀 아픈 잔소리처럼 안전 교육을 철저히 시켰음에도 불구하고 사고는 늘 예기치 않게 일어났다. 하루는 골반 쪽에 충격을 입은 학생이 체육관 바닥에서 쓰러져 있길래 119 구급차를 한 번 불렀고, 며칠 뒤 또 다른 아이는 쇄골 쪽을 다쳐서 못 일어나고 있길래 두 번째 119 구급차를 불렀다. 다친 아이와 함께 구급차를 타고 가면서 학부모님께 아이가 어떻게 해서 다쳤고 어느 병원 응급실로 가고 있으니 와보셔야 할 것 같다는 연락을 드리면 괜스레 내 잘못이 아님에도 죄송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사고에 개입이 되었건 아니건 간에 학교에선 내가 아이들의 보호자였기 때문에 학생이 다치면 INFJ 교사 특유의 숙명적인 자책감이 찾아와 명절날 전 뒤집듯 내 마음을 뒤흔들어 놓았다.
응급실에 누워 있다가 엑스레이나 MRI를 찍으러 갈 때마다 내는 아이의 고통 섞인 신음 소리는 날이 바짝 선 사금파리가 되어 내 폐부를 날카롭게 찔러 댔다. 아들이 다쳤다는 소식을 듣고 급하게 뛰어오신 부모님을 뵐 때면 내 자녀가 다친 것마냥 최대한 걱정스러운 얼굴로 아들의 다친 경위에 대해 브리핑하듯 설명해 드렸다. 부모님들께선 아이들이 운동하다가 그럴 수도 있다며, 괜히 선생님께 폐를 끼쳐드린 것 같다며 대체로 호의적인 반응을 해주셨다. 만약에 부모님을 뵙자마자 사무적인 톤으로 색조화장을 한 후 학교안전공제회에 사건 접수했으니 치료비에 대해서는 보상받을 수 있을 거라며 고객센터 자동응답기처럼 응대했더라면 난 교사라기보다 고객센터 직원에 가까웠을 것이다.
부모님들이 나를 원망하시지는 않아 몇 스푼의 죄책감은 덜어졌지만 여전히 마음의 가장 밑바닥에 침전물처럼 깔려 있는 자책감 알갱이들은 나를 어지럽게 흔들어 대며 마음의 농도를 탁하게 만들었다. 사고 예방 교육을 아이들 귀에 딱지가 생길 정도로 했음에도 늘 사고는 피할 수 없었다. 사고를 막을 수 없다면 사고(事故)를 통해 사고(思考)를 전환하는 게 필요할지 모른다.
얘들아! 이미 다쳐 버린 건 어쩔 수 없지만 기억하기 싫을지라도 너희들이 다쳤던 순간을 꼭 마음속에 새겼으면 좋겠어. 다침을 통해서 오히려 더 크게 안 다쳤음에 감사하는 마음을 상처에 심었으면 좋겠어. 쾌의 감정이 찾아오든 불쾌의 감정이 찾아오든 우린 모든 것에 감사하는 습관을 들여야 해. 사소한 감사가 모이고 모이다 보면 원금 보장은 물론 복리 이자가 꽤 붙을, 행복이란 이름의 적금을 탈 수 있기 때문이지. 너희들의 환부에 감사의 마음을 심는다면 앞으로의 인생 경작에서 꽤 무겁고 너른 행복의 줄기를 뻗쳐 달콤한 행복 열매를 풍성하게 수확할 수 있을 거야.
감사가 행복을 낳는단다. 그리고 선생님은 너희들을 만났다는 게 너무 감사하단다. 너희들은 어떻니? 설마 선생님이 간식 사줄 때만 감사한 건 아니지? 너희들이 사고를 치든 사고를 당하든 선생님은 마음밭에 감사의 씨앗을 심기로 했어. 올해 우리가 만난 건 분명 우리가 모르는 신의 그럴싸한 계획이 있을 것이라고 믿어. 우린 함께 성장해 나가는 거야. 팔다리 멀쩡하고 숨을 들이쉴 수 있는 건강 주심에 감사하자. 우리를 둘러싼 모든 상황에 감사하자.
우리 반에 감사의 온도가 뜨겁게 달아올라 행복의 혁명이 일어나는 건 선생님이 얼마든지 감당할게. 대신 운동 에너지는 조금만 줄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