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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현기 Oct 04. 2024

전자기기 좀 제출해라, 이 녀석들아.

미움의 씨앗은 심지 않겠다.

 학교 방침이자 학년 협의를 거쳐 학급 규칙으로 자리 잡은 '등교 후 전자기기 수거하기'. 아이들은 아침에 등교하자마자 스마트폰 및 태블릿 pc를 전자기기 수거함에 자발적으로 제출한다. 전자기기를 수거하는 이유는 간단명료하다. 쓸데없는 게임이나 SNS질을 하면 학업에 방해되기 때문이다.  '등교 후 전자기기 수거하기'는 아이들 역시 모두 동의한 일종의 상호 간의 맹약이었다.


 스마트폰은 비교적 수거율이 좋았으나 태블릿 pc는 수거율이 썩 좋지 않았다. 학생들은 교과 과제 활동이나 인터넷 강의 시청 등 교육용 목적으로 건전하게 사용하겠다는 명분을 앞세워 자체적으로 내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자기 공부를 충실히 하겠다는 우격다짐을 강제할 순 없었지만, 문제는 그들이 제출하지 않은 태블릿 pc를 비교육적, 오락적으로 몰래 사용하는 데에 있었다.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 짬을 이용해서 sns를 한다거나 게임을 하다가 적발된 사례가 적지 않았다. 남학생들은 여학생들보다 철이 늦게 든다던데 고등학교 1학년 남자아이들은 궤도이탈적 성향이 어느 정도 존재하는 듯하다. 뭐, 나도 이 나이땐 그랬지만. 어머니, 저 기르시느라 고생하셨어요.


 아이들의 전자기기 불법 사용을 적발할 때마다 처음엔 조곤조곤 봄날의 햇살처럼 타일렀다.


"여러분들에겐 말귀를 알아들을 수 있는 이성이 있습니다. 두 유 노우 칸트?"

"여러분들은 동남아시아 동물원에서 매를 맞으며 조련되는 코끼리가 아닙니다."

"강압하고 폭압 하는 건 일제 강점기의 썩어 빠진 교육적 잔재입니다."


 좋게 말할 때 들으라는 말을 허울 좋고 세련된 척 꾸민 것이지만 별 효과는 없었다. 아이들은 스스로 이성을 포기하고 일제강점기에 살고 있는 동남아시아 동물원 코끼리임을 자처했다. 이후 방법을 조금 바꿔보았다. 남학생들은 몸의 대화가 통할까라는 생각에 전자기기 불법 사용이 적발될 때마다 몸에 무리가 안 가는 선에서  푸시업 및 스쿼트를 적당히 시켰다. 체력 단련을 하는 아이들은 죽을 맛이지만 지켜보는 아이들은 키득 키득대며 친구의 고통에서 일상의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느끼고 있었다. 체력 단련을 한 아이들은 잔머리 근육까지 단련되었는지 하다 못해 눈속임으로 스마트폰 공기계를 제출하고 현재 사용하고 있는 최신 스마트폰으로 점심시간에 게임을 하다가 적발된 녀석도 있었다. 상황은 개선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도무지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하다 못해 하루는 조회 시간에 아이들을 앉혀 놓고 자학적인 공개 사과까지 했다.


"애초에 너희들을 망가뜨린 건 선생님이다. 분명 너희들은 선하고 바른 녀석들인데 선생님의 교육 방식에 뭔가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너희들이 이렇게 규칙과 규율을 가벼이 여기는 것 같다. 난 너희들이 자발적으로 자신의 삶을 통제하고 책임 의식 강한 사람으로 커나가길 바랐다. 선생님의 교육 철학이 옳다는 걸 증명해 주는 것은 결국 너희들이다. 선생님이 틀리지 않았음을 보여 주길 바란다."


 씨알이 먹혔을까. 큰 기대를 한 것은 아니었지만 전혀 먹히지 않았다. 고발정신만은 투철했던 아이들은 친구가 불법적으로 전자기기를 사용할 때마다 담임에게 착실히 일러바쳤다. 결국 뭔가 크게 한 번 학급을 뒤엎어야 아이들이 정신을 차릴까? 하지만 그건 공포 정치일 뿐인데... 단기적으로 효과야 있겠지만 결국 미봉책에 불과할 것이다. 내가 바라는 건 아이들이 규칙을 준수하는 태도를 스스로 내면화하는 것이었다. 벌써부터 아이들의 군대 생활과 직장 생활이 걱정된다. 군대 선임과 직장 상사는 나하고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엄할 텐데. 뭐, 쓸데없는 오지랖일 수 있겠지만.


 이제 아이들과 헤어질 시간도 3개월가량밖에 남지 않았다. 올해 아이들을 소재로 열 편 정도의 글을 써서 학급 문고집을 만들 계획을 학기 초부터 세워놓은 상태다. 나쁜 기억이든 좋은 추억이든 다양한 이야기들이 학급 문고의 페이지를 다채롭게 장식하겠지만 내 교육적 철학만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을 생각이다. 아이들은 내년에 훨씬 더 훌륭한 담임선생님들을 만나서 대견하게 성장할 것이다. 하지만 나처럼 인본주의적 카리스마를 끝까지 발휘한 선생님도 있었다는 사실을 언젠가는 알아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들이 아무리 날 속여도, 날 실망시킬지라도, 난 아이들을 절대 미워하거나 원망하지 않을 것이다. 미움의 씨앗은 번식력과 생존력이 워낙 강해서 그 씨앗을 마음밭에 뿌리는 순간 흙 속 깊숙이 수상돌기 같은 뿌리를 내리고 튼튼하고 굵직한 줄기를 금방 뻗어 내어 지독한 악취가 물씬 풍기는 꽃을 피워낼 것이기 때문이다. 흠 없이 깨끗한 쟁기를 부여잡고 내 마음밭의 굴곡진 이랑들에 김을 매면서 그들을 믿어 줄 것이고 지지해 줄 것이다. 아이들이 엇나갈 때마다 속은 문드러질지라도 한편으론 내가 연단되어 감도 느낀다. 올해의 경험들이 내년의 학급 운영을 위한 또 하나의 소중한 밑거름이 될 것임을 확신한다. 내가 혹여라도 매너리즘에 빠질까 봐 신은 지금의 아이들을 선물로 보내신 것이다.


 나쁜 것만 보려 하면 작은 결점도 큰 허물처럼 보인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얘들아. 전자기기 좀 내면 안 되겠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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