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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현기 Oct 15. 2024

우리 꿈에게는 부정행위하지 말자.

시험은 늘 어려워.

 2학기 시험 기간이 한창이다. 시험 때만 되면 혹여나 부정행위가 발생할까 봐 노심초사로 꼰 새끼줄을 위태롭게 타야 하지만, 우리 반 아이들은 부정행위와는 거리가 먼 정당행위적 학습 공동체였다. 다만 성적이 안 좋을 뿐... 1학기 내신 성적에 적잖이 실망한 아이들은 이전 학기의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조금은 진지해진 눈빛을 열정의 볼록렌즈 가득 모아 뜨겁게 책을 태우는 중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저 브롤스타즈나 할 줄 아는 천진난만중학교 4학년 짜리 브롤러들로 보였었는데 점차 고등학교 규율을 내면화하고 잠잠하게 자기 주도적으로 공부해 나가는 모습들을 보니 아기가 첫 이족 보행을 하는 순간을 대면한 것 같은 대견함이 밀려온다. 겨울에 쌓였던 눈들이 봄의 개울로 녹아내리듯 고1 아이들 역시 고등학교 생활 조금씩 따스하게 스며들고 있었다.


 상대 평가는 공정이라는 그럴싸한 껍데기 속에 쓰디쓴 알맹이가 들어있는 제도이다. 마치 한우 등급을 매기듯 성적 상위 4%에겐 1등급을, 4~11%에겐 2등급을, 11~23%에겐 3등급 등 도달점과 관계없이 오로지 상대적 등위에 근거하여 아이들의 생활기록부에 등급 도장을 찍어버리기 때문에 자칫 소수점이나 1점 차이로 인해 상위 등급에서 미끄러지는 일도 가끔 있었다. 아직 마음 다스림이 서툰 아이들이다 보니 겨우 깻잎 한 장 정도 차이로 상위 등급에서 밀려나면 그 절망감은 무거운 쇳덩이로 변해  얼마나 고통스럽게 그들의 폐부를 짓이겨 놓을. 치열한 입시 전쟁 속, 등급 따기 고지전에 휘말린 우리 아이들이 입어야 하는 상흔은 누가 치료해 줄까.


 학급의 대다수 아이들이 아직까지 진로를 명확하게 정하지 못한 상태이다. 그저 내신 등급을 잘 따놔야 나중에 고를 수 있는 대학 선택지가 많아진다는 모호한 동기 의식만 간신히 부여잡은 채 정처 없이 공부만 하고 있다. 입시 기차라는 걸 타긴 탔지만 어느 역에서 내려야 할지 모르는 것이다. 세상에는 수많은 진로가 있고, 자신은 어느 분야에 적성이 있는지 탐색해 보는 것조차 시간 낭비라고 여겨질 만큼 아이들은 세상빛을 쬐지도 못한 채 입시라는 어두운 우물갇힌 채 인공지능처럼 문제집만 풀어대면서 침잠하고 있는 건 아닌지 우려스럽다. 아이들의 마중물이 되어야 할 대한민국 고등학교는 빛이 잘 안 들어오는 음침한 우물일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모든 학생이 죽기 살기로 공부에만 매달리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입시 우물 밖으로 뛰쳐나오려고 폴짝거리는 개구리들도 분명 있었다. 언제 끊어질지도 모를 공부의 위태로운 가닥을 붙잡는 대신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일찍 찾아서 거기에 몰두하고 있는 아이들인 것이다. 한 아이는 연기를, 한 아이는 요리를, 한 아이는 유도를, 한 아이는 프로그래밍을 나름 충실하게 준비하며 자신의 청사진인화해 나가고 있었. 상담을 해보니 자신이 꼭 하고 싶은 쟁취하고 싶은, 성숙한 열의가 느껴졌다. 닿으면 데일 것 같은 그들의 뜨거운 열망은 내게도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고1 시절의 생활을 돌아보니 나 역시 작가나 선생님이 되고 싶다는 꿈이 있었다. 하지만 독서와 작문을 틈틈이 취미생활처럼 했을 뿐이지, 작가나 선생님이 되기 위해선 그래도 이왕 좋은 대학에 가야 한다는,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대학 서열화 논리에 설득 당해 꿈 찾기보다는 문제지의 정답 찾기에 더 골몰했었다. 이른 나이에 자신의 꿈을 확정해 거기에  몰두하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은 현재의 내 모습을 자성케 한다.


'난 과연 지금의 내 삶에 몰입하고 있을까?'

'난 지금 시간만 흘려보내는 월급쟁이는 아닐까?. 

'난 교사로서 사명감과 책임감을 갖추고 아이들을 마주하고 있나?'

'난 꿈을 이고 꿈길을 걸어가는 꿈지기일까? 단순히 인생의 무거운 짐만 떠안고 있는 짐꾼에 불과할까?'

'난 아이들이 제각기 터뜨릴 미래의 꿈망울을 위해 그들의 꿈밭에 꿈의 씨앗을 제대로 뿌리고는 있을까? '


 평소 수업 시간 속 아이들의 집중력이 흐트러질 때쯤 우리 반 아이들을 비롯하여 다른 반 아이들한테도 가끔씩 훈계조로 던지는 단골 멘트가 있다.


"선생님은 너희 나이 때 작가가 되고 싶어서 책도 많이 읽고 글을 써오며 꿈에게 가까이 다가서려 했었지만 20살이 되자마자 현실의 향락에 취해 가슴속에서 언제나 꿈틀거리고 있던 꿈에게 사기를 쳐왔었다. 그렇게 꿈을 외면하고 현실과 야합하며 나만의 색깔을 잃은 채 살아왔다. 그렇게 현실의 쾌락에 중독되었던 내 삶은 운명이 쳐놓은 날카로운 덫에 의해 결국 파괴되었고, 45살이 되어서야 정신을 차려 꿈에게 무릎을 꿇고 용서를 해 달라며 싹싹 빌었다. 그리고 다시 꿈을 대면했다. 선생님은 한 주에 책 한 권씩, 일 년에 50권의 책을 읽고 있다. 아마 선생님이 20살 때부터 일 년에 책을 50권씩 읽어 왔다면 선생님은 벌써 천 권이 넘는 책을 읽었을 테고 그 책이 가져다준 소양과 지식과 지혜는, 또 거기에서 비롯되는 글들은 얼마나 아름다웠을까, 하는 안타까움이 꺼져버린 재처럼 마음속에서 흩날리고 있다. 그래서 너희들한테 부탁한다. 부디 지금부터 너희들의 전문성을 길러나가기 바란다. 수습공이 장제가 되고, 장제가 장인이 되듯 차근차근 스텝을 밟아나가길 바란다. 뭘 해야 할지 아직 잘 모르겠다면 우선 책을 읽으라고 권유하고 싶다. 책 속에서 삶의 활로와 실마리를 발견하고 책을 통해 너희들만의 독자적인 깊이를 만들어가길 바란다."


 앞으로 아이들이 인생에서 치러야 되는 시험은 비단 학교 시험뿐만이 아닐 것이다. 입사 시험이나 자격시험이 매정하게 삶의 성패를 가를 것이고 시험과 성격이 유사한 수많은 난관과 도전이 그들 앞에 숙명처럼 놓여 있을 것이니 말이다. 물론 인생 시험을 풀어나가면서 때론 마킹 실수를 하거나 점수가 잘 안 나올 수도 있다. 난 아이들이 최종 승리를 위해 실수해 보는 것이라고, 실패해 보는 것이라고 마음을 다잡았으면 한다. 지금의 나도 수없는 실수와 실패로 깍여왔음을 잘 알기에.


 너희들의 인생을 응원한다. 단순히 숫자로 매겨진 등급으로 너희 삶의 옳고 그름을 가름할 순 없다. 너흰 항상 최선을 다하는 최고 등급의 아이들이다. 너희들이 하고자 하는 게 공부든, 운동이든, 또 다른 자기 전문성이든 하루도 허투루 지나치지 말고 최선을 다하길. 선생님도 너희들에게 공언했듯 최선을 다해 살아갈 예정이다. 꿈을 되찾기 위해, 그리고 이루어 내기 위해.


 우리 서로 약속하자꾸나. 꿈이란 시험 과목을 치를 때는 부정행위하지 말고 최선을 다해서 준비하기로. 그리고 몇 년 후에 각자의 소중한 꿈과 동행하여 멋지게 다시 만나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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