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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현기 Oct 21. 2024

조퇴 빌드업 대신 인생 빌드업

인생이란 치밀하게

"샘, 저 오늘 몸이 안 좋아서 수업 못 듣겠어요. 조퇴할게요."

"많이 안 좋냐? 그럼 어머니께 전화부터 드리자."

"엄마랑 아까 통화했어요. 조퇴하래요."

"뭔가 일의 순서가 뒤바뀐 것 같다?"

"네?"

"후우, 됐다. 내일 등교하면서 진료확인서나 가져와라."


 교사와 학생 사이의 위태로운 조퇴 줄다리기는 오늘도 팽팽하게 맞서고 있다. 1990년대의 학교 풍토 군대의 어긋난 상명하복체계처럼 부조리하고 폭력적인 잔재 투성이었다. 체벌과 순종이란 비민주적인 관습이 뿌리내렸고 119를 부를 만한 부상과 질병이 아니라면 미미하고 소소한 아픔 따위는 결단조퇴의 사유가  수 없었다. 선생님들께서는 늘상 '아픈 것도 죄'라는 형법에도 안 나오는 죄목을 만들어 학생들을 다스리고 세뇌시켰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조퇴 원천 불가의 시대'는 종말을 고하고 '언제든 조퇴 가능의 시대'가 막을 열었다.


 요즘 아이들은 조금만 아파도 참고 공부하는 대신 조퇴남발하려는 경향이 있다. 가벼운 증상에도 조퇴부터 생각하는 아이들을 볼 때면 더 아픈 인내를 요구하는 혹독한 사회에서 과연 생존할 수 있을까 염려스럽다. 물론 매일 건강할 수는 없다. 하지만 아픔에 너무 쉽게 굴종하는 모습은 보기 안쓰러울 정도다. 진짜로 아프다당연히 조퇴를 하고 병원 치료를 받아야 한다. 출결 규정에 명시된 질병 조퇴는 그러라고 만든 것이니까.


 그래도 조퇴를 할 땐 조금만 격식을 차렸으면 하는 바람이다. 남학생과 여학생이 조퇴할  엄연한 차이가 있는 걸 아시는지. 참고로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여학생은 다들 이런다, 남학생은 다들 런다와 같은 일반화의 오류나 확증 편향은 아님을 해해 주기 바란다. 신빙성 있는 통계자료는 아니지만 십수 년의 교직 경력으로 얻어진 나만의 귀납적 추론 결과이니 진지함은 잠시 빼놓 재미 삼아 읽어주기 바란다. 일단 여학생의 사례부터 살펴보자.


 배가 아픈 여학생은 교무실 밖에서부터 정중하게 노크를 한 후 선생님들께 들어가도 되는지 허락을 구하고 입장한다. 도둑놈처럼 들어와 어느새 내 등뒤에 귀신같이 서 있는 남학생들과 크게 대조되는 부분이다. 여학생은 담임 선생님을 찾아가 조퇴 동의를 정중하게 구하기 시작한다.


여학생 : (아픈 표정으로) 선생님, 바쁘세요? 잠시 시간 좀 내어주실 수 있을까요?

선생님 : 응, 무슨 일로 찾아왔니?

여학생 : (배를 부여잡으며) 다름 아니라 제가 어젯밤에 집에서 가족들과 치킨을 시켜 먹었는데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배가 아파서 계속 화장실을 들락날락거렸어요. 등교 시간이 다 되어 일단 집에 있는 배탈약 한 알 먹고 학교에 나오긴 했는데 증세가 호전될 기미가 안 보여. 오전에 화장실을 두 번 갔다 오고 보건실에도 방문하여 보건 선생님이 처방해 준 약도 먹어봤는데, 전혀 나아지지가 않아요. 상비약만으로는 해결 안 될 것 같아서 선생님께서 허락해 주신다면 오늘은 조퇴를 하고 병원에 들러서 진료 좀 받아봐도 될까요?  

선생님 : 당연하지, 어머니께 연락드리고 얼른 가봐. 내일 건강한 모습으로 만나자.


 이런 상황에서 조퇴를 안 시켜주는 선생님은 공감 능력이 없는 반사회적 인격장애가 틀림없을 것이다. 논증의 오류가 보이지 않고, 예절의식을 충분히 묻힌 진정성 있는 말로써 설득이 되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이제 남학생의 경우를 살펴보자. 아까도 말했지만 남학생들은 전부 다 이렇다는 게 아니라 일반적으로, 높은 확률로 그렇다는 것이다. 일단 남학생은 교무실 노크도 건너뛰고 쥐 죽은 듯이 담임 선생님 뒤에 멀뚱멀뚱 서서 담임 선생님께 말할 타이밍을 찾는 중이다. 일을 하던 중 등골이 싸해진 담임 선생님이 뒤를 돌아보니 언제부터 와있었는지 남학생 한 명이 매장 앞 홍보 풍선처럼 푸슉거리며 서 있다.


선생님 : 아, 깜짝이야! 언제 왔어?

남학생 : 아까요.

선생님 : 무슨 일이야?

남학생 : 아파서요.

선생님 : 어디가?

남학생 : 배요.

선생님 : 어떻게?

남학생 : 계속 설사가 나와요.

선생님 : 언제부터?

남학생 : 오늘 아침부터요.

선생님 : 어쩌다가?

남학생 : 치킨 먹어서요.

선생님 : 약은 먹었어?

남학생 : 아니요.

선생님 : 왜?

남학생 : 그냥요.

선생님 :.... 그래서 어쩌자고?

남학생 : 조퇴할게요.

선생님 : 지금 나한테 통보하냐?

남학생 : ???

선생님 : 동의를 구하는 게 아니라 통보하는 거냐고?

남학생 : 엄마한테 전화드릴까요?


 너무 극단적인 비교 같지만 남학생과 여학생의 차이는 엄연히 존재한다. 여학생은 아픈 경위와 몸을 정상화시키려는 노력, 어쩔 수 없이 조퇴를 해야겠다는 절박함이 하나의 발화 안에 다 담겨 있지만, 남학생은 형사가 용의자를 취조하는 것처럼 꼬박꼬박 캐물어야 간신히 답변을 해준다. 진짜 이럴 때면 울화통이 터질 것 같지만 언어적 감각에서 남성보다 우위에 서 있는 여성 특유의 생물학적 특징을 고려하면 수긍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남학생은 가르쳐야 할 게 너무 많다. 나중에 좋아하는 여자에게도 저런 식으로 고백할까 봐 무섭다. 사랑 고백이라는 주제 의식을 도출하기까지는 과연 몇 마디의 주고받음이 필요할까...


 아까 언급한 남학생은 언어 전달이 다소 서툴렀을 뿐이지 진짜 아픈 상황이었다. 과정이야 미숙했지만 조퇴 사유는 정당한 것이다. 간혹 진료확인서에도 안 나오는 꾀병이라는 핑계로 대범하게 조퇴를 시도하는 학생들에 비하면 양반인 셈이다. 꾀병환자들은 거짓 질병을 철저히 위장해야 하기에 나름 치밀하게 조퇴 빌드업 과정을 거친다. 가히 감탄을 불러일으키는 경이로운 전략이다.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 감독감이다. 


 일단 그들은 아침 조회 시간부터 어두운 안색의 위장크림을 얼굴에 바른다. 기침을 하긴 하는데 왠지 부자연스럽고 인위적으로 느껴진다. 조급함은 찾아볼 수 없다. 착실히 빌드업을 해나가며 골만 넣으면 그만이다. 이렇게 일차적으로 담임선생님에게 본인이 아프다는 인식을 가볍게 심어 준 후 체육 시간에는 친구들이랑 신나게 농구를 하며 땀을 흘린다. 마이클 조던도 울고 갈 왕성한 활동량으로 자신의 몸을 불태운다. 대충 땀을 닦고 운동의 여파가 가시지 않은 상기된 얼굴로 담임을 찾아온다. 얼굴은 붉게 타오른 상태이다. 하지만 진짜 아파서라기보다 농구를 열심히 해서 피가 쏠렸을 뿐이다. 여기에 안 좋은 안색 빛을 더해주고 목소리의 힘을 환자톤으로 변환하면 조퇴 빌드업은 거즘 완성이 된다. 그리고 <유주얼 서스펙트>의 마지막 장면처럼 경쾌하고 정상적인 발걸음으로 교문을 유유히 빠져나간다. 병원이 아닌 pc방으로.


 아이들도 한낱 조퇴를 위해서 이리 세밀하게 빌드업을 하는데 나는 정작 인생 빌드업을 제대로 하고 있는 건지 되돌아봤다. 난 지금 막연함과 치밀함 사이의 어느 경계에 서 있는 것 같다. 생각 없이 살고 있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구체적인 비전을 짜 놓은 상태도 아니다. 2022 카타르월드컵에선 파울루 벤투 감독이 빌드업 축구라는 DNA를 축구대표팀에 끊임없이 이식하여 세계 강호들과 당당히 겨뤄 16강에 오르는 쾌거를 이루었다. 벤투 감독이 부임해서 몇 경기를 치렀을 당시 국민들은 너무 지나치게 편향적인 선수 기용에 대해 불만을 토로했었지만, 벤투 감독은 자신의 빌드업 축구를 잘 구사할 수 있는 최종 11인을 우직하게 선발해 나갔고 결국은 일을 낸 것이다.


 조퇴 빌드업과 달리 인생 빌드업은 하루아침에 완성되지 않는다. 위 사례의 벤투 감독처럼 장기적인 플랜을 가지고 꾸준하게 전략을 짜야한다. 난 빌드업에서 가장 중요한 기초적인 목표 설정부터 도외시했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냥 글로써 성공해야지,라는 불확실성 속에 막연하게 책을 읽고 막막하게 글을 써 왔다. 이젠 구체적인 빌드업 전략을 짜야겠다고 결단한다. 난 도대체 글을 왜 쓰는 것일까, 혹은 어떤 글을 쓰고자 하는가,라는 물음에서 시작하면 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새벽안개가 걷혀 청명한 아침 하늘이 드러나듯 물음에 대한 답이 하나씩 보이기 시작했다. 결국 내가 쓰고 싶은 글은 이런 것이었다.


'상대방의 지친 영혼을 보듬어 줄 수 있는 글.'

'우리의 인생은 차가움보다 따뜻함이 더 많음을 알려주는 글.'

'글로써 상대방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글.'


 글이란 무릇 나만의 자기 만족도, 필력의 과시도 아니다. 글을 통해 누군가가 위로를 받고, 사소한 인생철학에 공감하며 응어리진 감정 덩어리가 조금이라도 풀렸으면 하는 바람이 내가 글을 쓰는 이유였다. 목표를 구체적으로 정했으니 이젠 차분히 빌드업을 할 때다.


 응? 나는 선생님이 됐으니까 빌드업이 끝난 거 아니냐고? 에헤이~~16강에서 만족하면 쓰나. 8강, 4강, 우승까지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많다고. 사실 선생님은 작가와 교사를 병행하는 작! 가! 선! 생! 님! 이 되고 싶거든. 학생을 넘어 세상 사람들과 교감하며 세상을 이롭게 하는 데 일조하는 작가선생님. 우리의 평범한 일상이 너무 소중한 것임을 알려주는 작가선생님. 너희의 꿈과 생각도 더 크게 활짝 열어젖히렴.


 조퇴 빌드업을 했던 너희 덕분에 선생님은 또 하나를 배웠다.

 그렇지만 얘들아. 이젠 조퇴 빌드업에 에너지를 낭비하지 말고, 각자의 인생 빌드업을 충실히 준비하자꾸나.

 자, 골(Goal) 넣을 준비 됐지?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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