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여자의 반려 남편으로 살아가는 법. 두 번째 이야기
전 아이돌 그룹 핑클의 노래 <Blue Rain>은 좋아하지만, 일종의 날씨로써 지면에 내려앉는 비는 정말 싫어합니다. (Blue Rain을 좋아했던 것도 따지고 보면 노래보단 핑클이란 그룹의 미모에 마음이 갔던 탓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루는 베란다 너머에서 기승을 부리는 빗줄기를 바라보며 저라는 인간은 도대체 언제부터 비를 미워했는지 가만히 추적해 본 적도 있었습니다. 은빛 동전으로 배를 불린 돼지저금통 속에서 십 원짜리 동전을 골라내듯 기억의 서랍을 열어 제 지난 연대기를 뒤적거렸습니다. 용의선상에 오를 만한 장면이 몇 군데 있더군요.
1. 초등학생 시절, 우산을 챙겨 오지 않아 비를 홀딱 맞으며 집까지 걸어갔던 일.
2. 중학생 시절, 폭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다가 지독한 몸살감기에 시달렸던 일.
3. 고등학생 시절, 천둥번개를 동반한 폭풍우가 몰아치던 야간 자율학습 시간, 학교가 정전되었음에도 조기 하교를 시켜주지 않아 절망했던 일.
4. 대학생 시절, 이성에게 고백했다가 깔끔히 차인 뒤 얄궂은 가랑비에 눈물을 훔치며 자취방으로 돌아갔던 일.
제 개인의 역사에서 썩 유쾌하지 않은 일이 일어날 때마다 비는 걸맞은 배경과 적절한 BGM이 되어 주었습니다. 이렇듯 제 삶에 우울한 습기를 더했던 비도 늘 불쾌한 감각만을 유발한 그것은 아닙니다. 메마른 제 인생에 단비처럼 쏟아진 날도 있었으니까요. 아내와 소중한 인연을 시작하는 자리엔 늘 비가 내렸습니다.
스물아홉까지 연애 한 번 못 해본 저는 비가 내리는 토요일 오전에 소개팅 자리에서 스물여섯의 아내를 처음 만났습니다. 날씨는 흐릿했지만, 아내와 저 사이에 놓인 원목 테이블의 표면은 화창한 조명빛과 설렘이 감돌았습니다. 제 앞에 마주 앉아 있는 아내는 독자적인 미모로써 스스로 찬연한 빛을 내는 오로라나 다름없었습니다. 수줍게 오가는 대화에서는 아내의 자애로운 인품마저 전해져 왔습니다. (아내가 이 글을 읽고 있다면 슬슬 이 남자가 용돈이 궁하나, 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남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제 눈망울에 인화된 아내의 얼굴은 마치 배우 한효주와 가수 태연을 섞어 놓은 듯 아름다웠습니다. 아내가 마음에 들었던 저는 소개팅을 마치고 아내의 자동차가 있는 데까지 따라나섰습니다. 각자의 우산 속에 담겨 아내의 자동차까지 걸어가던 길 한구석엔 그랜저 택시 한 대가 주차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장난기가 발동해 택시를 가리키며 즉흥적인 농담을 던졌습니다.
비를 싫어하는 남자 : 이야, 벌써 이렇게 근사한 차를 몰고 다니세요?
한효주와 태연을 닮은 여성 : 어머? 뭐래. 저건 택시 아니에요? 호호호호호호호호호.
웃음으로 마무리된 첫 만남은 마침내 웃음꽃이라는 부케를 피워냈습니다. 첫 만남 이후 5년이 흐르고 우린 나란히 버진로드를 거닐게 되었습니다. 물론 한집에 살게 되면서 화장품이란 문명이 벗겨진 아내의 민낯을 목격했을 때, 혹은 압축이 많이 들어간 안경 때문에 덩달아 압축되는 아내의 눈매를 마주했을 때는 차라리 꿈이었으면 좋겠다는 심정으로 눈을 비빈 적이 있기는 했어도 아내의 미모 값 수치는 빠지지 않았습니다.
결혼식 당일에도 우리를 축복해 준 건 우중충한 빗줄기였습니다. 비록 비가 오는 바람에 예식장 홀의 지붕을 열어 하늘로 풍선을 띄워 보내는 이벤트를 선보일 수는 없었지만, 제가 비밀스레 준비한 축가 이벤트에 아내는 소나기 같은 눈물을 떨구었습니다. 하객석에 잠복해 있던 대학교 남자 후배들이 한 명씩 걸어 나와 신부에게 장미꽃을 건넸고, 빔프로젝터 스크린엔 아내와 저의 연애 때 추억이 담긴 사진들이 적절한 자막과 함께 서서히 흘러갔습니다. 그사이 저는 아내만을 위한 세레나데를 열창했습니다. 조규만의 <다 줄 거야>. 그대 내게 다가오는 그 모습, 자꾸 다시 볼 수 없을 것만 같아서. 하객들은 신랑의 잠이 덜 땐 목소리와 호소력 있는 음 이탈에 넋을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비가 내리는 아침이면 아내는 늘 베란다에서 큰 우산을 챙겨 들고 나왔습니다. 제 백팩엔 휴대용 삼단 우산이 들어 있었지만, 아내는 혹여 뚜벅이 출근을 하는 182센티미터에 82킬로그램의 덩치 큰 남편이 작은 우산의 좁은 반경을 뚫고 들어오는 빗줄기에 양말이며 소매가 다 젖어버릴까 봐 장우산을 쥐여주고 싶은 마음이었겠죠. 무심한 남편은 장우산이나 짧은 우산이나 비에 젖는 건 매한가지라며 태연하게 집을 나서지만, 직장에 도착하고 양말까지 젖어버린 신발을 벗을 때마다 아내의 사려 깊은 마음을 되새기곤 했습니다. 누군가가 저를 이토록 아끼고 사랑해 준다는 사실은 가슴 벅차오르는 일입니다. 저라는 사람을 사랑해 주는 존재가 있다는 것, 그런 아내를 행복하게 해 주고야 말겠다는 저의 각오는 분명 삶에 축복과 감사를 더하는 삶의 본질 중 하나일 것입니다.
실로 오랜만에 찾아온 비가 세상을 아련함으로 뒤덮고 있습니다. 태양 빛이 꺼진 한낮을 자유낙하하는 빗방울은 아내를 처음 만났던 그 시간과 공간으로 저를 안내합니다. 서로에게 젖어가던, 서로의 마음에 스미던 그때의 순수를 생각하니 기분 좋은 닭살이 돋으면서도 용케 결혼까지 해서 함께 살고 있다는 사실이 꿈만 같습니다. 따지고 보면 제 인생에서 비는 불청객이 아니라 제 어둠을 걷어낸 햇살이 아니었나, 하고 생각해 봅니다. 가뭄 같던 제 삶에 찾아와 사랑을 싹트게 한 아내는 저를 밝히는 햇살이나 다름없습니다.
아내와 저를 맴도는 삶의 기류가 늘 화창할 순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언젠가 찾아올 비바람에 길은 질척일 것이고 우린 그 길을 걷다가 넘어질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그 비가 개고 나면 신선한 공기와 열기 머금은 태양이 길을 빳빳하게 말려줄 것입니다. 사계절 날씨는 변덕스럽고 그것이 곧 인생이니까요. 혹여 흠뻑 비에 젖게 되는 날이 올지라도, 우울에 젖어 있던 제 청춘의 단면을 아내가 말려주었듯이 이제는 제가 아내의 삶에 맺힌 빗방울을 정성스레 닦아주며 온기를 나눌 것입니다. 부디 우리 사이에 짓궂은 몸살감기가 찾아오지 않았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