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한 말 조각도 놓치지 않기.

한 여자의 반려 남편으로 살아가는 법. 다섯 번째 이야기

by 이현기

제 몸은 말하기보다 듣기에 최적화된 구조입니다. 썰면 두 접시는 거뜬할 법한, 두터운 입술은 되도록 말을 아끼라는, 미풍에도 팔랑거리는 얇은 귀는 남의 말을 많이 들어주라는 숙명일지 모릅니다. 입술 질량이 무겁다 보니 한 번 입을 열 때마다 입술이 얇은 사람보다는 에너지 소모가 심한 편입니다. '입술 무게와 말수와의 상관성'이라는 가설을 세워놓고 주변을 살피면 말수가 많은 사람들은 유독 입술 두께가 얇아 보입니다. 물론 제 입술이 두꺼워 그들의 입술이 상대적으로 얇아 보이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소리 흡수에 특화된 제 귀는 상대의 말에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소리에 예민하니 뭔가에 집중할 때 은근 방해를 받는다는 애로사항이 있지만(집중력이 떨어진다는 사실을 이렇게 정당화시키다니...), 대신 남이 남긴 말의 꼬리나 행간을 비교적 잘 잡아내는 편입니다. 그래서인지 저는 아내와 연애할 때부터 아내가 무심결에, 혹은 은연중에 뱉은 말의 토막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사소한 예를 들자면 이런 식입니다. 겨울의 초입, 아내와 저는 길거리 데이트를 하다가 붕어빵 점포를 지나칩니다. 아내는 노골적인 청자를 두지 않고 공기 중으로 속엣말을 흘려보냅니다.


“붕어빵 냄새 좋다.”


이때 제가 ‘요즘 붕어빵은 금붕어 빵이야. 불안정한 국제 정세로 원재료나 가스값이 많이 상승해서 가격이 많이 올랐어. 붕어빵이 서민 음식이라는 말도 옛말이야. 망할 고물가 시대.’라고 반응했다면 지금의 아내는 제 곁에 없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아내의 진짜 의도야 무엇이든 연인이 던진 말속에 숨겨진 함의를 파악하는 게 제가 생각하는 연애 및 사랑의 척도였습니다. 저는 붕어빵에 관심을 보인 아내를 위해 붕어빵 점포로 달려가 팥붕과 슈붕을 고르게 담아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기름종이 봉투를 아내에게 들이밉니다. 아내의 본의가 제 행동과 달랐을 수도 있겠지만, 아내에게 최선을 다했다는 의미는 남겠지요.


아내는 저의 과도한 친절에 당황했거나, 혹은 내심 기뻐하며 ‘이 남자 썩 괜찮은 걸? 플러스 1점.’이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제 관점에서는 무난한 가격으로 생색내는 데 성공했으니 다행인 일이었는데 말이죠. 다이아몬드 반지가 아니라 밀가루 붕어빵인 게 얼마나 가슴이 놓이는 일입니까. 그래서 아내와 거리를 거닐다가 귀금속 가게를 발견하면 가던 길의 방향을 틀거나, 불현듯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우와, 하늘 좀 봐. 노을빛이 내려앉았어.’라며 아내의 시선을 엉뚱한 곳으로 돌리곤 했습니다. 저의 속내를 모르는 아내로서는 저를 감수성 충만한 로맨티스트로 여겼을 겁니다.


이 외에도 정말 많은 일이 있었지만, 이왕 분위기 탄 김에 인상적인 사건 한 가지만 더 소개하겠습니다. 결혼 전 연애 때의 일인지 혹은 결혼하고 나서 아내가 처갓집에 내려가 있을 때의 일인지는 솔직히 기억이 가물가물합니다. 이와 유사한 일이 워낙 많다 보니 이젠 시간 관념마저 희미하네요. 아무튼 어느 날 저녁 아내에게 전화가 걸려 옵니다.


아내 : 오빠, 뭐 해?

나 : 응? 니 생각.(사실은 좋아하는 예능 프로그램을 한창 재밌게 보고 있었음.)

아내 : 보고 싶다.

나 : 나두.(사실은 온전히 TV를 보고 싶었음.)

아내 : 지금 오빠한테 갈까?

나 : 헉, 지금?(아...안돼.)

아내 : 응.(하...)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아내의 목소리는 묘하게 두어 계단쯤 가라앉아 있었습니다. 잔기침도 간헐적으로 해대는 걸 보니 분명 어디가 아픈 게 틀림없었습니다.


나 : 어디 아파? 감기 걸렸어?

아내 : 감기는 아니고, 목이 좀 부은 것 같아.(그게 감기인데... 목감기...)

나 : 약은 먹었어?

아내 : 아니, 안 먹어도 괜찮아.

나 : 내가 약 사 들고 갈까?

아내 : 괜찮아. 오지 마. 여기가 어디라고.

나 : 그래, 따뜻한 물 한 잔 마시고 푹 자.

아내 : 응. 잘 자. 오빠.


통화가 끝나자마자 TV를 끄고 외출 준비를 합니다. 동네 약국에도 들러 목감기약을 삽니다. 자동차 조수석에 약봉지를 던져두고 꽤 거리가 있는 아내의 시골로 차를 몹니다. 왠지 귀신이 나올 것만 같은 재(峴) 하나를 넘어서 십 분을 더 가면 아내의 본가가 있습니다. 집 앞에 차를 세워두고 아내에게 전화를 겁니다. 약간 이지적이면서도 도회적인 목소리, 무심함과 젠틀함이 섞여 있는 목소리를 별빛이 흩뿌려진 시골의 밤하늘에 덧뿌립니다.


“지금 나올래? 당신 집 앞이야.”

갑작스러운 방문으로 인한 어리둥절함, 민낯을 내보이는 데서 오는 부끄러움, 자신을 위해 용감하게 귀신 고개를 지나쳐 온 남자에 대한 감동과 고마움 등이 모두 섞여 있는 표정으로 아내는 슬며시 대문을 엽니다. 예상치 못한 저의 등장은 아내의 눈썹과 눈매, 입가에 선명한 초승달 조각을 그립니다. 아내는 저에게 와락 안기며 뽀뽀 세례를 퍼붓습니다. 그리하여 아내의 목감기는 저에게로 옮아 옵니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비록 목감기는 옮았지만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고 점수를 땄으니까요. 아마 아내는 제가 돌아간 후 침대에 누워 충만한 행복감을 죽부인 삼아 잠들었을 겁니다. 이 남자 무심한 줄 알았더니 꽤 센스가 좋은데? 플러스 1점.


결혼하고 한집에 살면서부터는 더욱 듣기의 촉수를 세웠습니다. 아내는 여전히 직접적으로 의도를 드러내는 대신 들을 테면 듣고, 아니면 말라는 화법으로 옹알거리곤 했습니다. 뭐가 필요하다, 뭐가 먹고 싶다, 어디 공기가 쐬고 싶다. 그때마다 전 아내의 욕구를 기억의 다이어리에 필기한 후에 밑줄을 긋고 별을 씌웠습니다. 그리고 적절한 기회가 찾아왔다 싶으면 짠, 하고 실현해 주었습니다.


‘뭐야, 난 그냥 한 말인데.’

‘당신이 어떤 말을 하든 나에겐 그냥 한 말 정도가 아닌 별표 세 개짜리 문장이야.’


얼마 전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서점을 들렀습니다. 프랑수아즈 사강의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는 소설이 진열대에 버젓이 놓여 있는 게 눈에 띄었습니다. 브람스는 좋아하지 않지만, 민음사의 고전 작품을 사 모으는 게 취미였기에 사고픈 충동이 강하게 일었습니다. 이미 두 권의 책을 손에 쥐고 있었기에 여기서 한 권을 더 산다는 건 가정 경제에 타격을 줄 것 같아 아련한 표정을 지으며 애먼 책 표지를 만지작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런 제 꼴이 한심하고 불쌍해 보였는지, 아내는 책 사는 덴 돈을 아끼지 말라며 손수 카드를 건네주었습니다. 동정의 힘은 정말 강합니다.


아무튼 힘들게(?) 쟁취한 책이니 사랑에 빠지는 마음으로 소설을 읽어보았습니다. 삼각관계에 빠진 남녀 사이에서 일어날 수 있는 복잡 미묘한 마음을 섬세하고 세련되게 풀어헤친 감정 맛집이더군요. 특히 사랑하는 여성을 위해 사소한 것 하나까지 챙기고 배려하는 연하남 시몽의 모습에선 '맞아, 나도 아내한테 저랬지', 하는 일종의 동질감마저 느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욕구나 결핍을 기억 속에 담아두었다가 체크리스트 항목을 점검하듯 하나씩 지워나가기. 저는 이 사소하고도 일상적인 결핍에 대한 충족이 사랑을 지탱하는 기본적인 매너이자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상대방의 욕구를 그냥 넘어가지 않고 잔잔하게 채워주는 일은 얼핏 부부 사이에 찾아올 수 있는 권태라는 방전 상태를 극복할 수 있는 정품 고속 충전기가 아닐까 합니다. 귀를 쫑긋 세워 가만히 기울이면 상대의 마음을 들을 수 있습니다. 누군가의 마음을 채워주는 일은 비단 상대방만이 아니라 나의 포만감으로도 이어집니다. 물질의 충족보다 더 고차원적인 정신의 충족 말이지요.


<에필로그>

아내에게 어렵게 1점씩 모아서 점수가 꽤 쌓였겠다 싶으면 한 번의 실수로 그 점수가 통째로 사라집니다. 착한 일 한 번엔 플러스 1점, 나쁜 짓 한 번엔 -100점. 남편들은 이해할 수 없는, 아내들만의 이상한 채점 방식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 사랑한다면, 총점이 마이너스가 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