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여자의 반려 남편으로 살아가는 법. 첫 번째 이야기
저는 직업이 국어 교사라 문학을 사랑하고 일상생활 속에서 비유를 즐겨 사용합니다. 그래서인지 사람이나 사물을 관찰하고 비유로써 그 본질을 궁구하는 괴상한 버릇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인간미가 없고 돈만 밝히는 사람은 ‘물질에 지배당한 불가촉천민’, 평소 이랬다저랬다 하며 애초의 결정을 틀어버리는 미모의 아내에겐 ‘절세미인변덕공주’ 같은 식으로 말이지요. 지인과 이야기를 나누던 어느 날, 지인에게 전화가 걸려 와서 무심결에 그의 핸드폰 화면을 본 적이 있었습니다. ‘절대 화내지 않기’라고 적힌 발신자의 정체가 궁금하더군요. 지인은 아무렇지 않게 ‘응, 여보.’ 하며 전화를 받았습니다. 갈등을 줄이고자 아내의 이름을 그런 식으로 저장한 지인의 작명 감각에 감탄했습니다.
비유 얘기를 더 하자면, 저는 결혼 생활을 두 개의 원이 고리 형태로 연결되는 벤다이어그램에 비유하고 싶습니다. 수학 교과서에서 접했듯이 벤다이어그램은 두 원이 완벽하게 겹치지 않습니다. 엄연한 교집합의 영역과 각자 차집합의 영역이 존재하는 모양이지요. 교집합의 영역이 클수록 서로에 대한 공감 지수가 높아질 테지만, 차집합의 영역이 크면 갈등의 소지가 커질 수 있습니다. 아무리 부부 사이라 해도 태생적인 기질이나 삶의 후천적인 굴곡이 다르므로 서로의 삶이 한데 뭉쳐 완벽한 하나의 삶이 된다는 건 불가능의 영역에 가까울지 모릅니다. 이렇듯 부부생활이 원만하게 굴러가게 하려면 교집합의 영역을 넓혀 가며 서로에 대한 이해도 지수를 높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둘 중 하나가 자신의 이해관계를 잠시 내려놓고 저자세를 취하거나, 누구든 한 명은 열린 양보를 해야 하는 식으로 말이지요. 부부라는 이름으로 묶이기는 해도 엄연한 독립적 개체이기 때문에 둘의 마음이 100% 일치하는 일은 어렵습니다.
아내를 지극히 사랑하는 것과는 별개로, 저 역시 완벽함보다는 부족함이 많은 인간인지라 사소한 생활 속에서 아내에게 상처를 입을 때가 가끔 있습니다. 아내로서 제가 인지하지 못하는 여러 부분이 눈에 거슬릴 것입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상대방을 온전히 이해한다는 의미보다는 사랑하기 때문에 당신을 이해하려고 노력한다는 의미에 가까운 건 아닐까요? 아내와 저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서로를 사랑하기 때문에 상대방을 이해하려고 일상의 장면 하나하나마다 인내와 양보를 곁들이고 있습니다. 아직 아내나 제가 캐리어에 몽땅 짐을 싸 들고 집을 뛰쳐나갔던 적이 없다는 사실로 봐선 우린 서로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며 비교적 평화로운 부부생활을 한 것도 같습니다. 집에서 쫓겨나면 갈 데가 없다는 것은 아내에게 비밀입니다.
여태 아내에겐 꼭꼭 감춰뒀지만, 제 의식의 언어 창고 안에는 과거에 학습된 불결한 말들이 어지럽게 뒤엉켜 있습니다. 저는 그동안 저와는 정반대 성향인, 즉 욕이 찰지고 활동적 활력이 넘치는 친구들과 유독 깊은 우애를 쌓아왔습니다. 일종의 상보적 매력에 끌린 것이겠지요. 그 친구들이 거친 말을 내뱉을 때면 ‘어허, 저건 좀 심한데?’, 싶으면서도 친밀감을 결속시키면서 유쾌한 분위기를 만드는 비속어의 순기능에 묵묵히 동조하기도 했습니다. 대학교 때까지는 그들의 언어에 동화되어 불쑥불쑥 나쁜 말을 뱉기도 했지만, 저라는 사람 자체가 볼리비아의 우유니 소금사막같이 맑고 투명한 내면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굳이 욕으로 제 정체성을 꾸미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마음에도 없는 욕을 할 때면 괜스레 죄책감이 일었고 양심의 가책은 누름돌로 제 마음에 얹혔습니다.
일 년에 한두 번 정도 아내와 갈등이 있을 때마다 나쁜 말이 튀어나올 뻔한 위태한 순간도 여럿 있었습니다. 순간의 흥분을 이기지 못해 욕 비스무레한 말이 삐져나올라치면 전 그것을 한숨으로 간신히 뒤덮었습니다. 한숨이 방어 기제로 작동한 것이지요. 가뜩이나 흥분한 두 주체가 거친 욕설을 주고받으며 날 선 공방전을 펼치면 온 집안을 태울 듯한 갈등의 불씨가 번질 게 뻔하니까요. 저에게 한숨은 은근한 져주기에 가까운 행위였습니다. 비록 마음속에 쌓인 말은 많지만, 당신의 논리가 내 논리상으로는 이해되지 않지만, 더 이상 당신이랑 싸우기 싫으므로 내 주장을 강요하진 않겠다, 당신의 생각을 어느 정도 받아들이겠다, 그런 의미로써 한숨을 활용한 것이지요.
하지만 이런 저만의 자의적인 한숨의 용도는 온전히 제 편의만을 따진 생각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한숨을 쉰다고 해서 갈등이 쉽사리 꺼지거나 무마되진 않았기 때문이죠. 오히려 찝찝한 뒤끝만 남겼다고나 할까요. 아내는 저의 한숨을 백기 투항의 의미로 받아들이지 않고 더 이상 당신과 대화하기 싫다는 단절의 의미로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녀와 싸울 때만 불쑥불쑥 튀어나왔던 한숨은 못된 습관으로 굳어져 이제는 가정 내에서 불쾌한 장면이 연출될 때마다 한숨을 토하곤 했습니다. 곁에서 지켜보던 아내로서는 무슨 남자가 저리 한숨이 많을까, 하며 경멸의 눈매를 가다듬었을 것입니다. 갈등을 덮기 위해 내뱉었던 한숨은 오히려 바닥에 뿌려진 깨진 유리 조각이었던 것입니다.
어느 날, 참다못한 아내가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제발 한숨 좀 그만 쉬라고요. 제가 한숨 쉴 때마다 숨이 턱 막히면서 가슴이 무겁게 가라앉는다고 하더군요. 제가 일으킨 가벼운 한숨의 바람은 그동안 아내의 가슴에 묵직한 추를 하나씩 더했던 것입니다.
한숨에 (괄호)를 씌우기.
한숨을 삼키고 좋은 감정으로 승화시키기.
불평 섞인 한숨을 내쉬는 대신 크게 심호흡하며 순간의 감정을 다스리기.
이제부턴 아내 앞에서, 집안에서 되도록 한숨을 자제할 것입니다. 그것이 예기치 않게 튀어나오는 순간도 간혹 있을 테지만, 미리 안전장치를 심어둘 계획입니다. 그만큼 제 결심이 확고해지려면 다소 위험 부담이 있는 안전핀 하나쯤은 필요할 테니까요. 새해를 맞아 주변 사람들에게 포상금을 내 걸면서까지 금연을 하겠다는 의지를 다지는 골초 남편같이 비장한 결의가 필요합니다.
“여보, 나 앞으로 한숨 쉴 때마다 따귀 한 대씩 때려 줘.”
설령 제가 한숨을 쉬었다고 해서 비폭력 평화주의자인 아내가 진짜로 따귀를 때릴 일은 없을 것입니다. (막상 쓰면서도 불길한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제부턴 저의 한숨이 가라앉혔던 집안의 농도를 신선한 미소와 웃음으로 정화해야겠습니다. 그러려면 좋은 일이 많이, 자주 있어야겠네요. 행복은 소소함에서 출발한다고 하니 이제부터 일상의 작은 영역에 행복의 씨앗을 심는 연습부터 할 것입니다. 여기저기 씨앗이 움트면 절로 감사하는 습관이 길러지겠지요. 감사는 행복을 부르는 가장 효과적이고 단순한 주문이자 확실한 암시라고 믿고 있습니다. 이제 감사의 주문을 걸 시간입니다.
“당신이랑 함께 사는 일이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