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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현기 Jun 16. 2024

백지 인생보단 깜지 인생

내 삶을 채우는 깜지

깜지란 쓰고자 하는 내용을 종이에 빽빽하게 채워 넣는 것. 오밀조밀하게 붙어 있는 글자들이 새까맣게 보일 정도로 촘촘하게 쓰는 게 포인트다.


 요즘 학교 현장에서는 학생들이 진이 빠진 손가락을 탈탈 털어가며 깜지 쓰는 장면을 도통 찾아보기 힘들다. 내가 학생 신분일 때만 해도 깜지 쓰기는 뭔가 잘못했을 때 내려지는 체벌의 일환이었다. 물론 학업 능력 향상을 위해 혹은 깜지집착병에 걸려 자발적으로 깜지를 썼던 학생들도 있었지만, 나를 포함해 대부분의 수동적인 학생들은 깜지 쓰기를 그다지 선호하진 않았다. 차라리 그 순간 몇 대 맞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깜지 쓰기는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고된 강제 노역이었기 때문이다. 때리고 욕하는 선생님보다 깜지를 여러 장 쓰게 하는 선생님이 더 공포스러웠다.

초코파이 하나랑 맞바꾼 학생의 깜지

 강산이 몇 번 바뀌었고 이젠 나도 학생들에게 깜지 노역을 부과할 수 있는 지위에 오르게 되었다. 하지만 내 기억의 숲 속에서 이리저리 흩날리던 깜지라는 낙엽은 점차 퇴색하고 바스러져 새까만 흙속에 파묻히고 있었다. 최근에 이지성 작가님의 책을 읽다가 위대한 위인들의 독서필사법이란 걸 접했다. 천재라고 불리는 세종대왕이 어렸을 때부터 백독백습했단 역사적 사실은 내게 가벼운 쨉이 아닌 묵직한 카운터 펀치를 여러 방 먹였다. 박학다식했던 세종대왕이 실은 독서와 필사로 완성된 후천적인 천재였다니. 


 사실 깜지는 고통스러운 체벌이 아닌 인류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지혜롭고 탁월한 독서교육법이었던 것이다.  깜지에 대한 나만의 패러다임이 180도로 급격하게 선회했다. 내 기억의 흙속에 묻혀 있던 깜지는 썩어버린 낙엽이 아니라 싱그러이 움을 틔우고 있는 자그마한 꽃씨였던 것이다. 


 일기든 꿈노트든 책 필사든 잡글이든 뭐라도 상관없으니 일단 쓰는 일에 경도되어 보자. 하얀 백지 위에  삶의 기록 염원, 사유와 사색의 터럭들을 새까맣게 채워 는 것이다. 깜지 쓰기 손가락을 탈탈 털어가며 더 향기로워질 미래를 종이에 그리는, 사소하지만 필연적인 작업이다. 이제 그만 깜깜이 삶에서 벗어나 깜지 쓰는 깜냥을 쌓는 건 어떨까.


중지 손톱 옆에 박인 굳은살만큼 너의 지성에도 지혜와 통찰의 굳은살이 단단히 박여 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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