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신으로 살고 있는 여자가 하나 있다. 15평짜리 임대 아파트에 살고 있는 여자가 가진 거라곤 집에서 기르는 강아지 한 마리뿐이다. 늦은 밤 하루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여자는 높은 하이힐을 벗어던지고 제대로 씻지도 않은 채 부엌으로 가 구석에 있던 라면 한 봉지를 뜯었다. 가스 밸브를 열어 불을 켜고 물을 끓이는 동안 상사에게 추가 업무에 관한 메시지를 받았다. 그녀는 지금 상사가 눈앞에 있었더라면 저 끓는 물을 부었을지도 모르겠다,라는 생각을 했다. 여자가 상사에게 통쾌하게 복수하는 상상을 하는 때에 멍-하고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자의 다리 주위를 맴도는 갈색 치와와 한 마리가 명랑하게 짖어댔다. 그녀가 1년째 기르고 있는 강아지의 이름은 ‘고양이’이다. 개라고 해서 꼭 개라고 부를 의무는 없잖아, 라며 여자가 멋대로 정한 이름이었다. ‘고양이’는 멍멍 짖으며 여자의 주위를 맴돌았다. 온종일 이 갑갑한 방 안에 갇혀서 여자가 돌아오기를 기다렸을 작은 생명은 신난다는 듯이 여자 옆에서 온갖 재롱을 부렸다. 지친 몸을 씻을 새도 없이 라면 물이 끓어올랐고 여자는 부서진 라면 조각 하나를 씹어 먹으며 내일 하루는 또 어떻게 버틸까, 에 대해 고민했다.
입사 2년 차인 여자는 아직까지도 회사에서 막내였다. 성이 고씨라서 매일같이 고양-이라고 불려 가며 잡무란 잡무는 다 하는 나날이었다. 하루도 마음 편히 회사에 가본 적이 없었다. 그 어려운 청년 실업 100만 시대에 당당하게 취업을 해 남부끄럽지 않게 지내고 있지만 당장이라도 포기하고 싶은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여자는 절로 나오는 한숨에 도리질을 하곤 불어 터진 면발을 삼키며 추가 업무를 하기 위해 노트북을 켰다.
여자의 강아지는 ‘멍멍아’라고 불러도 ‘고양아’라고 불러도 언제나 종종걸음으로 그녀에게 달려와 무릎에 한 자리를 차지했다. 여자는 가만히 ‘고양이’의 등을 긁어주며 어쩌면 이 강아지에게 이름은 필요 없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뭐라고 부르던지 ‘고양이’를 바라보고 손짓을 하면 눈을 빛내며 다가와 주변을 맴돌았기 때문이다. 친척 하나 없는 이 삭막한 도시에서 고양과 ‘고양이’는 의지할 것이 오로지 서로일 뿐이었다.
여자가 사는 동네엔 매일 새벽녘에 손수레를 끌며 파지를 줍는 할머니가 있다. 매일 새벽 할머니가 동네를 돌며 파지를 수거할 때면 손수레 한 구석에선 할머니가 키우는 강아지 한 마리가 명랑하게 짖어대며 아침을 알렸다. 할머니가 파지를 줍는다고 손수레를 내려놓고 주변을 돌아다녀도 강아지는 도망가지 않고 할머니를 기다렸다. 목줄을 채우기는 했다만 그래도 할머니가 파지를 줍는 동안엔 목줄을 놓아서 얼마든지 달아날 수 있을 텐데도 강아지는 달아나지 않았다.
여자는 집에서 택배를 시켜 생긴 박스를 할머니에게 전해드렸다. 매번 고마워서 어째. 할머니는 여자의 손을 꼭 잡곤 몇 번이고 고맙다는 말을 했다. 부녀회장은 그녀의 행동을 나무라곤 했다. 아파트에서 생긴 쓰레기는 아파트 분리수거장에 버려야 한다는 게 이유였다. 그래도 그녀는 가끔 할머니에게 한 무더기의 파지를 전해주곤 했다. 할머니의 모습에서 그녀는 자신의 미래를 보았다. 그녀 자신도 ‘고양이’와 함께 오래도록 함께하길 바랐기 때문이다. 아무 연고도 없는 이 도시에서 오로지 둘 뿐인 삶을 사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사람에게 치이는 것엔 이골이 났기 때문이다.
할머니가 떠난 뒤 새벽 조깅을 하던 부녀회장이 여자를 향해 다가왔다. 뒤에서 이봐요, 고양- 하며 여자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여자는 그런 부녀회장을 무시하곤 빨간 불이 들어오기 직전인 횡단보도를 건넜다. 몇 번 깜박이던 불빛이 빨간색으로 바뀌었다. 건너편에서 화를 내곤 돌아가는 부녀회장을 보곤 기분이 좋아진 여자가 콧노래를 부르며 걸을 때 문자가 도착했다.
-그 사람 죽었다.
발신 번호가 없는 그 문자에서 여자는 몇 년 전 집을 떠나온 기억을 떠올렸다. 여자가 독립해서 살겠다고 선언한 날 엄마는 말없이 미역국을 끓여주었다. 눈가에 푸른 멍 자국이 채 지워지지 않은 채 부르튼 입술로 미역국을 식탁에 내려놓은 엄마는 그녀에게 너라도 혼자서 잘 살길 바란다고 했다. 그뿐이었다. 떠나기 전 안방 문 틈새로 잠든 의붓아버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들통에서 끓고 있는 저 미역국을 부어버리면 어떨까 라는 충동에 사로잡혔지만 빨리 가라고 손짓하는 엄마를 본 그녀는 말없이 집을 나섰다.
그 사람 죽었다. 다시 바라봐도 그 말 뿐이었다. 발신번호는 없었지만 여자는 엄마가 보낸 문자일 거라고 생각했다. 집을 떠나고 2년 만에 처음으로 들은 가족의 소식이었지만 왜, 어떻게 죽었는지는 별로 궁금하지 않았다. 누구나 어떤 식으로든 죽기 마련이니까. 엄마가 연락처를 알려주지 않은 걸 원망하진 않았다. 아마 지금 집으로 돌아가도 그 집에 엄마는 없으리라.
다시는 연락하지 말자며 우리 없는 셈 치고 나가 살라던 엄마였다. 여자는 엄마를 한심하게 여겼다. 매일 같이 온몸에 멍이 들고 피가 나도 지아비는 지아비라며 연을 끊지 못했기 때문이다. 떠나기로 결심한 계기는 의붓아버지가 아닌 엄마 때문이었다. 폭력에 길들여진 엄마는 하나뿐인 딸의 얼굴에 멍이 드는 건 참을 수 없었는지 의붓아버지에게 그릇을 던지며 싸웠고 그 어느 때보다도 처참한 몰골이 되었다. 여자는 자신이 집에 남아있으면 엄마가 더 아플 거라고 생각하고 집을 나가기로 결심했다. 아예 아무 연고도 없는 곳에서 보란 듯이 혼자 잘 살겠다고 말하던 여자는 작은 회사에서 막내로 일하며 온갖 잡무를 맡고 있고 ‘고양이’란 이름의 강아지 한 마리를 키우며 360여 가구가 모인 15평짜리 임대 아파트에서 살고 있다.
집을 나가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여자는 가끔 아프고 외로울 때면 그런 상상을 하곤 했다. 혼자 타지에서 생활하지 않았다면 지금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그리고 이내 어떤 식으로든 집을 나오게 될 운명이었을 거라고 결론을 내리곤 했다. 여자의 엄마는 여전히 폭력에 순응하며 살고 두 모녀는 서로의 삶에 개입하지 않으려 할 것이며 결국에는 엄마와 함께 할 수 없다는 걸 깨닫게 될 테니 말이다. 엄마의 문자를 바라보던 여자는 삭제 버튼을 눌렀다.
*
회사에 발을 내딛는 순간부터 어김없이 온갖 잡일이 그녀에게 파도처럼 밀려왔다. 몰아친 파도는 잔잔해질 때라도 있었지만 업무는 쉼 없이 그녀를 몰아쳤다. 여기저기서 고양- 이라며 여자를 불렀다. 아무도 그녀의 이름을 불러주지 않았다. 그러나 여자 역시 자신의 ‘고양이’처럼 사람들이 그녀를 뭐라 부르던지 상관하지 않았다. 김춘수가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라고 한 것처럼 누군가 여자의 이름을 불러준다면 의미 있는 존재가 되었을 텐데 여자의 엄마 외에는 그녀를 이름으로 부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더군다나 여자는 누군가에게 의미 있는 사람이 되고 싶지도 않았다. 그렇기에 모두가 그녀를 고양-이라고 부를 때 여자도 그들을 이름으로 부르진 않았다. 핸드폰에 저장된 번호들 가운데 그녀에게 의미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신대리, 박 팀장, 부녀회장... 여자가 이름을 부르는 대상은 오직 집에서 그녀를 기다리는 ‘고양이’라는 이름의 강아지뿐이었다.
며칠 동안 바쁜 나날이었다. 어쩌다 보니 여자가 신입사원을 대상으로 하는 공모전 때문에 기획안을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아이디어는 좋다고 응원을 받았지만 문제는 PT구성이었다. 상사는 야구 타자가 공을 쳐내듯 그녀가 무슨 구성을 짜오던지 퇴짜를 놓기로 작정한 사람 같았다. 사례와 추가 자료를 더 찾느라 야근은 기본이고 집에 들어가도 옷을 채 벗을 새도 없이 잠들어버리는 나날이 계속되었다.
고양이 우승해서 우리 팀 회식 한번 하자,라고 하며 도와주지도 않고 자료만 더 찾으라는 상사에게 라면 끓는 물을 부어버리고 싶었던 건 옛 말이었다. 이제는 물 끓이는 시간도 아까워 허기진 몸을 이끌고 생 라면에 라면수프를 범벅해서 오독오독 씹어 먹으며 발표 준비를 하던 어느 날 ‘고양이’에게 이틀간이나 밥을 주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거실 구석에서 조용히 웅크리고 있던 ‘고양이’를 불렀지만 미동이 없었다. 서둘러 밥그릇에 사료를 부어준 여자는 ‘고양이’의 상태가 좋지 않자 24시간 동물병원을 찾아 검색했다. 한창 바쁘게 웹서핑을 하는 중에 마침내 밤새서 만든 PT구성이 통과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여자는 동물병원 찾던 걸 관두고 기뻐하며 잠깐의 탄성을 내질렀다. 그러자 ‘고양이’도 기운을 차린 듯 그녀 주위로 다가와 작게 멍- 하고 짖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