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몰, 달아공원

2월 8일

by 화니와 알렉산더

기말고사가 끝났고 종강이었다. 두 달 동안 필요한 짐을 간소하게 꾸렸다. 동현이 빌려준 캐리어에 낡은 옷가지를 쑤셔넣으며 생각했다. 먹여주고 재워주고 월 200이라. 지나치게 좋은 조건 아닌가. 방학 동안 목돈을 만들 수 있다는 생각에 기뻤지만 꺼림칙하기도 했다. 부자들한테 그 정도 돈은 큰 돈이 아닌가? 계약을 체결하는 단계에서 정신 똑바로 차려야지, 나는 다짐했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고 했다. 어딘가 분명 독소조항이 있을 거야, 나는 생각했다. 걱정은 이모집을 떠나기 전날 시작해서 분당행 버스에 오르기 직전 끝났다.


버스 구석에 앉아 생각했다. 사백을 어디에 쓰지? 매달 원고료가 통장으로 들어왔지만, 나는 그 돈의 절반을 이모한테 생활비에 보태시라며 드렸다. 나머지 절반은 동생 학원비를 보탰다. 동생은 달서구 할머니 댁에서 숙식하며 수성구의 유명한 학원들까지 왕복 두 시간을 들여 오갔다. 목돈을 모으는 일은 언감생심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우선, 이모와 부모님께 각각 백 만원씩 드리고 동생 내년에 대학 입학할 때 선물로 양복 한 벌 맞춰주고. 자랑스러운 조카가, 아들이, 형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벅찼다.


학생 이름은 지훈. 94년생이라고 했다. 1994년. "중경삼림", "뱀파이어와의 인터뷰"와 "세 가지 색: 화이트"가 개봉한 해다. 영화. 생각해보니까 3월 말에 "건축학개론"을 본 이후 세 달 가까이 극장에 가지 않았다. 다음 달에 "다크나이트 라이즈"가 개봉하니 꼭 보러 가야지. 너무 바쁘게 살았나? 상경하는 기차에서 대학에 가면 매 달 영화 한 편씩은 보겠다고 다짐했었는데. "해를 품은 달" 이후로 세 달 동안 챙겨보는 드라마도 없다. 여유를 가져야지. 바쁠 수 밖에 없는 삶이지만, 소소한 행복은 자주 느껴야지. 그 무렵 나는 다짐했다.


이모집에서 지훈의 집은 멀지 않았다. 버스를 타고 사십 분 이동하니 판교역에 도착했다. 현대백화점 판교점이 세워지기도 전이었다. 걸어서 지훈이 사는 백현동 단독주택에 갔다. 높은 대문을 통과하고 넓은 잔디밭을 가로질러 현관문에 다다랐다. 벨을 누르니 피부가 붉은 기운 없이 하얗고 키가 크고 바싹 마른 남자애가 문을 열어 주었다. 팀 버튼 감독의 "유령신부" 주인공으로 손색이 없는 외모였다. 손색이 없는 정도가 아니고 빅터와 정말 똑같이 생겼다. 한국에서 실사영화를 제작한다면, 빅터 역은 지훈이 차지해야 마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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