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 무라카미 하루키
'피크닉'이라고 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시나요? 장소는 제각각이겠지만 산뜻한 공기, 피크닉 매트 혹은 간이 의자, 약간의 음식, 야외의 풍경이 떠오르는 건 비슷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거기에 조용한 음악과 책까지 더해진다면 저에게는 완벽한 피크닉이 될 것 같습니다. '북크닉'이라는 자유독서 모임을 계획할 때 떠올렸던 건 따뜻한 봄날씨입니다. 그러나 주말이 시작된 모임 하루 전 가차 없이 비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다행히 밤사이 비는 그쳤지만 공기는 무겁고, 구름은 두껍게 차양을 내려 해를 숨겼습니다. 그래도 좋았습니다. 이따금 물을 머금은 쌀쌀한 바람이 불어왔지만 개이치 않습니다. 도착한 네 사람들은 야외 테이블에 둘러앉아 커피와 책으로 몸을 데우기 시작합니다. 실내로 들어갈 수도 있었지만 야외에서 책을 읽기로 한 선택은 역시나 옳았습니다. 예상치 못하게 마카롱을 들고 온 친구가 있어서 달달한 마카롱을 나눠 먹으며 각자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봅니다.
제가 읽은 책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였습니다. 20대 초반에 읽었던 책인데요. 너무 오래되어서인지 흐릿해져 몇 가지 사실들만 기억이 나고 이야기는 잘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처음 읽었을 당시에는 그룹에서 추방당했던 쓰쿠루의 나이와 비슷해서인지 '색채'라는 키워드에 매료된 기억이 있습니다. 이번에 읽었을 때는 오히려 '상실'이라는 키워드가 가장 뚜렷하게 다가왔습니다. 관계, 청춘, 희망,... 은 조금씩 옅어지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별과 상념, 어둠이 그 자리를 채우게 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단순한 이야기의 구성으로 본다면 아쉬운 부분도 있었습니다. 핀란드까지 순례에 가까운 먼 여행을 떠나 꽤나 긴 분량을 에리와의 대화로 채워가지만 정작 시로(유즈)의 죽음과 하이다의 사라짐은 조금 허무하게 남겨집니다. 마치 쓰쿠루를 위한 장치처럼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다른 측면에서 쓰쿠루라는 인물과 동행한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느낀 감상은 조금 더 뜨겁습니다. 무엇보다 '사랑'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됩니다. 연인뿐만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사이. 마음이 열리고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서로의 존재만으로 충분한 순간들로 채워지는 관계에 대해서 말입니다. 어떤 이야기도 나눌 수 있고, 대화는 살아있는 파도와 같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나이가 들 수록 우리가 타고난 그런 능력들이 조금씩 좀 쓸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과격한 생각도 해봅니다. 쓰쿠루에게 그런 순수한 관계들은 여차 없이 상처를 주고 말았는데요. 그럼에도. 쓰쿠루는 사라를 위한 역을 짓습니다. 사라와 쓰쿠루는 어떤 결말을 맺게 될까요. 개인적으로는 쓰쿠루를 응원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참 이상해.... 그렇게 멋진 시대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게. 온갖 아름다운 가능성이 시간의 흐름 속에 잠겨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 그리고 돌아가는 길 쓰쿠루는 그 말의 대답을 생각해 냅니다.
"우리는 그때 뭔가를 강하게 믿었고, 뭔가를 강하게 믿을 수 있는 자기 자신을 가졌어. 그런 마음이 그냥 어딘가로 허망하게 사라져 버리지는 않아."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자면 당시에 만나고 있었던 남자친구에게 추천을 받았던 책인데요. 어린 나이었지만 오랜 시간을 만났던 만큼 이별이 주는 충격도 상당했습니다. 그 충격 때문에 실은 오랫동안 마음을 열지 못하고 지냈습니다. 그 사실이 부끄러웠는지 스스로도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긴 터널을 빠져나왔을 때 다시 용기를 내어보았던 것 같습니다. 작은 마음의 그릇을 만들게 되었고 감사하게도 아주 작은 그릇이지만 누군가가 들어와 주었습니다. 많은 것이 변했습니다. 20대 초 영원할 것 같았던 친구도 연인도 지금은 더 이상 연락을 주고받지 않습니다. 가끔 쓰쿠루처럼 괴로움을 묻은 채 반복되는 일들에 스스로를 몰아넣어 버리는 때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누군가를 만나면 또 한 번 그때의 나의 모습처럼 온전히 믿고 싶어지는 때가 옵니다. 평생을 누군가와 함께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말이죠.
시간은 훌쩍 지나갔습니다. 흔들 그네에 앉아 책을 읽으신 분도 있었고, 테이블을 지키고 앉으신 분도 있었고, 이따금 하늘을 보거나 몸을 움직이신 분도 있었습니다. 저는 책의 결말을 남겨둔데다 생각과 감정이 정리되지 않아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습니다. (다른 분들의 책 소개의 흥미로운 이야기들도 적고 싶지만 오늘의 글은 조금 더 개인적인 글이 되어버렸습니다.)
젖은 공기가 더 무거울 것이라 생각했는데, 물기가 오히려 산산하게 느껴집니다. 숨을 크게 들이쉽니다. 보내게 된 시간들에 대한 작별은 내리는 비처럼 가끔 마음을 적시며 언제고 계속될지도 모릅니다. 허망하지 않습니다. 슬픔과도 다릅니다. 촉촉한 공기처럼. 마음을 가만히 채워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