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작가의 오후>
이번주 독서모임의 책은 피츠제럴드의 후기 작품집인 ‘어느 작가의 오후’ 였습니다. 지난주 영화를 바탕으로 한 대화보다 조금 더 심도 깊은 이야기들을 나눴는데요. 책을 읽기만 해서는 할 수 없었던 생각들을 대화를 통해 확장해 보았습니다. 책 내용은 대화의 구심점이 되어주었었지만, 사실 서로와 자신을 발견해 나가는 시간이 아니었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선정된 책은 단편 소설 8편, 에세이 5편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 속에서도 유독 기억에 남는 작품이나 구절 혹은 인물, 인상 깊었던 점 등을 자유롭게 이야기해 보았습니다.
<크레이지 선데이>를 꼽으신 분은 작가의 자전적 이야기라는 것이 느껴지는 점에서도 그렇고, 캐릭터에서도 매력을 느끼신 것 같습니다. 할리우드 작가 시절 쓴 이야기 속 마일스는 아마 작가 자신을 그린 것이 아닐까 추측하셨습니다. 조얼의 말에 따르면 마일스는 ’심지어 저 근본 없는 여자(스텔라)‘마저 ’ 일종의 걸작으로 만든 ‘ 인물로, 글 속에서 죽음을 맞이함에도 다른 인물들의 머리 꼭대기에 있는 것처럼 그려집니다. 조얼은 마일스가 없는 이상, 스텔라에게 더 이상 매력을 느끼지 못하게 됩니다. 삼각관계 속 진정한 사랑은 무엇이었을까. 생각해 보게 되는 지점입니다.
첫 작품인 만큼 <이국의 여행자>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하신 분도 계셨는데요. 캐릭터의 결핍이 생생하게 느껴지는 점에서 작가의 섬세함을 느끼신 것 같습니다. 또한 이야기 속에서 풍요와 결핍, 속물적인 것과 진심과 이중적인 것들이 부딪히며 진행되는 점이 흥미로웠다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여성 인물의 심리 묘사 역시 탁월하다고 느껴지는데요. 과연 <이국의 여행자> 속 켈리 부부의 결말이 희망적일 것인가에 대해, 자신의 위치나 결핍을 의식했다는 점에서 저희는 희망을 보았다고 의견을 모아봤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직업의식이 느껴졌던 작품이라 <바람 속의 가족>과 <어느 작가의 오후>를 가장 인상 깊게 읽었습니다.
두 번째로 피츠제럴드라는 작가의 개인적 생애와 일본어 번역으로 책을 엮어낸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작가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눠보았습니다.
하루키가 피츠제럴드에게 매력을 느낀 이유와 두 작가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이었습니다. 정제된 문체와 같은 작가로서의 매력뿐만 아니라 사실 두 작가의 닮은 점도 있었는데요. 사실 개인적인 삶의 차원에서는 두 작가가 매우 다르다는 사실을 알고 계실 겁니다. 우선 100년이 넘는 시간의 격차가 있었습니다. 가난했던 어린 시절과 격변의 시기를 몸소 겪어낸 피츠제럴드를 보면 하루키는 비교적 평온한 젊은 시절을 보냈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작가로서의 삶 역시 하루키는 평소 자기 관리가 철저하기로 유명합니다. 알코올 중독으로 고생했던 피츠제럴드와 달리 70대가 된 현재까지도 활발히 작품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평소 하루키의 작품을 많이 읽어보신 분은 특히 하루키 에세이를 좋아하신다고 하셨는데요. 피츠제럴드의 에세이와 하루키의 에세이가 솔직하다는 점에서 매우 닮아있는 것을 느꼈다고 합니다. 실제로 역자인 하루키 역시 피츠제럴드의 에세이를 여러 번 읽고 영향을 받았다고 말하기도 하죠.
소설에서도 두 작가의 닮은 점을 찾아낼 수 있었습니다. 존재론적인 질문을 던지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방황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죠. 물론 하루키의 소설은 조금 더 판타지와 인물의 내면의 세계를 탐험한다면 피츠제럴드의 작품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현실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하루키의 소설에서 ‘허무주의’가 느껴진다고 하셨던 분이 피츠제럴드의 작품에서 비슷한 것을 느낀 이유도 이런 점이 아닐까 싶습니다. 또한 ‘상실’이라는 키워드 역시 두 작가를 이어주는 연결고리가 되었습니다. 피츠제럴드는 젊은 날의 성공으로 부를 얻게 된 이후 대공황, 개인적인 사치와 알코올 중독, 아내 젤다의 병 때문에 힘든 나날들을 보냅니다. 그의 작품과 에세이를 통해 인생의 하락곡선에서 만나게 되는 절망과 육체적인 쇄약을 절절히 느껴볼 수 있습니다. 반면 ‘노르웨이의 숲(상실의 시대)’와 같은 대표작을 포함해 하루키의 작품 속 인물들은 친구(연인) 혹은 자신의 일부가 사라지는 죽음 혹은 이별을 경험하면서 상실을 받아들이며 성장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다음으로는 피츠제럴드의 작품이 쓰인 시대상황이 작품 속에 어떻게 녹아있는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피츠제럴드가 줄 수 있는 메시지가 있다면 무엇일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선 소설 속 시대상황은 1차 세계대전으로 국제사회에 화려하게 떠올랐던 미국이 경제대공황을 겪게 된 이후입니다. 이러한 급격한 상황의 변화는 아무래도 가치관의 혼란을 가져오게 되었을 겁니다. 피츠제럴드의 작품 속에서도 속물적인 것을 추구하면서도 만족하지 못하는 인물, 직업까지 내려놓을 만큼 알코올 중독에 시달리는 인물 등 방황하는 인물들이 그려집니다. 경제적 상황이나 자유주의, 개인주의의 대두 같은 시대적 상황과 맞물려 소설이 그리는 이야기가 더욱 생생히 와닿기도 하는데요. 현실의 모습을 생각해 봤을 때 경제적인 영향력과 더불어 빠질 수 없는 것이 ‘온라인’ 환경이었습니다.
오프라인에 사는 것만큼이나 온라인에 사는 시간이 많아진 요즘 현실에서, 개인주의는 어떻게 변모했을까요. 온라인이라는 익명의 공간에서 오히려 개인주의가 퇴화되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분도 있었습니다. 마녀사냥이나, 개인정보의 무분별한 노출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온라인 검열’이나 ‘전체주의’의 위험성도 분명 있을 수 있을 겁니다. 한편 현대의 삶에서 보상이 노력에 비해 쉽게 주어지는 부분도 있다고 지적하신 분도 있었습니다. 물질적인 것이나, 관계에 드는 노력에 비해 쉽게 접촉할 수 있다는 것인데요. 이러한 상황이 가치관의 혼란을 가져다줄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피츠제럴드 역시 자신의 성공이 운과 같다며, 낭만주의를 가져온 비극이라고 한탄했습니다. 그럼에도 죽기 직전까지도 장편을 쓰며 작품을 포기하지 않았던 피츠제럴드의 삶을 통해, 우리는 ‘작가’로서의 소명을 놓지 않은 그의 의지에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피츠제럴드의 에세이와 개인적 글쓰기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전문 직업인으로서 작가는 아니지만 우리는 모두 글을 써본 경험이 있을 겁니다. 개인 블로그와 SNS등 쉽게 글을 쓰고 공유할 수 있는 환경이 된 지금, 개인적 글쓰기는 어떤 의미일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요.
개인적인 일기장처럼 블로그에 글을 쓰신다는 분도 계셨고, 우울한 시기에 글을 썼던 경험을 이야기해 주신 분도 계셨습니다. 대체로 우울할 때 개인적인 글쓰기를 하게 된다는 데 동의했는데요. 힘겨운 시기 글을 쓰는 행위를 통해 자신의 마음을 정리하기도 하고, 다하지 못한 말을 전해 보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그 자체로 해소의 기능이 있기도 하지만, 공개적인 공간에 업로드 함으로써 공감을 바라기도 하죠.
개인 블로그에 글을 쓰시는 분께서는 글을 잘 정리하고 다듬어 깔끔한 글을 쓰고 싶다는 소망과 함께 자신의 변화와 삶을 기록하면서 나중에 되돌아보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장편의 글을 쓰고 싶다는 분도 계셨는데요. 역시 독서모임인 만큼, 글쓰기에 대한 욕심이 있는 것은 어쩔 수 없나 봅니다. 저 역시 우울한 시기에 글을 자주 쓰곤 했는데요. 어디에도 올리지 못하고 혼자 써 내려간 글들도 있는 한편, 블로그에 쓴 글들도 있습니다. 요즘은 마음이 온전하고 건강할 때에 관심이 있는 것들에 대해 글을 써보고 싶은 마음입니다. 글쓰기가 주는 치유의 힘을 생각해 보니 함께 글을 쓰고 나누는 시간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마지막 질문은 마지막 에세이의 제목과 같은 ‘젊은 날의 성공’에 대해서입니다. 에세이 속 피츠제럴드는 20대의 성공을 운이라고 생각하면서 독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도 성취가 오히려 독으로 다가온 순간이 있을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20대 때에 한 분야를 통해 조금 유명세를 얻은 적이 계신 분이 있으셨습니다. 그때 받았던 관심은 오히려 부담스러웠다고 하는데요. 오히려 잠잠해졌을 때, 자신이 더욱 단단해진 느낌을 받았다고 하셨습니다. 노력보다 큰 성과를 얻은 경우에 대한 이야기도 많았습니다. 과정에 너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가 실패하거나, 오히려 들인 노력에 비해 큰 결실을 맺었을 때, 혼란스러워지기 마련인데요. 그럼에도 결과보다 과정을 중요시하는 태도는 참 중요한 것 같습니다. 매번 선택에 순간에 부딪히는 우리에게 조금 느릴지라도 꾸준히 나아가는 것이야 말로 답이 아닐까 싶습니다. ‘부득탐승’이라는 말을 가슴에 새기셨다는 분의 말이 기억에 남습니다. 결과를 너무 탐해 목적을 잃어버리지 말고, 방향성을 늘 점검해 가면서 꾸준히 나아가자는 것으로 저희의 모임은 마무리되었습니다. 삶의 끝에서도 끝까지 작품을 포기하지 않았던 피츠제럴드를 생각하면서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