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나는 특별히 뭔가가 불편하다는 생각을 못해봤다. 불편하지 않았던 게 아니라 어떤 부분이 어떻게 더 편안해질 수 있는지 몰랐기 때문이다. 나는 타고난 성격이 예민했다. 주변의 소리나 냄새, 변화에 기민하게 반응해서 식구들이 피곤해했던 기억이 난다. 사람의 표정이나 제스처에는 특히 민감했다. 유달리 예민한 아이라는 설명이 붙을 때면 나는 내가 별로인 사람처럼 느껴졌다. 그래, 불편했던 점이라면 그런 것이었을테다. 나의 표현이 누군가를 불편하게 한다는 사실, 그럼에도 나는 그렇게 해야만 하는 존재라는 것이.
그렇게 살다가는 사회에 적응도 못하는 사람으로 살게 될거라는 말도 심심찮게 들었다. 그런데 꼭 그렇게 살게 되는 것은 아니었다. 시대를 잘 만났다고 해야할까, 인복이 많았다고 해야할까? 나는 치유와 힐링이 유행하는 시절에 청소년기를 보냈다. 소수자들과의 연대를 이루며 나만의 찬란한 20대를 만들 수 있었다. 그래서 나의 예민함을 충분히 다시 들여다 보게 되었다. 나는 사람들이 무심코 지나치는 폭력을 잘도 파악하고, 그것을 구체적으로 정리했다. 나는 이런 점이 불편하기 때문에 바뀌었으면 좋겠다고 기어이 판을 깨는 말을 늘어놓았다. 서투를 때는 갈등도 잦았지만 그럴 때 물러서지 않고 싸우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진심으로 부딪히고 화해했던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친구가 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됐다.
그래서 나는 불편하다고 말하는 아이들이 좋다. 미처 다 크지 못해 외계 생물체처럼 보이는 아이들이 막연히 투정부리는 것부터, 이 사회는 잘못됐다고 시뻘건 눈을 하고 소리치는 청소년들까지, 그들이 불편에 대해 표현하는 것은 모두 좋은 일이라고 생각된다. 그들에게는 자기 스스로가 있어보인다. 그것이 그들 스스로를 살게 하고, 지키기도 한다고 생각한다. 연결이 되는 지점인지 확신할 수는 없으나, 나는 아이들이 나오는 방송을 보고 불편할 때도 있다. 특히 문제 행동을 하는 아이들을 교정하는 프로그램이나, 천재적인 재능을 보이는 아이들을 조명하는 프로그램은 특히 그렇다. 아이들의 의사가 충분히 반영되었을까 하는 염려도 있고, 누구나 자연스럽게 누려야 하는 과정인데도 불구하고 순식간에 세간의 구설수에 오르는 것이 걱정되는 것도 있다.
성인이 된 내가 생각하기에 어린이들은 생활 속에서의 불편함도 꽤 많을 것 같다. 먹기 싫은 음식도 먹어야 한다거나, 선풍기가 돌아가는 데 손이 끼일까봐 두려워한다거나, 칼이나 불을 이용한 요리를 마음대로 못한다는 것 처럼 말이다. 다 내 어린시절의 이야기다. 그것은 아마도 보호와 관련된 것인데, 아이들은 그래서 어른이 되고 싶은가보다. 나도 빨리 어른이 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초등학생 때 였고, 집열쇠를 놓고 학교에 갔는데 돌아오니 현관이 잠겨있었다. 햇살이 들어오는 계단에 앉아서 할아버지가 운동에서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는데, 굳게 닫힌 철문이 너무 원망스러웠다. 어쩌면 내가 괴력을 가지고 있어서 저 문을 뜯어낼 수도 있지 않을까 낑낑거린 적도 있다. 당연히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 기억은 너무나 애처롭고, 한편으로 너무 귀엽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