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나는 더 이상 어리지 않고, 어쩔 때는 이런 게 어른의 기분인가 싶을 때도 있다. 나이가 많아질수록, 살아온 해가 거듭될수록 생각하게 된다. 아이의 입장에서 부모가 서툰 것과 나쁜 것은 다른거라고. 사정이 있어 부재했던 것과 애초에 부재할 생각이었던 것이 다르듯이. 세월호 참사를 지켜보면서 사회가 아이들을 보호할 수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지만 그럼에도 구체적인 실상은 모르고 넘어갈 때가 많았는데, 아이들이 처한 현실에 눈을 확 뜨게 만든 사건이 한번 더 있었다.
정인이 사건. 몇 년 전 뉴스에서 본 무서운 이야기다. 정인이라는 아이가 죽었는데 그 애는 고작 16개월 된 갓난쟁이였고 가해자들에게 입양된지 일년도 안됐었다고 한다. 그 뉴스를 읽었을 때 나는 다윗이 기도하는 장면이 나오는 성경책을 읽고 있었다. 다윗은 하나님을 무척이나 신뢰하고 의지하는 것 같았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요청을 다 했고, 나는 하나님이 선하신 분이라면 원수의 손에서 구해달라는 다윗의 요청을 들으셨으리라 생각했다. 하나님은 자신을 찾고 기다리는 이들과 함께하시는 분이니까.
하지만 사건의 전말을 두고 보면서 나는 치미는 울화를 참을 수 없었다. 자기라는 것이 미처 다 생기지도 않았을 아이가 죽었다는 생각을 하니, 할 수 있었다고 한들 누구에게도 자기를 표현할 수 없었으리라. 이런 절망이 찾아올 때 나는 무력감에 어쩔 줄 모르겠다. 나보다 약한 이를 지키지 못했다는 슬픔, 내가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나는 신에게 무엇을 요청할 수 있을지 떠오르지 않았다. 바꾸겠다고 말하면서도 되려 어리석어 일을 그르칠까 두려워지곤 했다. 자비가 있다면 무고한 자들에게 찾아오기를 기도하는 수밖에.
가해자 부부는 처벌받았다.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죄가 인정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고 한다. 부부를 동시에 구속하는 것을 지양해왔지만 그 관례가 깨진 것이라는 소식을 접했다. 한동안 양쪽 가슴이 무거운 것에 꾹 눌린 것 같았는데, 그제야 복잡한 것들을 가득 담은 한숨이 쉬어졌다. 자리가 넉넉하고 여유로운 버스 안에서였다. 나는 강릉으로 가는 길이었다. 정인이도 다 커서 바다를 볼 수 있었다면 좋았을텐데, 결국엔 참지 못했고 눈물이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