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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빛날현 Apr 19. 2024

(8) 아내 항암치료 vs 친구 계모임 여행


항암을 쉬는 일주일

남편이 퇴근 후 들어오는데

‘자!’하며 예쁜 박스가 담긴 비닐봉지를 건넸다.

열어보기도 전에 ‘자’라는 한 글자의 억양에

‘나에게 생색내고 싶어 하는구나’를 알아챘다.

(내가 누군가? 그 유명한 경상도 안동의 상남자가

날 능력자로 환생시키지 않았는가..ㅋ)

나는 기뻐하며 열어봤다.

떡이었다.

남편이 말을 이었다.

그거 줄 서서 사는 유명한 떡집이라고.

말투와 억양에서 생색을 느낄 수 있었다.

맞다! 영의정 떡집!


순간 띵했다~

암환자에게 떡 선물을.. 그것도 남편이..

위를 잘라내 유문이 없는 아내에게..

떡은 암환자가 먹을 수 없는 음식이라는 걸

모른다는 것 자체가 화가 났다.

하지만 난 화를 낼 수가 없었다.

맛있는 떡을, 그것도 사기 힘든 떡을,

사가지고 와서 아내에게 선물했다는

남편의 그 우쭐한 기분을~

괜스레 매일 아파하는 나로 인해서

망치고 싶지 않았다.

나는 맛있네 하고 먹고..

바로 화장실을 가면 그만이었으니까..


항암에 지쳐가고 있었다.

누가 봐도 우리 집은 예쁜 가정이었다.

아무도 내 속은 몰랐다.

아니 관심 따위 없었다.

이건 온전한 내 몫이란 걸..

난 모두가 행복해하는 공기 속에서 느끼게 되었다.


항암을 쉬는 일주일

하루는 남편이 물어볼 게 있단다.

어려운 얘기인 듯.. 어렵게 꺼내는 듯해서

무척 궁금했다.

날짜를 지정하며

그날 계모임에서 여행을 가는데

가도 되는지 알려달라고..

난 너~무 놀랐다.

혹시나 해서.. 날짜를 확인해 보니

항암 하는 기간이었다.

“나 항암 하는 기간이야”라고만 말했다.

듣고 남편이 말하길

“당신이 된다고 하면 가고, 안된다면 안 갈 거야”

라며 공을 나에게 넘겼다.

순간 머리가 멍했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다음날 아침,

선배언니하고 통화를 하게 됐다.

터지는 머릿속에 있는 고민거리가

자동으로 툭 튀어나왔다.

“내가 항암 하는 거 알면서

어떻게 나한테 놀러 가도 되냐고 물을 수 있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고 싶은 거네..

항암 중에 남편이 필요해?

꼭 있어야 하는 거 아니면..

남편 사랑하잖아” 선배언니가 대답했다.

쿨한 언니의 대답 ’ 남편 사랑하잖아 ‘가

이내 마음에 꽂혔다.


한 시간 정도 혼자 산책을 했다.

이때 나의 온전한 친구는 공기! 였다.

들숨과 날숨.. 의 반복..

남편에게 전화를 했다.

“엄마한테 오빠 출장 간다고

그날 와달라고 할 테니까 다녀와요~“

남편에 대답은 항상 짧다.

“응 알았어”

전화를 끊고 생각했다.

차라리 나한테 출장을 간다고 하지..

그런 거짓말을 했음 내 마음이 더 나았을까?..

공허했지만..

난 나의 몫을 하고 있노라고 위로했다.


그렇게 또 한 번의 항암을 하고

‘난 더 이상 이 상태로 살기 힘들다’가 아니라

이 상태로 살기가 싫어졌다.

막연히 대화사의 스님을 찾아갔다.

종교가 있는 건 아니지만

힘들 때마다 이 스님이 해주신 말씀이

도움이 됐기 때문이다.

(스님은 신혼 초 나에게 동네오빠처럼 직언을 해주신

, 우리 가정을 지켜주신 고마운 분이다 )


그냥 막연히.. 그냥 찾아갔다.

난 스님에게 물었다.

“스님! 제 사주가 명이 짧은 가요?

저 항암 안 하면 죽나요?”

나의 뾰족한 말투에서

나의 지쳐있는 생활을 보셨으리라..

스님은 내 눈을 뚫어져라 보시며 직언을 날리셨다.

“너 되게 고상하게 생겼어!

생긴 대로 살아~”

충격이었다.

무엇이 충격이었는지 말로 형언할 수 없지만

나를 들켜버린 것 같은 느낌이었다.

무언가를 억누르고 참으며 아둥바둥데는

초췌한 나를 보셨으리라..


목숨의 고비를 넘겨본 경험 탓일까?

난 곧바로 항암을 ‘나 스스로’ 중단했다.


남편은 안동의 계모임 친구들과

제주도에 2박 3일 놀러 갔다 왔다.

남편 친구들은 하나같이 다 좋은 친구들이다.

각 대기업에 임원으로 있으면서도

촌놈주제에 성공했다고 하며 열심히들 사시는..

다녀온 후로 남편의 얼굴이 밝아졌다.

우리의 생활에 활기도 돌았다.

얼마 후,

남편 친구들이 ‘네가 태어나 가장 잘한 일이

제수씨랑 결혼한 거라고’ 했다는 자랑을

우리 아빠한테 하는 남편을 볼 수 있었다.


보내주길 잘했다.

그간 힘들고 지쳤을 남편에게

힐링을 선물한 것 같아 뿌듯했다.

그리고 남편의 마음이 자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중학생남편! 이제 고등학교에 올라가려나?

이렇게 난 아픔을 통해 남편을 성장시키며

나 또한 성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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