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소연> 안녕바다
2022년 5월 20일
하이힐을 신고 산을 오르는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사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잘 차려입고 남자와 데이트를 하다가 재수 없게 산을 오르게 된 그들의 마음을 이해해야 했으니까. 내가 그 처지가 될 줄 알았다면 미리 생각해 봤어야 했다. 회사에서 퇴근하고 가파른 학교 언덕을 오를 줄 알았다면 하이힐이 아니라 운동화를 신었을 거다. 사실 하이힐은 언덕을 오를 때 평지를 걷는 듯한 느낌을 줘서 운동화보다 편하다. 다만 편하게 올라간 만큼 두 배로 힘들 내리막이 걱정될 뿐이었다.
내 마음과는 다르게 언덕 위 잔디밭에서는 축제가 한창이었다. 분명 술 판매가 금지되어 있을 텐데 술 냄새가 언덕 끝자락에서부터 풍기는 걸 보니 이번에도 음주 없는 '건전한' 축제는 실패한 듯했다. 과 부스로 가려면 잔디 언덕을 가로지르는 게 제일 빠른데 하이힐을 신은 졸업생은 정공법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잔디에 푹푹 빠지는 구두굽보다 또각거리는 구두굽 소리를 내는 편이 이목을 덜 이끌 터였다. 어떤 방법으로든 과 부스로만 가면 되는 거니까. 항상 과 부스 위치는 정해져 있었다. 맘만 먹으면 더 좋은 곳에 자리 잡을 수도 있을 테지만 과 홍보보다 친목이 우선인 문헌정보학과 분위기에 메인 부스 자리는 부담스러울 뿐이었다. 그런 문헌정보학과가 항상 고수하던 구석진 자리에 컴퓨터공학과 부스가 보였을 때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 여기 문헌정보학과 자리 아닌가요?"
"문정과 요? 문정과 가, A-17번이네요. 중도길로 가세요."
과 부스 지도를 살펴보던 컴퓨터공학과 부스 학생이 중앙도서관 앞을 가리키며 말했다. 중앙도서관 정문 앞 길은 축제가 아니더라도 학생들이 가장 많이 드나드는 곳이었다. 여길 부스로 잡았다고? 안 봐도 뻔하다. 분명 남재훈 작품이다.
그날 재훈이는 대야 안에 있던 설거지거리를 전부 처리하고선 당당하게 내 번호를 가져갔다. 가져갔다기보단 설거지에 내 번호를 판매했다고 하는 편이 나을 듯싶었다. 다음 날 복귀해야 한다며 설거지를 끝내자마자 사라진 재훈은 잊을만하면 나에게 전화를 했다. 강원도 지방 번호 전화라 처음에는 스팸인 줄 알고 안 받았더니, 나중에는 엄청 서운해했다. 귀찮아서 전화를 안 받을 때도 있었지만 그래도 대부분은 받으려고 했다. 군인의 유일한 낙을 훔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였다.
사실 귀찮기는 했지만 기다리지 않았다는 말은 아니다. 사람들은 으레 낯선 이에게 자기 속마음을 더 쉽게 푸는 법이다. 나에게는 재훈이가 그랬다. 고등학교 친구들에게 나의 고민은 좋은 대학교 들어간 이의 배부른 소리였고, 대학 졸업 후 다시 만날 일이 없을 사람들에게 내 이야기를 하고 싶지도 않았다. 어차피 근심 걱정 없는 깨발랄한 18학번 신혜리와 노래방은 가고 싶어도 아무도 술 한 잔은 하고 싶어 하지 않으니까. 재훈이도 결국 같은 처지였지만, 학교에서 딱 한 번 본 뒤로는 전화 통화로만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재훈이는 그저 내 대나무 숲 같았다. 한 달에 한 번 전화하는 비밀친구. 재훈이가 나를 좋아하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런 재훈이의 마음을 이용하는 것 같아서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지만, 설거지와 등가교환한 번호의 무게 정도는 감당하겠거니 싶었다.
재훈이는 제대 후 바로 복학을 했다. 나는 3학년, 재훈이는 1학년 새내기. 으레 군제대 복학생들이 1학년을 사귀는 과정을 거치니 나에 대한 마음도 당연히 식을 거라 생각했다. 코로나 사태로 나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질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대학 출입이 금지되었고, 모든 것을 스스로 해야 했다. 멀쩡한 캠퍼스를 놔두고 사이버 대학처럼 줌 강의를 하는 시대였다. 그 와중에 재훈은 선배지만 신입생이기도 해서 학교의 서비스 안내에 배제된 고립된 섬 같았다. 수강 신청도 할 줄 몰랐고, 홈페이지에 띄어진 교수님들의 얼굴과 이력, 수업 커리큘럼이 재훈이 아는 것의 전부였다. 캠퍼스 생활을 꿈꿨을 재훈의 절망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그런 재훈의 매달림은 종류도 다양했다. 수강신청 실패했다, 이 전공 수업 안 하면 안 되냐, 전공 수업 족보가 필요하다, 시험 보러 학교 왔는데 맛집이 어디냐 등등. 핑계도 많았다. 번호를 넘긴 나의 업보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그게 귀여워 보였다. 귀여워 보이면 안 됐다. 귀여움에는 거절 버튼이 없으니까.
코로나 이후로 처음 여는 축제여서 그런지 내가 알고 있던 여느 축제보다는 어수선했다. 동아리 부원을 모집하는 외침이 마스크를 거쳐 뭉개지듯 웅얼거렸다. 간간히 교양수업에서 보았던 친구들이 정장 차림으로 부스에 서 있는 것도 보였다. 축제를 어떻게 하는지 모르는 후배들의 간절한 외침을 외면할 수 없었으리라. 재훈이 몇 차례 조르며 전화를 해댔으니, 다른 졸업생들 사정이 어땠을지는 안 봐도 뻔했다. 하지만 그런 어수선함 사이에도 술잔을 부딪히며 내는 묘한 소음들은 여전했다. 코로나로 같이 밥도 잘 먹지 않았으니 서로 조심하는 축제가 될 줄 알았더니만, 오히려 서로 연결되고자 하는 사람들의 욕구를 폭발시켜 버린 듯했다.
중앙 도서관 길 한가운데에 있는 문헌정보학과의 부스는 생각보다 찾기 쉬웠다. 아니, '발견됐다'라는 표현이 더 옳을 정도였다. 문헌정보학과 최대 아웃풋이라 일컫는 두 명, 유튜버 매정남과 양궁 선수 최지훈의 얼굴들을 부스 전체에 붙여놨으니. 저 또한 인터넷 중독자 재훈의 작품이겠지. 부스 앞에 도착하자 잔뜩 신이 난 재훈이가 맥주캔을 후배들에게 돌리는 모습이 보였다. 후배들의 손목에는 마스크가 하나씩 장식처럼 걸려 있었다.
"얘들아, 원샷이다!"
"위하여!"
재훈의 외침에 맥주캔을 비우는 후배들의 모습이 왠지 낯설게 느껴졌다. 맥주를 마시던 후배들 중 몇은 나를 발견하고서는 고개를 갸웃거렸고, 몇몇은 나에게 목례로 인사를 건넸다. 후배들의 모습에 재훈도 뒤로 돌아 나를 발견했다.
"오, 왔어? 얘들아. 인사해. 너희들의 18학번 선배이자 내 여자친구."
"오오오오! 안녕하십니까!"
앳된 얼굴의 남자애들의 부담스러운 외침이 이어졌다. 좋을 것도 나쁠 거도 없었다. 어차피 졸업한 사람이고 인사만 하면 그만. 그저 하이힐을 벗어던지고 싶었을 뿐이다.
"언제 갈 거야?"
"글쎄 잘 모르겠는데. 일단 여기 앉아. 내일 출근 안 하지?"
재훈은 본인 테이블 건너편에 있는 편의점 플라스틱 의자를 드르륵 끌어내더니 맥주 하나를 내 손에 쥐어줬다. 그래, 배려 고맙다. 의자에 앉으려는데 갑자기 허벅지에 힘이 풀리면서 자세가 무너졌다. 손쓸 틈도 없이 의자에 풀썩 내려앉으며 몸이 뒤로 젖혀졌다. 의자가 내 체중을 이기지 못하고 뒤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이대로 가다간 처음 보는 후배들 앞에서 꼴사납게 발라당 넘어질 판이었다. 그러다 갑자기 몸이 앞으로 쏠리며 의자가 제자리를 찾았다. 뭔가 싶어 뒤를 돌아보니 18학번 동기, 결이가 우두커니 서 있다. 군대 간다고 했던 거 같은데, 벌써 제대를 한 모양이다.
"조심해. 빠져가지고."
"아니거든."
"쟤 좀 빨리 데리고 나가라. 어우 정신 사나워. 혼자 신나서 난리 났네."
"좀 쉬었다가. 제대는 언제 했어?"
"2월에. 제대하고 바로 복학했어. 너는. 회사는 어떠냐."
"대학에서 선배라고 어깨 피고 다니던 거 다 없어졌어. 나 지금 복사기랑 제일 친해. 선배 놀이 너무 즐기지 마라. 회사 가서 힘들다."
"내가 언제 그런 거 즐겼다고. 일단 기말이나 신경 써야지."
"그러네. 너 원래 이런 거 안 나오잖아. 오늘은 웬일이냐."
"너 온다니까 얼굴 보러 온 거지."
"재훈이가 그래?"
"재훈이 말고 그런 거 말할 사람 있냐."
나는 계획에도 없던 모교 방문이 언제부터 정해져 있던 건지 모르겠다. 회사 끝나고 와달라고 사정을 하더니만, 떠벌린 말 때문이었나 보다. 부어버린 종아리를 차가운 맥주캔으로 문지르며 재훈이를 살펴봤다. 테이블 옆에 쌓여있는 빈 캔의 숫자만큼 몸이 흐트러지고 있었다. 내가 있다는 건 또 까마득히 잊어버린 채로. 언제 끝나려나, 한참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는데 재훈이가 두리번거리더니 나를 발견하고는 흐느적거리는 팔자걸음으로 다가왔다. 드디어 갈 마음이 들었구나.
"혜리야. 우리 술 좀 사다주라. 술이 얼마 안 남았다네. 정문 앞 슈퍼 가서 학과 이름 말하면 가져올 수 있거든? 나중에 한꺼번에 계산하기로 했으니까 돈 안 내도 돼. 그냥 가져만 와 줘. 응? 너 차 가져왔지?"
내 대답을 듣기도 전에 재훈은 내 손에 있던 맥주캔을 다시 가져가더니 테이블로 돌아갔다. 돌아가는 재훈의 뒤통수에 대고 담배 연기를 내뿜듯 한숨을 내쉬었다. 아빠가 첫 취직을 축하한다며 작은 경차를 중고로 사주셨는데 그 차 얘기다. 가끔 재훈이랑 주말 데이트로 드라이브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때 분명 얘기했는데. 출퇴근길 너무 막혀서 차 안 끌고 다닌다고. 몇 번을 얘기했는데 그새 잊어버리고 또 차 타령인 거다. 당장에 재훈이를 불러 세워 훈계라도 하고 싶었지만 내세우지도 않던 선배 체면이 뭐라고 입술만 달싹거리고 있었다. 그때, 팡하며 바닥에 뭔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 옆을 쳐다보니 웬 핑크색 줄무늬 슬리퍼 한 켤레가 뒹굴고 있다.
"다리 그만 문지르고 갈아 신어. 후배한테 빌렸으니까 이따 돌려줘야 한다. 하이힐 그거 뭐 좋다고 여기까지 신고 오냐."
결이가 한 마디 내뱉는다. 짐짓 눈인사로 감사를 표하고 신발을 갈아 신으며 슬쩍 볼멘소리를 뱉었다.
"여기 올 줄 알았으면 힐 안 신었지."
"뭐야, 너 여기 오기로 한 거 아니었어?"
"됐어, 신경 꺼. 그나저나, 복학생씨? 밑에 슈퍼에서 술 좀 갖다 달라는데. 끌차 있습니까?"
"그걸 왜 너한테 가져오래. 짝으로 가져오는 건데. 있어 봐. 같이 가. 나 차 가져왔어. 금방 키 가져올게."
"괜찮은데."
결이는 손을 한 번 휘젓더니 이내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결이가 어디 있나 눈으로 좇기를 포기하고 건너 테이블에서 신나게 후배들과 술을 마시는 재훈을 바라봤다. 신이 난 재훈이와 다르게 몰래 쓰레기통에 술을 버리고, 물병에 술을 뱉어내는 후배들의 모습이 보인다. 후배들이 저러는 걸 알고서도 신이 난 걸까? 뭐가 옳은 지는 나도 모르겠다. 그저 눈을 감아봤다. 내 번호를 달라던 재훈의 미세하게 떨리는 목소리를 기억한다. 화장실 너머 본관을 가득 채운, 온갖 용기를 짜낸 것 같은 그 목소리가 귀여워 처음 만난 남자에게 설거지를 핑계로 내 번호를 줬었다. 재훈이는 원래 저런 사람이었을까, 아니면 내가 귀여워했던 재훈이가 진짜일까.
"야, 자지 마."
결이가 나를 툭 치며 불렀다. 눈을 뜨고 소리가 난 곳을 돌아보니 결이가 차 열쇠를 들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허리를 굽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너 힐은 애들한테 맡겨 놓을까?"
의자 옆에 가지런히 놓인 힐을 가리키며 결이가 물었다.
"아냐. 가져갈래. 술 배달하고 나면 나 지하철역까지 태워 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