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바다와강 Dec 13. 2024

너를 부르마 / 불러서 그리우면 사랑이라 하마

정희성의 〈너를 부르마〉

너를 부르마

너를 부르마
불러서 그리우면 사랑이라 하마
아무데도 보이지 않아도
내 가장 가까운 곳
나와 함께 숨 쉬는 공기(空氣)여
시궁창에도 버림받은 하늘에도
쓰러진 너를 일으켜서
나는 숨을 쉬고 싶다.
내 여기 살아야 하므로
이 땅이 나를 버려도
공기여, 새삼스레 나는 네 이름을 부른다.
내가 그 이름을 부르기 전에도
그 이름을 부른 뒤에도
그 이름을 잘못 불러도 변함없는 너를
자유여.
     ― 《창작과 비평》 1975

   

열흘 전부터 온 나라가 팥죽처럼 들끓고 있다. 난 2024년에 내 나라, 내 집에 앉아, 무장한 군인들이 국회에 난입하는 것을 티비로 볼 줄 몰랐다. 온몸이 떨리고 숨이 막혔다. 무섭고 두려웠다. 손에 일이 잡히지 않아 힘들었다. 쉽게 잠들지 못했고, 마음을 놓을 수 없어 내내 긴장상태다. 일상의 한 축이 무너져 내렸다. 문제는 이제 시작이라는 거다. 나는 내가 태어났고, 앞으로도 살아갈 내 조국의 평안을 염원한다.


요즘 들어 대학시절에 즐겨 읽었던 정희성의 시가 자주 생각났다. 정희성은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숲〉, 〈김씨〉 등의 시를 쓴 197,80년대 시인이다. 위에 인용한 〈너를 부르마〉는 창작집 《저문 강에 삽을 씻고》(창작과비평사, 1978)에 실렸다. 이 시는 노래로도 불렸던 적이 있어 아마도 가사가 귀에 익은 사람들도 있을 게다.


우리는 공기처럼 항상 내 곁에 있는 것들의 고마움을 자주 잊는다. 가족이나 오래된 친구, 연인을 더이상 특별히 대하지 않는다. 때때로 험한 말로 상처주기도 하고, 더이상 그들에게 안부를 묻지도 고마움을 표현하지도 않는다. 그 이유는 아마도 내가 무슨 짓을 해도 그들은 늘 내 편일 거라는 굳건한 믿음 때문일 게다. 그러나 영원한 건 절대 없다. 무례하면, 상식에 맞지 않으면, 더이상 내 편이 아니면 떠나보내야 한다. 내 편이라면 최선을 다해 그(그것)들을 지키고 사랑해야 한다.


내가 최선을 다해 지켜야 할 것 중 하나가 '자유'. 내가 내 의지로 어떤 것을 할 자유, 어떤 강제도 억압도 없이 자유롭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할 자유 말이다. 두 다리 쭉 펴고 아무 걱정 없이 살아갈 자유. 내 곁에 있는 게 너무도 당연해서 의식하지 못하던 자유는 외부에 의해 제한될 때에야 비로소 그 존재가치를 강력하게 드러낸다. 그러나 평온하게 유지되던 내 자유로운 일상은 그 누구도 함부로 개입하거나 침해할 수 없다.  


내가 그 이름을 부르기 전에도 / 그 이름을 부른 뒤에도 /
그 이름을 잘못 불러도 변함없는 너를 / 자유여.



"대한민국의 모든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대한민국 헌법 1조 2항이다.


법없이도 잘만 살아가는 선량한 국민들이 왜 자꾸 이 문장을 되뇌여야 하는지 모르겠다. 참 답답하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내 아이를 지키기 위해, 자유를 지키기 위해, 이 나라에 살기 위해 우리는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주권을 행사해야 한다.  

 

언젠가부터 내가 바라는 가장 강렬한 소원은 지루하고 심심한 일상이 반복되는 것이다.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 오늘도 어제처럼 심심하게 지나가는 것, 내가 예상한 대로 내 서사가 뻔하게 흘러가는 것이야말로 값진 행복이다. 난 아침마다 출근하기 싫어 꿍얼거리고, 주말엔 리모컨을 손에 쥔 채 한껏 게으름을 피우고, 친구와 따뜻한 밥 한 끼 먹으며 수다떠는 소소한 즐거움을 늙도록 누리고 싶다. 이 추운 겨울날 광장으로 나가지 않아도, 굳이 거창한 역사나 자유를 외치지 않아도 그것들이 늘 내 곁에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으며 평화롭게 하루하루를 살고 싶을 뿐이다.  ♣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