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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와강 Dec 20. 2024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박완서의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못 가본 길에 대한 새삼스러운 미련은 노망인가, 집념인가


박완서의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는 같은 제목의 산문집(현대문학, 2010)에 실린 첫번째 글이다. 작가의 자전적 스토리가 담긴 이 글에서 작가는 꽃다운 나이 스물, 전쟁 때문에 꿈에 그리던 대학생활을 해보지 못한 아쉬움에 대해 썼다. 당시 학제는 6월에 신학기를 시작했다고 하니, 작가가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한달도 되지 않아 전쟁이 난 것이다. 어쩌면 이토록 가혹한 운명이 있을까.


이 글은 작가의 나이 팔십에 다. 사람은 여든 살이 되어도 자신이 가보지 못한 길에 대한 미련과 아쉬움을 끝내 떨쳐내지 못하는 모양이다.



인생은 갈등과 선택의 연속이다. 어른들은 어린아이를 앉혀놓고 항상 엄마가 좋으냐, 아빠가 좋으냐를 묻는다. 아이가 미간을 찌푸리고 답을 고민하는 그 짧은 고뇌의 순간이 귀여워서 그러는지, 아니면 어른의 우문에 아이가 어떻게 대처하는지를 보려고 그러는지, 그건 잘 모르겠다. 그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아이들은 선택과 결정의 어려움, 결과에 대한 책임 등을 느끼지 않았을까. 아이로 사는 것도 참 만만치 않네, 하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자란 아이는 고등학생이 되고 문과와 이과 중 하나를 골라야 했다. 대학을 진학하고, 직장을 구하고, 연인을 만나는 것까지 모두가 선택이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하는 사소한 선택부터, 인생의 국면마다 미래를 좌우하는 중요한 선택까지, 모든 선택은 무심하고 단호하다. 전적으로 내 책임이다. 고백을 할지 말지, 결혼을 할지 말지, 아이를 낳을지 말지, 직장을 옮길지 말지, 이사를 갈지 말지... 산다는 건 결국 선택의 연속. 그 선택들이 결국 지금의 당신을 만들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나 역시 무수한 선택을 해왔고, 결정적인 순간마다 난 장고 끝에 최선의 선택을 해왔다고 자부한다. 그러나 그땐 그게 최선이었겠지만, 지금 와 돌이켜보면 과연 그때 그 선택이 옳았나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내가 버린 패가 사실은 최고의 카드였는지도 모른다. 그때 내가 다른 대학에 갔다면, 다른 사람을 만나고, 다른 직장을 선택했더라면 어땠을까.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을까. 난 어떤 생을 살았을까.


내가 선택하지 않은 길에 대한 아쉬움은 누구에게나 있다. 짜장면을 시키면 늘 다른 사람이 시킨 짬뽕이 맛있어 보인다. 버스가 늦을 것 같아 전철을 타면 그날따라 전철은 연착되고 서행한다. 점심 식사를 위해 단골집을 갈 것인지 새로 생긴 밥집을 갈 것인지 늘 망설인다. 내비게이션의 안내를 따라야 할지 무시해야 할지 고민할 때도 있다. 살면서 그때그때 난 가장 합리적인, 아름다운 길을 선택했다 생각하지만, 먼훗날도 그렇게 생각할지는 모르겠다.


가지 않은 길

노란 숲 속에 길이 두 갈래로 났었습니다.
나는 두 길을 다 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오랫동안 서서 한 길이 굽어 꺾여 내려간 데까지,
바라다볼 수 있는 데까지 멀리 바라다보았습니다.

그리고, 똑같이 아름다운 다른 길을 택했습니다. (중략)

훗날에 훗날에 나는 어디선가
한숨을 쉬며 이야기할 것입니다.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하였다고,
그리고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 Robert Frost, 〈The Road Not Taken〉


 내가 당초에 되고 싶었던 건 소설가가 아니었다.


막 대학 문턱에 들어선 초년생에게 대학은 진리와 자유의 공간이었고, 만 권의 책이었고, 그 안에 숨어 있는 아름다운 문장이었고, 지적 갈증을 축여줄 명강의였고, 사랑과 진리 등 온갖 좋은 것들이었다. 나는 그런 것들로 나만의 아름다운 비단을 짤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막 베틀에 앉아 내가 꿈꾸던 비단을 한 뼘도 짜기 전에 무참히 중턱을 잘리고 말았다. 전쟁은 그렇게 무자비했다.

그래도 나는 살아남았으니까 다른 인생을 직조할 수도 있었지만 내가 당초에 꿈꾸던 비단은 아니었다. 내가 꿈꾸던 비단은 현재 내가 획득한 비단보다 못할 수도 있지만, 가본 길보다는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다운 것처럼 내가 놓친 꿈에 비해 현실적으로 획득한 성공이 훨씬 초라해 보이는 건 어쩔 수가 없다.


박완서는 40에 등단해 작가적 역량을 인정받고 한국의 대표 작가라는 현실적 성공을 거두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작가적 성공(획득한 비단)이 '놓친 꿈'(꿈꾸던 비단)에 비해 초라한 모양이다. 어쩌면 작가가 자의로 선택한 것(안 가본 길)이 아니라 외적으로 강제된 선택(못 가본 길)이었기에 미련과 아쉬움이 더 클 것 같다.


내가 스스로 선택하지 않은,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도 두고두고 가슴에 사무치는데, 하물며 염원했으나 결코 갈 수 없었던, 못 가본 길에 대한 아쉬움은 얼마나 클 것인가. 팔십이든 구십이든 죽는 날까지 마음 한켠에 텅빈 동굴을 안고 살았을 것 같다.


2006년 5월, 박완서는 그토록 다니고 싶었으나 못 가본 자신의 모교 서울대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다. 1931년생의 작가가 2006년에 학위를 받았다 하여 평생 가슴에 한으로 남은 그의 지난날을 위로하고 보상할 수 있었을까. 그래도  작가는 박사 수여식 답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살다보니 이런 일도 있구나, 작은 기적처럼, 또는 오랫동안 뒤통수만 보고 흠모하던 이가 뒤돌아보며 따뜻한 눈길을 보내준 짜릿한 기억처럼, 저 혼자만의 밀실에 두고 삶이 진부하고 지루해질 때마다 꺼내보고 위안을 삼겠습니다.  


위의 글 중 "오랫동안 뒤통수만 보고 흠모하던 이"라는 구절에 울컥한다. 짝사랑이 깊어지면 상처가 되고, 더 심해지면 병이 된다. 못 가본 길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오랫동안 힘들었을 작가의 손을 꼭 잡아주고 싶다.


누구에게나 로버트 프로스트처럼, 가보지 않은 길이 있다. 박완서처럼, 못 가본 길도 있다. 그것이 무엇이든 내가 경험하지 못한, 갖지 않은 것에 대한 욕망과 미련은 남는 법이다. 실패한 꿈은 잊히지 않는다. 하물며 시도조차 못한 꿈은 영원히 마음속에 불멸로 남을 것이다. 그러나 달리 생각하면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았기에 훼손되거나 오염되지 않고 여전히 아름답게 기억되듯이, '못' 가본 길이기에 신비한 아름다움으로 남아 있는 건 아닐까 싶기도 하다.





◎ 글을 쓰기 위해 오래 전에 읽었던 이 책을 다시  꺼내들었을 때, 활자보다 먼저 마중나온 건 책갈피마다 끼워둔 마른 단풍잎들이었다. 14년 전 가을, 난 무슨 마음으로 단풍잎들을 주워 집에까지 들고 왔을까. 하고 많은 책 중에서 하필 이 책에 끼워 두었을까. 이쁘게 마른 단풍잎을 들여다보며 과거의 나와 잠시 조우한다. 잘해쓰! 그날 내 선택에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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