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바다와강 Dec 06. 2024

작은 엽서처럼 네게로 갔다. 봉투도 비밀도 없이

진은영의〈봄여름가을겨울〉


봄여름가을겨울
                                                 
  작은 엽서처럼 네게로 갔다. 봉투도 비밀도 없이. 전적으로 열린 채. 오후의 장미처럼 벌어져 여름비가 내렸다. 나는 네 밑에 있다. 네가 쏟은 커피에 젖은 냅킨처럼. 만 개의 파란 전구가 마음에 켜진 듯. 가을이 왔다. 내 영혼은 잠옷 차림을 하고 돌아다닌다. 맨홀 뚜껑 위에 쌓인 눈을 맨발로 밟으며


이 시는 진은영의 시집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문학과지성사, 2022)에 실렸다. 짧은 시에 담긴 화자의 사랑은 솔직하고 용감하고 강렬하다.


당신을 얼마나 사랑해야 이렇게 숨김도 꾸밈도 없이, 모든 것을 활짝 열어젖힌 채 다가갈 수 있을까. 마음에 만 개의 파란 전구를 켜고, 잠옷차림의 영혼이 맨발로 눈을 밟으며 다가갈 수 있을까. 완벽히 무장해제된 상태로, 오로지 당신만 보고 직진할 수 있을까. 부끄러움도 내숭도 없이 당신에 대한 내 사랑을 어떻게 이렇게 만천하에 공표할 수 있을까.


사실 사랑은 너무 뜨거워 오래 감춰둘 수가 없다. 사랑하면 단순해지고, 부드러워지고, 착해지고, 때로는 용감해진다. 온몸이 액체로 변해 당신에게로만 흘러간다. 내 삶은, 온 세상은 당신 중심으로 돌아간다. 당신의 눈짓 하나에 난 활화산에서 빙하까지를 수시로 오간다. 당신은 내 기쁨과 슬픔의 근원이다. 당신은 나의 하루 24시간이고, 나의 봄, 나의 여름, 그리고 가을과 겨울이다.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다는 건 행복한 일이다. 그래서인가, 이런 연시(戀詩)를 읽으면 마음이 말랑말랑해진다. 내 마음에도 파란 전구가 켜진 듯, 온세상이 환해진다. 사랑시는 시 읽는 사람의 마음까지 따뜻하게 물들이나 보다.    ♣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