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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와강 Nov 29. 2024

1인칭과 3인칭 사이에 '너'가 있다

김훈의 《허송세월》


1인칭과 3인칭 사이에 '너'가 있음으로써 인간은 복되다.

1인칭과 3인칭 사이에 '너'가 있음으로써 인간은 복되다. 3인칭을 2인칭 '너'로 변화시켜서 끌어당기는 몸과 마음의 작용을, 쑥스럽지만 '사랑'이라고 말해도 좋다.


김훈의 산문집 <허송세월>(나남, 2024) 중의 한 구절이다. 이상하게 김훈의 글은, 소설은 물론이고 산문까지 챙겨읽게 된다. 솔직히 그의 산문은 친절하지도, 재미있지도 않다.


그럼에도 그의 글이 새로 나올 때마다 읽지 않을 수 없는 이유는 그의 문장 때문이다. 이번 산문집에도 집요하고도 시니컬한, 그러면서도 왠지 헛헛하게 공중에 흩어지는 문장들이 가득했다. 문체는 그동안 그가 적립한 사유의 시간만큼 한층 깊어진 것도 같다.



인용한 글은 《허송세월》3부에 실린 <박경리, 신경림, 백낙청 그리고 강운구-강운구 사진전 "사람의 그때"를 보면서>에서 가져왔다. 글은 강운구의 사진전 <사람의 그때>(2021)소감을 정리한 것이다. 사진에 문외한인 나도 강운구, 이름 석자는 안다. 언젠가 강운구의 흑백 인물사진들을 보고 감탄하여 그의 이름을 각인해 두었기 때문이다.


김훈이 전시회는 2021년 부산 고은사진미술관에서 열린 전시회로, 현대 한국의 문학인과 화가 160명의 얼굴 사진이 걸려 있었다고 한다. 김훈은 강운구의 인물사진들을 보며 3인칭 문장 쓰기의 어려움을 토로한다.


'나'를 주어로 문장을 쓸 때는 정직하기가 어렵고, 또 반대로 정직을 내세워 뻔뻔스러워지지 않기가 어렵고, 수다떨지 않기가 어려운데, '그'를 주어로 문장을 쓰자면 '나'로부터 '그'로 건너가기가 어렵다. (중략) 글에서나 사진에서나 1인칭만으로는 세상을 구성할 수가 없다. '나'가 물러서므로 3인칭은 겨우 드러난다.


어디 글과 사진뿐이랴. 인간의 삶도 1인칭만으로는 쓸쓸하다. 3인칭들의 그(그녀)들이 곁에 있어야 복닥이고 북적거리고 살아갈 수 있다. 그러다 어느날, 그 무수한 3인칭(그 혹은 그녀) 중 어느 하나가 상대를 끌어당김으로써 그 혹은 그녀는 비로소 2인칭(너)이 된다. "3인칭을 2인칭 '너'로 변화시켜서 끌어당기는 몸과 마음의 작용을, 쑥스럽지만 '사랑'이라고 말해도 좋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2인칭이 되어, 그 '너'를 나의 또다른 자아인 것처럼 애지중지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세월은 야속하고 무정한 것. 시간의 농간으로 우리는 일심동체라는 착각에서 깨어나고 2인칭 '너'는 다시 저 멀리 3인칭으로 멀어진다. 그러다 몇몆은 끝내 '남남'으로 살아갈 수도 있는 것, 그게 인생이다.


김훈은 맨 마지막 글 <새와 철모>에 이런 말을 썼다.


나는 공적 개방성을 갖춘 글 안에 많은 독자들을 맞아들이려는 소망을 갖지 못한다. 나는 나의 사적 내밀성의 순정으로 개별적 독자와 사귀고, 그 사귐으로 세상의 목줄들이 헐거워지기를 소망한다. 글을 써서 세상에 말을 걸 때 나의 독자는 당신 한 사람뿐이다. 나의 독자는 나의 2인칭(너)이다.


아! 나에게 이 글은 그 어떤 프로포즈보다 매혹적이었다. 이 글을 읽는 순간 나는 김훈과 사적 내밀성으로 연결되고, 나의 그의 2인칭이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와 대화하는, 그의 단 하나뿐인, 특별한 독자가 되었다. 질투가 날 정도로 강렬한, 사람을 매혹하는 문장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이미 그의 2인칭이 되었으므로, 앞으로도 김훈의 새 책이 나올 때마다 설레며 찾아 읽게 될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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