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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끝났고 내일은 멀었고 오늘은 모른다

tvN 드라마 〈미지의 서울〉

by 바다와강

〈미지의 서울〉은 2025년 5월 24일부터 tvN에서 방영하는 주말 드라마다. 총 12부작으로 현재 10회까지 방영했고, 이번주 마지막 2회를 남겨두고 있다. 박신우 연출, 이강 극본, 박보영과 박진영이 주연한 이 작품은, "얼굴 빼고 모든 게 다른 쌍둥이 자매가 인생을 맞바꾸는 ‘거짓말’로 ‘진짜’ 사랑과 인생을 찾아가는 로맨틱 성장 드라마"다. 현재 넷플릭스 드라마 부문 2위에 오른 이 작품은 10회(2025.6.22) 시청률 7.7%를 기록했다.


〈미지의 서울〉 공식 홈페이지에 올라온 이 작품의 기획의도는 다음과 같다.


내 삶은 이렇게나 꼬여 있는데,
타인의 삶은 참 단순하고 쉬워 보일 때가 있습니다.
내가 저 외모였으면, 저 조건이었으면, 저 성격이었으면...
인생이 지금보단 쉽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을 하게 되지요.

그러나 막상 누군가의 삶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저마다의 아픔과 고난을 가진,
그저 행복하기 위해 치열하게 애쓰는
나와 똑같은 사람이라는 걸 깨닫고
비로소 사랑과 연민으로 그 사람을 바라보게 됩니다.


맞다. 우리는 종종 자신의 삶은 비극으로, 타인의 삶은 희극으로 이해한다. 끝없이 타인과 자신을 비교하고, 타인이 가진 것을 탐하고 질투한다. 나만 빼고 세상 사람들 모두가 행복한 것 같다. 그러나 정작 입장을 바꿔 보면, 내가 부러워하던 타인들도 사실은 저마다의 고통과 아픔을 지니고 사는 게 나와 별반 다르지 않다. 서로가 속속들이 잘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의외로 서로에 대해 모르는 부분도 많다. 그러니 차라리 내가 아는 게 전부는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이해해야만 진정한 인간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것 같다.


내가 너로 살게, 너는 나로 살아


서른살의 쌍둥이 미래와 미지.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는 두 사람은 어느날 서로의 삶을 바꿔 살기로 한다. 완벽한 일란성 쌍둥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동병 아니면 상련할 수 없다. 자리를 바꿔야, 같은 자리에 서봐야 비로소 보이는 것도 있고,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있다.


쌍둥이의 언니 미래는 서울의 공기업에 다니며 집안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다. 동생 미지는 전도유망한 달리기 선수였지만 부상으로 인해 생의 목표를 상실하자, 3년간 칩거생활을 하다 최근에야 겨우 벗어난 인물이다.


미지와 미래는 박보영이 1인 2역을 맡았다. 예전에도 박보영 연기가 참 좋다고 생각했지만, 이번 드라마에서 그녀 연기는 절정에 오른 듯 빛났다. 쌍둥이가 대화하는 장면에서조차 두 인물을 한 사람이 연기하고 있다는 생각이 별로 들지 않을 정도였으니.


어제는 끝났고 내일은 멀었고 오늘은 아직 모른다


이 말은 미지의 할머니가 미지에게 해주신 말로, 회차가 거듭될수록 반복된다. 지나간 일은 걱정해 봤자고, 아직 오지 않은 일은 미리 걱정할 필요없다, 게다가 오늘은 어떻게 될지 모르지 않냐는 얘기. 과거도 미래도 중요하지 않다면, '지금', 현재가 가장 중요할 텐데 그 역시 알 수 없다니, 그럼 우린 어떻게 살아야 하나. 그냥 손놓고 흐르는 강물처럼 시간의 흐름에 모든 것을 맡기면 되나.


이 말은 결국 걱정해도 안해도 어차피 인생이란 알 수 없는, 미지의 것, 너무 조급해하거나 아둥바둥 살지 말라는 메시지일 것이다. 그냥 오늘만 살면 된다. 거창하거나 비장해지지 말고, 그저 가볍게 오늘만 버티자는 생각으로 살자. 또 살다보면 남에게는 너그러우면서도 유독 자신에게만큼은 가혹하고 모질게 구는 경우가 있는데 그러지 말자. 어차피 오늘밖에 없는 인생, 그조차도 알 수 없는데 자신을 너무 다그치지 말라는, 그러지 않아도 살만하다는 격려와 위로를 담고 있다.


드라마 제목에 '미지'가 들어갔으니, 이 작품의 주인공은 '미지'일 것이다. 미지는 '알 수 없음'. 오늘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고, 인생 역시 알 수 없는 미지의 영역이다. 게다가 미지는 이제 서른살. 미래와 호수, 경구 모두 서른살이다. '서른'이란 참 난감한 나이다. 바람빠진 축구공을 보면서도 자신의 신세와 동일시하는 애처로운 나이. 다음은 바람빠진 축구공을 발로 누르면서 미지가 하는 말이다.


얘는 바람이 빠져서 버려진 걸까?
버려져서 바람이 빠진 걸까?
난 이 모양이라 이렇게 사는 걸까?
이렇게 살아서 이 모양인 걸까?


다들 잘살고 있는 것 같은데 나만 바람빠진 축구공마냥 운동장 구석에 처박혀 있는 듯한 느낌. 누구 탓할 수도 없다. 모든 게 다 "내 탓"으로 귀결되는 냉정한 세상. 돌아보면 나의 서른도 그랬던 것 같다. 나 역시 서른이 되기 전에는 막연하게 '서른'이란 나이 그 자체가 두려웠다가, 정작 서른이 넘자 어른이 되고도 아무것도 아닌, 어리버리한 내가 부끄러웠고 계속 이렇게 살까봐 두려웠었다.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 살은 온다
시큰거리는 치통 같은 흰 손수건을 내저으며
놀라 부릅뜬 흰자위로 애원하며 (하략)
― 최승자의 〈삼십 세〉 중에서


한국사회에서 '서른'은 참 불안정한 나이다. '어른'으로 무언가 삶의 방향을 정하고 힘차게 나아가야 할 때인 것 같지만, 여전히 눈앞은 뿌옇다. 미래는 보이지 않는다. 남들에 비해 난 아직 한참 부족하고 모자라고 찌질한 것 같다.


결핍이란 정신을 사로잡는다. 배고픈 사람들이 오로지 음식만을 가장 우선적으로 생각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어떤 종류의 결핍을 경험할 때마다 그 결핍에 흡수되어 버린다. (중략) 결핍은 어떤 것을 매우 적게 가질 때의 불쾌함 그 이상이다. 결핍은 사람이 생각하는 방식을 바꾸어 놓는다. 결핍은 사람의 정신을 그 자신의 무게로 무겁게 짓누른다.
― 센딜 멀레이너선·엘다 샤퍼의 《결핍은 우리를 어떻게 변화시키는가》 중에서


결핍을 반복적으로 의식하다 보면 모든 것을 객관적으로 생각하거나 판단하기 어렵다. 타인은 타인일 뿐, 그들과 나를 비교하지 말자,고 생각해도 어느 순간 끝없이 곁눈질하며 상대평가하고 자신을 평가절하하고 자조와 자학에 빠지게 된다.


미지도 그런 인물이다. 엄마도 언니도 친구도 동네사람들도, 미지에게는 그 어떤 기대와 희망도 품지 않는다. 그래도 미지 곁에서 미지를 응원하고 용기를 북돋아주는 단 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할머니다. 미지에게 할머니라는 어른이 계셔서 참 다행이다.


이 드라마를 호평할 수 있는 또다른 요인은 긍정적 인물들을 곳곳에 포진해 놓았다는 점이다. 미지의 할머니를 비롯, 미지의 첫사랑 이호수, 늘 긍정적이고 다정한 언행을 유지하는 염분홍, 미지의 전남친이자 현재 절친인 송경구, '미래'의 불안과 상처를 이해해 주는 한세진 등 특별하지도 잘나지도 않은 인물들이 툭툭 던지는 위로의 말들이 미지나 미래는 물론 시청자들의 마음도 따뜻하게 어루만지는 듯하다.


암만 모냥 빠지고 추저분해 보여도
살자고 하는 짓은 다 용감한 거야


드라마는 삐그덕거리는 모녀관계, 자매 간 갈등, 동창들의 사랑과 우정, 책임과 의무, 히키꼬모리, 법과 정의 등 많은 스토리들을 한 그릇에 담았는데도, 마치 달인의 비빔밥마냥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어느 것 하나 겉돌지 않았다. 극중에서 다양한 인물들이 싸우고 오해하고 토라지고 욕하는 것, 계획하고 무너지고, 다치고 포기하는 것, 그것들이 때로는 "모냥 빠지고", 때로는 "추저분해" 보여도 사실은 다 살자고 하는 용감한 짓이기 때문이다. 탄탄한 서사와 인상적인 대사, 그리고 인물의 내면까지 고려한 섬세한 연출, 배우들의 열연 역시 조화로워 보기 편했다.


내가 나라는 이유로 누구보다 가혹했던 숱한 나날들
사슴도 소라게도 모두 살아남으려 애쓰는데
왜 인간은
왜 나는
날 가장 지켜야 할 순간에 스스로를 공격하는 걸까?
남이 되어서야 알았다.
나의 가장 큰 천적은 나라는 걸


결국 미래는 '미지'로, 미지는 '미래'로 살아보며 서로는 물론 각자 자신의 인생까지 새롭게 들여다보고 이해하게 된다. 입장 바꿔 생각하라는 얘기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그러나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는 희망도 보게 된다. 또 인간이란 타인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가장 큰 상처를 주는 존재라는 것까지 새삼 깨닫는다.


〈미지의 서울〉은 아직 2회가 남았다. 사실 종영하고 난 후에 이 글을 쓸까도 생각했지만, 난 드라마의 엔딩을 굳이 알고 싶지 않다. 그냥 지금까지의 스토리만으로도 충분하다. 서른 살보다 한참 더 나이먹은 나도 이 드라마를 보며 위로받았으니까.


드라마를 보며 난 더 늦기 전에 날 사랑해야 한다는 걸, 그것도 아주아주 많이 사랑해야 한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이제는 더이상 스스로를 가혹하게 몰아부치는 미련한 짓도 그만해야 한다. 타인의 인생 역시 저마다의 스토리를 지니고 있으니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면 된다. 함부로 재단하거나 평가하지 말자.


또 지나간 어제나 오지 않은 내일 때문에 걱정할 필요도 없다. 그저 오늘만 버티면 된다는 생각으로 가볍게, 느슨하게 내 삶의 속도대로 살자. 어.제.는. 끝.났.고, 내.일.은. 멀.었.고, 오.늘.은. 아.직. 모.르.기. 때.문.이.다. ♣



♡ 이 글을 마지막으로 《매혹의 문장》 브런치북 연재를 마칩니다. 30주 동안 《매혹의 문장》을 챙겨 읽고 사랑해 주신 구독자님들, 독자님들, 모두 고맙습니다. 덕분에 30화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잠시 충전의 시간을 갖고 난 후, 좋은 글로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건강하고 행복하게 지내세요~ 꾸벅! ― 바다와강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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