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에서 나는 기억을 더듬어 내려갔다. 다시 내 불행의 원천을 찾아 손을 뻗기 시작했다. 언제부터였을까? 내 눈에 잔상이 보이기 시작한 건? 이제는 정확한 날짜는 가물가물하다. 그렇지만 느낌은 계속 나의 작은 머릿속에 남아 가끔 날 소름돋게 한다. 한낮의 단잠에서부터, 잠시 멍 때리는 시간까지, 어느 순간 잔상이 몰려오면 나는 심장이 벌렁거리고 화들짝 놀라 순간의 휴식에서 깨어났다.
내가 비문증을 인식하게 된 것은 책을 읽고 있을 때였다. 두껍고 재미없는, 사회 정의에 대해 일갈하는 내용의 책이었다. 나는 글씨를 읽으면서도 내용을 읽지는 않고 있었다. 책 내용이 환경 보호와 공동체의식에 대해 넘어가고 있을 때, 무언가가 내 시야를 지나갔다.
먼지였다. 어쩌면 날벌레 같기도 했다. 나는 눈을 깜박였다. 눈을 깜박이고, 다시 날벌레를 시야에 붙잡으려 하자 날벌레는 내 시야를 피해 저 멀리 두둥실 날아갔다. 날벌레는 수십 마리였다. 갑자기 내 시야에 벌레가 생겼다. 나는 소름이 끼쳤다. 나는 이게 어떤 병인지 잘 알고 있었다. 예전부터 조짐이 있었다.
어릴 적부터 물음표처럼 생긴 머리카락 모양의 검은선이 나를 따라다녔다. 내가 똑바로 쳐다보려고 하면 두둥실 내 시선을 피했고, 내가 다른 곳을 쳐다보면 다시 시야의 정중앙으로 나타나 나를 거슬리게 했다. 그렇지만, 그때만 해도 봐줄 만은 했다. 기스 하나 정도야, 무시하면 그만일 정도의 존재였다. 나는 가끔 심심할 때면 검은 머리카락을 따라 시선을 옮기며 멍을 때렸다. 나는 이 작은 균열을 귀엽게 보았고, 오히려 정이 들었다. 완벽하지 않은 나의 시야를 마감하는 나의 작은 기스를 좋아했다.
그렇지만 군대에 있을 적에 쩍쩍 갈라진 밭처럼 갑작스레 생겨버린 수많은 균열들은 전혀 반갑지 않았다. 나는 더는 맑은 마음으로 푸른 하늘을 쳐다볼 수 없었다. 하늘을 보면 수십의 검은 균열이 떠다녔다. 약간 어지럽기도 했다. 나는 내 운명을 저주하였다. 어느 순간 생겨버린 비문증, 내 인생을 오류로 만드는 비문, 나는 지겹게 그들을 쳐다보며, 지겹게 그들을 무시하려고 애를 썼다. 그렇지만 내가 구원을 바랄 수록, 그들은 점차 늘어났다.
비문증이 처음은 아니었다. 나는 이명도 가지고 있었다. 시끄러운 곳에서는 눈치채기 어려웠지만, 조용한 방에 있으면 가까운 곳에서 웅웅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소리를 두려워했다. 웅웅대는 이명이 내가 종국에는 청력을 잃고 말 것이라는 경고로 들렸다. 나는 이어폰을 잘 끼지 않게 되었고, 점차 신경질적으로 변해갔다.
지금 돌이켜보면, 가련할 따름이다. 그때의 나는 부대 안에 있었고, 군인 신분이었기에 병원에 자주 가지 못했다. 가끔 휴가 때마다 나와서 들리는 안과, 이비인후과 등에서는 나의 병명에 대해 제대로 설명해주지 못했다. 전역 후에도 한의원 및 각종 병원을 전전하며 나는 고장난 몸을 고치려 애를 썼다. 그렇지만 나를 정의하는 병원은 없었다. 어떤 병원도 갑작스레 잔병치레가 많이 생기는 병을 알고 있지는 않았고, 심지어는 맥박에 따라 시야가 같이 흔들리거나, 시선이 빙글 돈다거나, 눈을 감으면 내가 본 사람들의 실루엣이 그대로 비춰오는 병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다. 나는 TV화면처럼 화소로 비춰오는 나의 세상 속에서 고통받으며 살아왔다.
신체화 장애. 나를 정의해준 곳은 결국 정신과였다. 나는 내가 우울중을 앓고 있는 줄 몰랐다. 내가 가진 마음의 병이 몸까지 좀 먹고 있는 줄은 전혀 몰랐다. 나는 건강을 잃은 몸을 가지고 더욱 전전긍긍했으며, 내 마음이 흔들리면 몸은 더더욱 흔들렸다. 악순환의 연속이었다. 나는 진창에 가라앉고 있었다. 그 때, 너의 손을 잡고 있지 않았더라면, 나는 결국 잠기고 말았을 것이다.
나는 하루하루를 갯벌을 걷는 사람처럼 보냈다. 발을 딛는 곳마다 질척거리고, 끈적였으며, 가끔은 발이 푹 들어가 바지가 진흙으로 얼룩지기도 했다. 나는 매일매일 진탕을 걷다가, 가끔은 발이 잠긴채로 끝없이 서있었다. 영원과 같은 시간이었다. 시간은 흐르지 않았다. 밀물이 다가왔을 뿐이다. 밀물은 나의 발목부터, 무릎, 가슴까지 차올랐다. 입 속에 짠 내음이 맴돌았다. 나는 내 죽음을 예정했다. 바닷물이 결국에는 내 정수리 위까지 잡아먹을 것이라고, 그리고 그건 아마 내가 25살이 될 때 쯤이라고 생각하였다.
나의 예측은 틀려버렸다. 새로운 변수가 개입했기 때문이다. 누군가 나를 진창에서 빼 주었다. 준호였다.
그 날, 비행기 왼쪽 자리에 앉은 사람으로 그를 처음 인식했을 때, 나는 그에게 아무 기대도 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하게 있어주기를, 나에게 말을 걸어 긴 비행 동안 스트레스를 주지나 않기를 기대했다. 나는 내성적이었고, 인천에서 홍콩까지 4시간 동안의 비행 동안 옆자리 사람과 이야기를 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나는 과학 책과, 소설 책을 하나씩 준비하였고, 혹시 몰라 넷플릭스에 오프라인 컨텐츠 저장도 해둔 상태였다. 만반의 준비를 갖췄었다. 다만 인생은 늘 예상치 못하게 움직였을 뿐이다.
비행기는 정해진 항로를 따라 순조롭게 비행했다. 여유롭고, 지루하게, 그리고 시끄럽게 비행기는 최선을 다해 한국을 벗어나 남서쪽 홍콩으로 향했다. 나는 친구 3명과 함께 2박 3일의 여행을 계획하고 있었다. 친구들은 나를 빼고 붙어 앉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운이 좋지 못해 낯선 사람 옆에 붙어 4시간을 버티게 생겼다.
4시간이라면 장거리 비행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테지만, 나는 충분히 고통받았다. 좌석에서 일어나도 된다는 뜻으로 띵하며 알림음이 들리자마자 화장실을 가기 위해, 옆자리와 옆옆자리 사람들의 단잠을 깨웠다. 평소에 2시간에 한 번은 화장실에 가는 나는 창가에 앉아서는 안됐다. 그렇지만 운이 나쁘게도 창가석이 마침 남아있었다. 나는 비켜준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하며 화장실로 향했다. 아마 준호는 나를 째려보았던 것만 같다.
볼일을 본 후에 나는 다시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내 자리에 착석하였다. 창에는 푸른 하늘과 그 밑의 구름이 비춰왔다. 빛이 눈이 부시도록 비춰왔고, 구름은 빠르게 흘러갔다. 나는 눈을 반쯤 감고 한 10분 정도 밖을 바라보았다. 그리곤 똑같아 보이는 하늘의 풍경에 진이 나 내가 가져온 책을 꺼내 보았다. 뇌과학 책이었다.
눈에 책 내용이 잘 들어오지 않았다. 뇌과학은 본래가 어려운 학문이지만, 여행 준비로 아침 댓바람부터 일어나 이런 저런 일을 바스런히 하고 나서 읽을 내용은 더더욱 아니었다. 나는 집중하려고 애를 썼고, 책은 나를 이기려고 애를 썼다. 나는 뇌과학의 세계에 발만 담그고, 글씨를 읽어내려갔지만, 그저 시간을 때우고 있을 뿐이었다.
슬쩍 옆자리 사람은 뭐하나 곁눈질하였다. 그는 고개를 푹 숙이고 졸고 있었다. 옆옆자리 여자도 곤히 잠들어 있었다. 잠시 조는 것이 시간을 보내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생각이 나에게도 들었다. 나는 잠시 눈을 붙였다. 잠은 잘 오지 않았다. 아침에 커피를 마신 탓이라 짐작했다.
얕은 꿈과 얕은 잠을 연이어 헤맸다. 비행기 엔진 소리가 시끄러웠고, 밖은 소란스러웠다. 짐작하기로는 승무원들이 음료를 나르고, 중간중간 비행기가 덜컹거렸다. 나는 마음 속에서 작은 네모를 만들고 그 안에 나를 뉘어, 그 석에서 안식하였다. 그렇게 10분 내지 1시간, 1시간 내지 2시간이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