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비행기가 급강하하는 느낌에 눈을 떴다. 순간 덜컹하는 소리를 내며 비행기는 떨어지고 있었다. 눈을 뜨고 고개를 도리도리 돌리며 주변을 탐색했다. 승무원들이 복도를 돌아다니며 승객들을 앉혔다. 화장실 문 앞에서 기다리던 승객 한 명이 승무원의 제지에 자리네 앉았다.
비행기는 연달아서 흔들렸다. 위로, 또 아래로, 좌우로 흔들리는 비행기 안에서 나는 메스꺼움을 느꼈다. 구토 기운이 올라와 주변을 돌아보다, 비행기 좌석 아래에 구토용 봉지가 있을 거라는 생각에 고개를 숙이고 밑을 뒤져보았다.
옆에서 나를 지켜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깨지는 음성으로 난기류에 대해 설명하는 기장의 말이 들렸다. 난기류는 계속됐다. 나는 계속해서 봉지를 찾았다. 옆에 앉은 준호는 계속해서 나를 지켜보았다. 나는 부끄러웠다. 그러면서 동시에 참을 수 없는 메스꺼움이 올라왔다.
"괜찮아요?"
준호가 나에게 물었다. 나는 그의 목소리를 처음 들어보았다. 그는 중저음의 차분한 음성으로 나에게 도울 방법이 있는지 물어보았다. 나는 괜찮다며, 신경써줘서 고맙다고 그에게 답했다.
마냥 거짓말은 아니었다. 나의 메스꺼움은 부끄러움과 한판 사투를 벌이더니, 어느순간 봄날의 눈처럼 녹아내렸다. 놀라울 따름이었다. 나는 자연스러운 척 봉지를 찾는 것을 그만두고, 고개를 서서히 올려 다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맑았던 하늘은 사라지고, 빠르게 항해하는 먹구름만이 남아있었다. 승객 모두는 자리에 얌전히 앉아 밖을 쳐다보았다. 진한 먹구름이 마치 세상을 집어삼키려 마수를 뻗는 사악한 존재처럼 느껴졌다. 나는 먹구름을 보고, 흔들리는 비행기를 느꼈다. 여전히 비행기는 느리게 춤을 추었다.
비행기는 계속하여 흔들거리며 검은 먹구름을 통과해갔다. 검은 먹구름의 속은 현란한 어둠이었다. 어둠 사이로 물방울과 작은 우박 덩어리들이 창을 치고 돌아다녔다. 나는 계속 그 장면을 지켜보다 아뜩한 기분을 느꼈다.
'어둠을 나를 잡아 먹을 거야.'
'어둠은 공동이야. 내 마음 속 공동이 밖에 나왔어.'
'나는 종국에는 모든 빛을 잃을 거야.'
나는 두려웠다. 나는 메스꺼웠고, 나는 혼란스러웠다. 시야가 순식간에 흔들렸다. 당시는 몰랐지만, 첫 공황 발작이 시작되었다. 주변을 의식할 수 없었다. 손이 마구 떨려왔다. 빙글빙글 모든 것이 돌아갔다. 마치 죽음과도 같은 기분이었다.
나는 아무것도 인지하지 못했고, 내 작은 뇌 속에 갇혀버렸다. 세상은 모두 내 머릿속에 있었고, 나와 같이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두 손을 꽉 쥐었다. 손이 얼음장같이 차가웠다. 땀이 흥건하게 나 있었다. 심장이 떨어질 것만 같이 세게 뛰었고, 얼굴에 열이 올라왔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감각이 뇌리를 스쳐지나갔지만, 순식간에 잡아먹혀버릴 뿐이었다. 나는 영원한 정적 속에 갇혀버렸다.
아마 준호는 내 손을 한참 전부터 잡고 있었을 것이었다. 내가 눈을 꼭 감고 있어서 알아채지 못했을 뿐일 것이다. 시간이 지나고 정적이 다시 시끄러워질 때쯤, 내 손을 잡은 두툼한 손이 보였다.
"이제 좀 괜찮아요?" 나는 대답하지 못했었다. 그저 내 안의 영원한 어둠에 침전하여 검은 때가 되어있었을 뿐이다.
비행기가 착륙하고 나서, 나는 준호에게 머쓱한 듯이 목례하였다. 그리고 같이 여행을 간 친구들과 짐을 내리며 아까의 감상을 나눴다. 난기류가 너무 무서웠고, 무사히 착륙해서 다행이라는 것이 그들의 의견이었다. 나는 친구들과 웃으면서도, 준호를 곁눈질로 계속 쳐다보았다. 그는 무거워보이는 등산가방을 매고 나는 신경쓰지 않고 앞으로 나섰다.
수하물을 찾는 곳에서도. 출국 게이트에서도 그의 모습이 계속 보였다. 그는 기골이 장대한 편이어서 어디서든 눈에 띄었다. 나는 내가 왜 그를 쳐다보는지 알고 있었다. 호감이었다. 남자들이 여자친구와 공포영화를 보는 이유가 자연스러운 호감이 생기기 마련이었기 때문이던가. 나는 엄청난 공포의 상황을 벗어나면서, 그리고 도움을 받으면서, 준호에게 자연스러운 호감이 생겼다.
그렇지만 나의 마음을 준호에게 전하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일이었다. 우선 그 당시 나는 그의 이름이 준호라는 것도 알지 못하였고, 그가 한국말을 쓰는 건 알겠지만 어디 출신인지도 알지 못했다. 결정적으로, 나는 소심했고, 그가 남자를 좋아할 확률을 희박했다. 나는 지금까지의 짝사랑들처럼 준호를 놓칠 운명이었다. 다시 준호를 만나기 전에는 말이다.
클럽에 다녀온 날 아침, 준호는 먼저 일어나 부지런히 집 안을 움직인다. 빨래를 돌리고, 커피를 내리고 책상 앞에 앉아 책을 본다. 나는 피곤에 찌들어 잠시 깨어났다가 다시 잠들기를 반복한다. 수면과 반수면의 사이클은 점차 짧아지더니, 나는 거의 완전히 잠을 깨버렸다. 다시 잠이 오지는 않지만, 졸려서 눈을 깜박이고만 있다. 이런 나를 준호가 흘깃 쳐다보더니 한 마디 한다.
"일어났어? 어제 너 되게 잘 자더라. 코를 드르릉 골았어. 하하"
나는 겸연쩍게 침대에 앉아 준호에게 말한다.
"아 졸려 죽겠어, 어제 사람이 너무 많았어."
"그러게 추석에 이태원은 왜 갔대. 내가 너 후회할 거라고 했지?"
"낸들 후회할 줄 몰랐겠어? 알아도 가슴이 시키니까 가는 거지."
"가슴이 시키기는 개뿔, 너 그냥 소외감 느끼기 싫어서 그런 거 다 알아."
"뭐야, 아니거든?"
나는 본심을 들키고야 말았다. 나는 새벽에 이태원에 가서 클럽을 여러군데 돈다거나, 춤을 추는 일에 대해 큰 취미가 없었다. 그저 친한 형들이 같이 놀러가자고 해주니까, 괜히 고마워서 따라갔을 뿐이었다. 나는 내가 이태원에 다녀오고 다음 날 피곤해 할 줄 알고 있었다.
정신없는 클럽 속에서 처음에는 신이 나더라도 결국에는 피로에 쩔어 힘들어 할 것 또한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런 본심을 들키고 나니 괜히 심술이 났다. 나는 준호에게 한 마디 해주었다.
"흥, 그러는 형은 어제 술번개 다녀왔잖아. 그게 그거야."
"그게 그거는 무슨, 난 술 좋아해서 가는 건데? 넌 아니잖아."
오늘따라 준호는 심통을 부렸다. 나는 괜히 아침 댓바람부터 준호와 짜증을 내며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얼른 화제를 돌렸다.
"오늘 아침은 뭐 먹지?"
"나가자, 나가서 브런치라도 먹는 거야. 콜?"
"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