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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EELJAZZ Oct 18. 2024

난기류 6

    리는 우리가 다시 만났을 적을 생각한다. 나와 준호는 종로 3가의 한 술집에서 다시 만났다. 칵테일을 파는 고즈넉한 게이바였다. 나는 민과 같이 이야기를 나누러 갔었고, 그는 혼자 칵테일을 홀짝거리고 있었다.

    혼자, 바에서 술을 마시는 사람, 내가 생각하기에는 이상한 장면이었다. 그의 얼굴을 보지 못했던 그 때는 그냥 멋내기 좋아하고 외로움을 전시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혼자 잘 놀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렇지만 우리가 그의 대각선 자리에 앉아 그의 얼굴을 볼 수 있게 된 때부터, 나의 빈정거림은 놀라움으로 변했다. 그는 비행기에서 나의 손을 잡아준 사람이었다. 난기류가 심해 내가 공황 발작에 빠졌을 때에 따듯하게 나를 지지해줬던 사람이었다. 나는 그의 얼굴을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쌍커풀이 없는 순한 눈에, 뭉툭한 코를 가지고 있었다. 덩치는 꽤 커서 어디 가든 눈에 띌 것만 같았다. 나는 그를 곁눈질로 쳐다볼 수 있는 자리에서 민과의 대화에 집중하지 못하고 계속 그를 쳐다보았다.

 "내가 어제 만난 남자가 말이야, 거기가 좀 작더라고. 참 아쉬웠어." 민이 말했다.

 "그것 참 아쉬운 일이네, 꼬춘 쿠키 실패라니" 나는 적당히 맞장구를 쳐주었다. 나는 민의 이야기를 반쯤은 흘려듣고 있었다. 나는 그의 이야기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그는 남자 이야기를 계속하였고, 그가 좋아하는 남자들, '식'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휴대폰을 꺼내 틴더 앱을 보며 같이 스와이프를 하기도 하였다.

 나는 그 와중에도 오로지 다른 생각 뿐이었다. '그도 게이였던 거구나.''그런데 왜 혼자 술집에서 청승 맞게 그러고 있는 걸까?' '한번 용기 내서 번호라도 딸 수 있을까?' 심장이 쿵쿵 뛰고, 표정이 굳어졌다. 손에서는 땀이 주룩 흐르기 시작했다. 나는 용기를 내고 싶었다. 잠시 그에게 다가가 이야기를 걸고 싶었다. 민은 어차피 내가 잠시 자리를 비운다 해도 틴더니 잭디니 하는 앱을 보며 혼자 잘 놀 것이었다.

 나는 곁눈질로 계속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면서 건성으로 민의 말에 계속 대답하였다. 별 영양가 없는 대답만 계속되자 민도 내가 집중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왜 그래? 뭔 일 있어?"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그에게 솔직하게 말했다. 한 1년 전 비행기에서 내가 공황에 빠졌을 때에 나의 손을 잡아준 사람이라고, 그리고 그 때부터 호감이 있었는데 그가 게이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그리고 지금 그가 내 시야에 있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이다.

 "뭘 고민해? 가서 번호 따면 되지. 어차피 밑져야 본전 아니야?"

 그의 답은 단순했다. 그렇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나는 그를 또다시 놓칠 수 없었다. 저번에 그를 그냥 보냈던 것은 그의 성적 지향에 대한 정보가 없었기 때문이었지만, 이제는 그도 나처럼 남자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물론 그에게 번호를 달라고 하여도 그가 거절할 가능성도 컸다. 내가 그의 마음에 들 수 있을지 나는 확신이 없었다. '오늘 내 패션이 어땠더라?''내 얼굴 상태가 어땠지?' 나는 휴대폰을 들어 셀카모드로 나의 생김새를 점검해보았다. 마침 미용실에 다녀온지 3일째라 머리가 단정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얼굴에 선크림과 파운데이션도 발라서 피부의 잡티 하나도 보이지 않는 상태였다. 나는 내 얼굴의 여러 요소에 대해 불만이 많았지만, 내 이목구비에서 지금보다 깔끔하게 정돈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렇지만 나는 긴장되었다. 나는 왠지 모르게 들떴고, 왠지 모르게 우울했다. 성공과 거절 사이의 선에서 나는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계속 곁눈질로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는 레몬이 올려진 칵테일을 다 마시고, 얼음을 와그작 씹고 있었다. 두꺼운 입술이 움직이는 모양새가 귀여웠다. 내가 너무 자주 곁눈질을 하고 있는 건 아닌지 스스로 생각해 보게 되었을 때, 그와 내 눈이 마주쳤다. 나는 황급히 눈을 돌렸다. 내 얼굴이 금세 빨개지고 말았다.

 "동호야, 너 진짜 소녀소녀하다." 민이 말했다.

 나는 그의 말에 반박할 수 없었다. 내가 봐도 지금 내 꼴은 자신감 있는 헤테로 남성의 모습보다는 좋아하는 남자아이에게 고백하려 우물쭈물하고 있는 소녀의 모습에 더 가까웠다. 마음 속에 소녀 하나씩 품고 사는 게 게이의 숙명이라지만, 지금의 나는 뭔가 더 심했다. 나는 슬슬 몸이 가벼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너무 긴장한 나머지 힘이 풀려버린 것이다.

 "야, 직진해. 가서 옆자리에 딱 앉아. 그리고 얘기하고, 키스하고, 어쩌면 잘 수도 있고 그런거야. 뭐 잘 안된다고 해도 한 번 쪽팔리고 그만이야." 민이 나에게 충고하였다.

 나는 그의 말에 동감하였다. 나는 마음 속으로 셋을 셌다. 3.....2......1.....이 지나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잔을 가지고 바 테이블에 앉아 있는 그의 곁으로 걸어갔다. 나는 걸어가는 도중에 나의 걸음걸이가 지나치게 긴장되어 보이지 않는지 신경쓰며 걸어갔다. 아마 준호의 입장에서는 여고괴담의 귀신이 다가오는 것처럼 끊겨서 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의 옆자리에 다가가 그에게 물었다.

 "여기 자리 없죠?"

 준호는 커다래진 눈으로 나를 쳐다보더니, 자리는 비어있다고 말했다. 아마 그 때까지만 해도 내가 누군지 전혀 모르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럼 잠깐 앉아도 될까요?"

 준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순간 안심하였다. 일단 첫 관문은 넘은 셈이었다. 나는 그의 옆에 '탁'소리를 내고 앉아 그를 쳐다보았다.

 "나 기억안나요? 나는 그쪽 기억나는데."

 내 목소리가 떨려오는 게 느껴졌다. 왠지 모르게 다리를 떠는 고라니가 떠올랐다. 멍청한 표정으로 용감한 척 말하고 있는 괴상한 사람이 지금 내 모습이 아닐까? 나는 순간 이 자리에 온 것을 후회했지만 이미 엎어진 물이었다. 고개를 잠시 돌려 민을 바라보니, 그는 재밌다는 듯이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입장에서는 재밌는 유흥거리였을 것이다. 내가 어떤 결과를 가지고 오든, 흥미로운 안주거리가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준호는 나를 빤히 지켜보며 나를 어디서 봤나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그저 웃었다. 그가 나를 기억 속에서 끄집어내주기를 기다렸다. 그렇지만 그는 아리송한 모양이었다. 결국 인내심이 바닥난 내가 그에게 우리의 첫 만남을 상기시켰다.

 "1년 전에, 홍콩 여행 간 적 있죠?"

 그의 눈이 동그래졌다. 곧 그는 나를 떠올린 모양이었다. 눈에 담긴 감정이 놀라움으로 바뀌었다.

 "아, 그 옆자리 사람이죠?"

 "맞아요 오랜만에 다시 보네요. 반가워요."

 "여기서 다시 보게 되다니, 진짜 상상도 못했네요."

 "그러게요. 어떻게 여기서 다시 보게 되다니 정말 신기하네요."

 "아아 게이셨구나, 그쪽도."

 "맞아요. 그쪽이 게이인 것처럼 저도 게이에요. 하하"

 "반가워요. 저 그때 그쪽 엄청 걱정했었거든요."

 "하하, 제가 추태를 부렸었죠."

 "아니에요, 그럴 수도 있죠. 그냥 조금 걱정되었을 뿐이에요."

 그는 나를 진심으로 반가워하는 것만 같았다. 나는 안도하였다. 그가 나를 반가워한다는 사실이 마치 그가 나를 그리워했다는 뜻인 것만 같았다.

 "여행은 잘 했어요? 그때 친구들이랑 여행 갔던 것 같았는데."

 "맞아요. 제 일반 친구들이랑 같이 여행갔었죠."

 "거기 무슨 트램이 엄청 유명하잖아요. 그거 탔어요?"

 "아! 그..피크 트램이요? 네 친구들이랑 타고 갔었죠. 근데 올라가보니 구름이 딱 저희 있는 곳에 걸려 있는 거에요. 구름이 산에 걸려 있고, 그 산에 우리가 있었는데, 원래 거기가 홍콩 전경을 다 볼 수 있는 곳으로 유명한데, 진짜 구름 때문에 아무 것도 안 보이더라고요.

 "아 그래요? 되게 아쉬웠겠다. 거기 전망 좋다고 인터넷에서 많이 그러더라고요.

 "근데 진짜 사일런트 힐처럼 안개가 쭉 깔려서 오히려 재밌었어요. 친구들끼리 되게 웃었어요.

 "근데 그거 알아요?"

 나는 순간 당황했다. 그는 일순 변하는 내 표정을 보더니 기분 좋게 말을 이어갔다.

 "별 건 아니고, 우리 아직 나이랑 이름도 모른다고요. 나는 통성명은 일단 하고 봐야하는 주의라서. 어떻게, 저부터 소개할까요?"

 "아아 좋아요."

 "저는 고준호이고, 94년생이에요. 사는 데는 강북이고요. 그럼 그쪽 소개도 부탁해요."

 "아 저는 김동호이고, 99년생이에요. 청량리 쪽에 살고 있고요."

 "아 어쩐지 어려보이더니, 5살 차이가 났네요. 그럼 친구는 대학생이에요?"

 "네네, 근처 학교 다니면서 자취하고 있어요."

 "아아 그렇구나. 5살 차이라니, 딱 마지노선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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