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다음 날 아침 준호의 집 근처 역에서 우이신설선을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역에서 내려가며, 준호가 손에 쥐어준 토레타 하나를 꼭 잡고 에스컬레이터에 올라탔다. 뒤에는 준호가 있었다.
"다음에 봐"
"그래요. 다음에 봐요."
준호는 나에게 말을 놓으라고 했지만, 그 때의 나는 쉽게 말을 놓지 못했다. 지금보다 훨씬 내향적이었기 때문이었기도 했지만, 준호가 나보다 5살이나 많아 쉽사리 말을 놓기엔 너무 어른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오히려 그가 어른처럼 보이기 때문에 나는 그에게 빠져들었다. 준호는 아는 것이 많았다. 어제 대화했을 때, 그의 독특한 어투에 호감을 느꼈다. 그는 문장을 쓰듯 말을 했다. 이를테면,
"동호 씨와 나는 참 잘 맞을 것 같아요."
"어쩌면 사람들이 동성애자를 싫어할 공산이 크다고 가정하기 때문에 게이들이 데이트를 할 때에도 밖에 나가지 못하는 것일지도 몰라요."
등 구어체가 아닌 문어체로 세상을 설명하는 그의 방식에 나는 참신함을 느꼈다. 어쩌면 그렇게 말을 하며 반짝이는 그의 두 눈동자에 빠져든 것일지도 모른다.
그는 코가 뭉툭했고, 귀가 넓었다. 입꼬리는 자연스레 위로 올라가있었으며, 눈은 크지 않았지만 총기를 담고 있었다. 나는 그의 지적인 매력에 너무나도 빠르게 그에게 빠져버렸다. 어쩌면 그가 나에게 가진 호감보다 내가 그에게 가진 호감이 훨씬 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그에게 안기면, 그의 큰 덩치를 느끼며 귀가 빨개졌고, 그가 나에게 음료를 주면(토레타가 그의 집에 쌓여 있었다.), 나는 갈대처럼 그를 향해 헤실헤실 웃어대었다. '너를 좋아하고 있다.'를 계속해서 표현하고 있는 셈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준호가 나에게 같은 정도의 호감을 가지고 있을지 확신하지 못하였다. 내가 워낙에 솔직한 편이라서 그럴지도 모르지만, 준호는 나보다 감정이 표정에 드러나는 편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쪽'세계의 법칙을 생각해보면, 그와 나는 그저 하룻밤 달콤함을 즐기고 쿨하게 헤어질 가능성도 높았다.
그런 내 마음이 놓인 것은 지하철이 오기를 기다리던 순간이었다. 휴대폰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준호에게서 카톡이 왔다.
'잘 가. 또 보자.'
나는 그의 카톡 하나에 일희일비했다. 그가 나를 다시 보고 싶어한다는 것이 놀라웠다. 나는 자존감이 유난히 약했고, 당시에는 몰랐지만 우울증으로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내 마음 안에 공허를 품고 살아가고 있었으며, 나는 나 자신을 사랑하지 못했다.
그런데 누군가가 나를 사랑할 수도 있다니! 그러니까 소위 말하는 '썸'을 내가 체험할 수 있다니! 놀라운 일이었다. 그때의 나를 생각하면 위로를 해주고 싶은 마음이 든다. '넌 네 생각보다 훨씬 괜찮은 아이야.'
준호와 나는 그 이후로 주말마다 만났다. 솔밭근린공원을 같이 산책하기도 했고, 내가 다니던 시립대학교를 한 바퀴 돌며 사람들을 구경하기도 했다. 사람들은 분주해보였다. 나도 바빴다, 준호를 바라보느라, 준호를 생각하느라.
우리에게도 몇 번의 위기가 찾아왔었고, 생활 방식의 변화도 있었다. 사귄지 1년이 된 쯔음에 준호는 나의 집에서 거의 동거하기 시작했다. 한 달에 2번 이상 그의 집에 돌아가지 않았으니, 반동거라고 봐도 될 것이다. 그렇게 나의 좁은 자취방에 싱글 침대 위에서 다 큰 성인 남성 두 명이 두 발도 다 뻗지 못하고 살았었다. 우리는 그 이후 더 큰 필요, 이를테면 나의 취업과 그의 직장과의 거리 등을 고려하여 신당 근처의 오피스텔로 집을 합쳤다. 그 와중에 역경이 정말 많았지만, 힘들게 극복해내었다. 우리는 그렇게 2년이 넘는 시간 동안 연애했고, 같이 살았고, 인생을 엮었다.
그와 나는 카페에 가는 것을 좋아했다. 나는 커피와 책을 좋아했고, 준호는 카페에서 쉬는 시간 자체를 좋아했다. 우리의 취미도 섞여들어갔다. 글을 쓰는 그를 따라 나도 글을 쓰게 되었고, 책을 읽는 나를 따라 그도 책을 읽게 되었다. 우리는 원래도 닮은 점이 많았지만, 더욱 닮아졌고, 서로를 반쪽이라 여겼다.
그와 나는 같이 친구들을 만났고, 겹지인도 여럿 생겼다. 나는 내 친구들에게 내가 게이라고 확실하게 이야기했고, 그들은 "진짜야?"등의 반응을 보이며 나를 인정하게 되었다.
우리는 행복했다. 어쩌면 행복하다고 믿었다는 것이 더 올바른 말일 수도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혹은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우리는 정신과에 다니기 시작했고, 우리는 상담 치료를 시작했고, 우리는 나아지기 시작했다. 나의 공허는 점차 죽어갔다. 살아 숨쉬던 공허는 자신의 위치를 점차 잃어갔다.
그 과정은 험난했다. 정신과 치료도, 독서도,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도 나에게는 쉽지 않았다. 내가 이렇게 나아진 것은 김 선생님 덕분이었다. 그와의 상담세션이 없었다면 나는 이 정도로 좋아지지 못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