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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어 한 마리에 1억 원

feat. 쿨가이 아저씨

 은행에서는 종종 예탁한 예금이 많거나, 거래 실적이 좋은 분들을 모시고 여행을 다녀오는 등 자그마한 행사를 한다. 오시는 분들에게 이런저런 선물을 주기도 하는데, 이번 행사의 선물은 간고등어였다. 행사에 초청된 분들은 거래 실적이 많은 사람들이라 가까워지면 나에게 떨어지는 콩고물도 많아지는 법이었다. 하지만 오시는 분들이 워낙 많아서 한 분 한 분 기억하기가 힘들다. 그날 맨 뒷자리에 앉아 계시던 한 부부가 계셨는데 다른 분들에 비해 크게 튄다거나 그렇다고 지나치게 조용하지도 않은 무난한 부부였다. 다만 아저씨의 눈이 워낙 크셔서 한 번 보면 잊기 힘든 얼굴이었다.


 행사가 끝난 지 한 달 정도가 지났다. 점심을 먹고 나른 나른해질 때즈음 한 아주머니가 우리 지점으로 조용히 들어오셨다. '어서 오세요' 하고 인사를 했는데 뒤에 낯이 익은 남자분이 따라오셨다. 아주머니가 예금을 새로 만들고 싶다며 내 자리에 앉으셨다. 그때까지만 해도 '어디서 뵀더라..' 하는 긴가민가한 느낌만 있었다. 예금통장 개설을 다 끝내고 인사를 드리려고 했는데 아저씨께서 나를 빤-히 쳐다보고 계셨다. 그 순간 아저씨 눈에 내가 빨려가는 듯한 느낌이 들더니 번뜩 누군지 생각이 났다. 크고 반짝거리는 눈, 숯으로 칠한 듯한 눈썹, 살짝 내려간 입꼬리가 딱 행사 때 뵈었던 아저씨였다. '사장님 안녕하세요~ 고등어는 드셔보셨어요? 다른 분들이 다 맛있었다고 하던데 어떠셨어요?' 괜히 반가운 마음에 신나서 인사를 드리면 누군지 몰랐다는 걸 눈치챌까 봐 능청스럽게 말을 건넸다. 그러자 아저씨께서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시더니, '나를 기억해?'라고 하셨다. '당연하죠! 그때 00 행사 때 저희 뵀었잖아요.' 한 층 더 능청스럽게 말씀드렸다.


 아저씨께서 갑자기 '나를 기억하네? 딱 기다려! 저기 K은행에서 돈 뽑아올라니까. 원래 K은행에서 예금하려 했는데 너 때문에 여기에다 하는 거야.' 라며 당차게 말씀하셨다. 30분 정도가 지나 아저씨와 아주머니가 다시 들어오셨다. 다른 자리도 비워져 있었는데 내 창구에는 손님이 있었음에도 기다리고 계셨다. 아저씨는 수표 1억 원을 꺼내시더니 예금통장을 개설하고 가셨다. 업무가 다 끝나고 감사 인사를 드렸다. 하하 호호 한참 떠들고 난 후 아저씨는 이제 가보겠다며 일어나셨고 내 옆 창구에 있는 박 차장님께 '이 친구 때문에 여기 예금하는 거요! 지점장한테 꼭 말해주세요.'라며 끝까지 나를 챙겨주셨다. 사실 예금을 한다고 해서 은행원으로서 실적이 생기는 건 아니다. 하지만 평범한 하루에 특별한 경험을 주셨던 아저씨가 내 인생에 가장 큰 실적이 아닐까.


 '앞으로 예금은 당신한테만 할게!' 아저씨는 마지막까지 쿨가이의 모습을 보여주셨다. 바로 기억을 못 해 죄송스러운 마음이 들기도 했고, 너무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회사 생활이 참 재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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