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찬양을 한국어가 아니라 영어로 부를 때, 혹은 번안된 버전이 아니라 영어 원곡을 들을 때 더욱 풍성한 은혜를 받을 때가 있다. 요즘 들어 자주 듣고 따라 부르게 되는 찬양 몇 곡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살아계신 주 나의 참된 소망
걱정근심 전혀 없네
Because He lives, I can face tomorrow
Because He lives, all fear is gone
사랑의 주 내 갈 길 인도하니
내 모든 삶에 기쁨 늘 충만하네
Because I know He holds the future
And life is worth the living, just because He lives
나 주님이 더욱 필요해 이전보다
내 입술의 말보다 더욱
표현할 수 없네
주가 필요해 필요해
I need You more, more than yesterday
I need You more, more than words can say
I need You more than ever before
I need You Lord, I need You Lord
나의 호흡보다 나의 노래보다
나의 생명보다 주가 필요해
세월이 흘러도 주 곁에 거하리
결코 돌아가지 않으리 옛 삶으로
More than the air I breathe, More than the song I sing
More than the next heartbeat More than anything
and Lord as time goes by, I'll be by Your side
Cause I never want to go back to my old life
주권자 되신 주 통치하시네
사망 권세 무덤 이기셨네
I'll praise 'cause You're sovereign, Praise 'cause You reign
Praise 'cause You rose and defeated the grave
나 주를 신뢰해 진실하신 주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
I'll praise 'cause You're faithful, Praise 'cause You're true
Praise 'cause there's nobody greater than You,
외쳐 선포해 살아계신 주
나 어찌 잠잠하리
I won't be quiet, my God is alive
So how could I keep it inside?
Praise the Lord
Oh, my soul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의 경우에는 한국어로 부를 때보다 영어로 부를 때 단어 하나하나의 의미에 더욱 집중하고 깊게 받아들이게 된다. 또한 같은 의미를 나타내는 단어나 문장이라 하더라도 언어에 따라 각 단어와 문장이 가지는 의미의 폭은 다르다고 생각한다.
<살아계신> ─ <alive>이라는 대응 구조를 예로 들어보자. 두 단어 모두 수식하는 대상이 생명이 있다는 의미로 사용되지만, 나에게는 각 단어가 주는 의미가 미묘하게 다르다. 말로 표현하기는 힘들지만 두 단어가 주는 울림의 깊이가 다르다고는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얕음과 깊음과 같은 양적인 차이가 아닌, 깊이의 질적 특성이 다르다.
「일반 언어학 강의」의 저자인 스위스의 언어학자 페르디낭 드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는 시니피앙(signifiant)과 시니피에(signifié)라는 개념을 소개한다. 기표(記標)와 기의(記意) 정도로 번역되는 듯한데, 소쉬르는 개념을 나타내는 언어를 시니피앙, 언어에 의해 표시되는 개념을 시니피에라고 정의한다.*
예를 들어 <나비>라는 글자 자체는 시니피앙이다. 반면 <나비>라는 단어가 가리키는 구체적인 개념, 즉 대부분의 사람이 떠올리는 나비의 이미지가 시니피에다.
이번엔 <나방>이라는 단어를 생각해 보자. 한국어에서 <나비>와 <나방>이라는 단어는 구분되고 두 단어가 가리키는 개념 또한 구분된다. 다시 말해 실제 나방과 나비는 생물학적으로 다른 개념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프랑스어에는 <나비>이라는 단어도, <나방>이라는 단어도 없다. 다만 이 둘을 모두 포함하는 <빠삐용 papillon>이라는 단어만 존재한다.
따라서 어떤 개념과 그 개념을 나타내는 언어 사이에는 일체의 필연적 관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위에 예시에서 알 수 있듯이 실제 나비와 <나비>라는 단어는 단지 한국어라는 언어 체계 안에서 우연히 대응 관계가 성립하게 됐지, 프랑스어라는 언어 체계에서는 그러한 관계가 성립하지 않는다. 프랑스어는 나비와 나방을 구분하지 않고 <빠삐용 papillon> 하나로 나비와 나방을 모두 포함한다.
다시 말해 언어는 이미 존재하는 개념들의 이름들을 모아서 구성되는 집합이 아니라, 오히려 각 언어는 자의적으로 체계를 구성하고 그에 따라 개념들이 그려진다고 이해할 수 있다. 따라서 서로 다른 언어 체계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이 본질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다. 이를 다르게 말하면 인간은 언어라는 체계 안에 갇힌 존재이다.
각 언어 체계에서 사용하는 단어는 서로 공통되는 개념을 가리킨다고 하더라도, 각 단어가 가지는 전체적인 개념의 깊이는 다르다. 따라서 한국어와 영어로 각각 찬양을 부를 때 다르게 다가오는 느낌은 이러한 서로 다른 두 언어 체계의 이질감에서 발생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각 언어에서 사용하는 단어의 깊이는 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에 여러 언어로 찬양을 부를 때 은혜는 더욱 풍성하게 부어진다. 또한 모든 가사는 직역되지 않고 역자에 의해 조금씩 의역되고 다른 방식으로도 표현되기 때문에, 이로부터 오는 다양성과 풍성함도 존재한다.
소쉬르의 언어 이론을 가지고 언어의 차이에서 오는 은혜의 풍성함에 대해 나이브하게 다뤄보았다. 그리스도인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볼 수 있으며, 말할 수 없는 곳에서 말할 수 있으며, 느낄 수 없는 곳에서 느낄 수 있으며, 생각할 수 없는 곳에서 생각할 수 있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언어를 통해서 우리에게 더욱 크고 풍성한 은혜를 부어주시는 주님은 얼마나 위대하신가! 새 노래로 주님을 찬양하자!
* 「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 야마구치 슈, 295p.
-참고 영상
https://youtu.be/ljsUBJCJWIc?si=Bb9axv5Ou8dVRKA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