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명예퇴직을 결정하던 날 남편은 전라남도에 가서 일년살이를 해보자고 했다. 나도 ok다.욕심은 버리고 가볍게 살아가잔다.
인생 2막, 사는 곳도 낯선 곳으로 살아가는 방식도 새롭게 시작 하고 싶었다.경제활동은 안 해도 공무원 연금 이 나오니 한가지 걱정은 없다.
왜 전남일까?
수년간 차박여행을 다니면서 보니 자연이 살아 숨 쉬는 곳, 차박지에서 편하게 지내게 해주던 곳이 전남이었다.인정 넘치는 친절한 현지 분들이 계셨다. 그래서 전남이 좋다.
전남 어디?
진도, 해남, 고흥,강진.....,
큰 도시가 아니면서 바다가 있는 곳이 좋다.
우리는 이 곳에 1년 우선 거주할 수 있는 귀농어인의 집을 신청했다.
강진은 폐교를 이용하는 농업사관학교였는데 6개월 거주를 할 수 있어 포기했다. 남편이 전화로 3군데 군청에 신청을 해 놓았다. 입주자가 계약이 끝나야하고 대기자들이 있으니 모두 몇 개월씩 대기해야 한다고 했다. 퇴직 후 가야 하니 3월 정도에 입주하면 된다. 3개월 가량 여유가 있었다. 많이 기다려야 한다더니 고흥군에서 12월 말에 집이 있다는 연락이 왔다. 대기신청을 한지 한달만이었다. 아직 퇴직도 안 했는데....;
그러나 12월 말부터는 방학이었으니 이번 놓치면 1년 기다릴까 봐. 고흥으로 결정했다.
대학 졸업을 한 학기 앞둔 아들과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여 임용 대기 중인 딸은 부산에 거주하고 우리만 아주 간단한 살림을 꾸려 이사를 했다. 떠날 때도 가볍게 짐을 꾸려 떠날 수 있도록. 옷가지와 식탁, 텔레비젼, 세탁기, 그리고 편히 앚아 쉴 수 있게 등받이 긴 간이의자만 준비했다.
짐은 우리 스타렉스 한차에 모두 실렸다.
귀농어인의 집 마을 회관을 새로 짓고 구마을회관을 리모델링한 곳이었다. 월 10만원씩 사용료를 내고 전기세 수도세는 따로 부담한다. 처음 볼 때 아주 시원하게 방도 크고 거실과 화장실이 깨끗했다. 그러나 인테리어는 80% 정도는 눈에 찼다. .천장이높았고 마당도 없어 문을 멀고 나오면 바로 길이었다.회관이었으니 마을 중양에 있어 우리도 마을주민이 지나가는 것을 알 수 있었고 그분들도 우리의 생활모습을 속속 드리 알고 있다.사람 소리가 나면 얼른 나가 인사를 한다. 병원가시는 분, 경운기 끓고 일하러 가시는 분, 회관에 놀러 나가시는 분,.,,,
우리의 모습도 동네분들이 모두 안다. 회관에 모여 이야기를 할 때 보니 모기가 많아 저녁에는 빨리 불을 꺼고 TV를 보거나 휴대폰을 하는데 그분들이 우리집에 불이 꺼지는 시간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침에 일어나면 맑은 새소리도 들리고 공기도 좋고 초록초록한 바깥 풍경은 참 좋았다.
그런데 추웠다. 그때가 석유값도 최고였던 시기라 연료비도 참 비쌌다. 방에 텐트를 치고 파워뱅크에 온열매트를 까는 등 여러 차박도구를 방에 설치하고 잤다.6개월 정도 지났을 즈음 추위는 가시고 무더위가 찾아왔는데 이 집은 참 시원했다. 에어컨이나 선풍기도 별 필요가 없었다.
파, 머위, 완두콩. 상추 등 먹을 것을 주는 사람들
친절한 이장님과 이웃사람들 덕분에 즐겁게 생활할 수 있었다. 1년 이후에도 계속 고흥에 남고 싶었다.
그러나 귀농어인의 집은 1년 살이 밖에 허용하지 않는다. 그래서 좀 더 오래 머윌 집을 구해야 했다.
먼저 살다 이웃과 정이 든 동네 안에서 찾아보았다.
빈집이 4집 정도 있었는데 나는 동네 한 바퀴 돌면서 사지도 않은 집을 마음속에서 리모델링하기 시작했다.
동네 끝집인 첫 번째 대상은 기와로 지붕개량은 해두었으나 실내에 화장실이 없었다. 수도도 다시 연결해야 한다. 집을 리모델링하려면 뼈대와 지붕만 남기고 다 뜯고 공사를 해야 하고 집 뒤꼍이 산에 붙어있어 축대도 쌓아야 한다.
장점은 마을 외곽에 있어 사생활이 많이 노출되지 않고 남동향인 집 방향이 좋다는 것이다. 하지만 신축비용보다 많이 드는 공사비 때문에 포기했다.
두 번째는 마을 맨 앞에 있는 아담한 집이었는데 햇볕도 잘 들고 마당도 넓었다. 적당한 크기의 텃밭 도 있어 좋았는데 이 집주인은 요양병원에 가 계신단다. 손자가 집을 물려받을 것인데 세를 놓지 않겠다고 한다. 이 집도 실내화장실이 없다. 그래서 애써 억지를 써서 구하려고는 하지 않았다
세 번째 빈집은 어머니는 요양원에 가 계시는데 자식들이 가끔 와서 별장처럼 쓰고 있었다.
네 번째 집은 할머니가 돌아가신 지 얼마 되지 않아 실내화장실도 있고 수도도 들어와 있다. 마당도 있고 창고도 있고 좀 수리하면 살 수 있을 만하여 마음에 두고 매일 리모델링의 꿈을 꾸었다. 집에 들어가 내부를 보니 집이 가득하다. 창고 또한 쓰레기가 가득했다. 그래도 돈 들여 치우면 되겠지? 생각했으나 이 집도 주인이 곧 들어올 거라 했다.
이 동네 빈집은 모두살 수가 없으니 다음은 이동네에서 컨테이너주택을 설치할 땅을 찾았다. 우리는 50평 정도 있으면 된다. 동네의 집터나 자투리 땅이란 땅은 다 보았으나 마음에 들지 않았다.춥지 않으려면 남향 이어야 했고 시골에 사니 숲이 조망되는 곳이어야 했고 물길이 아니 곳, 모기가 많지 않은 곳, 부지런히 찾았지만 결국 동네에서는 찾지 못하였다.
이제는 다른 동네로 눈을 돌렸다. 집을 구하기 위해 주로 이용하는 것은 유튜브 매물사이트와 인터넷에 나와 있는 부동산사이트 매물정보다. 그리고 매물이 있는 동네에 가면 이장님과 동네 주민분들도 만나 이야기를 했다. 또 다른 매물은 없는지 가격은 적당한지 꼼꼼하게 여쭈어 보았다. 우리는 뼈대 좋은 구옥을 사서 둘이서 리모델링할 예정으로 집을 보러 다녔다. 유튜브에서는 서까래가 살아있는 집, 바다가 조망되는 집 등 장점을 잘 스토리텔링했고 사진을 잘 찍어 그럴듯하게 소개했다. 호텔 같은 집으로 보였던 곳도 임장을 가보면 그저 평범한 곳이었고 뷰가 좋다고 했는데 그것에 반하여 임장을 가보면 그것은 집 마당에서 본 뷰가 아니라 드론이 하늘에 떠서 본 뷰라는 것을 알았다. 동네 주민의 말을 들어보면 가격대도 터무니없었다. 싸지도 않고 리모델링하기 쉽지도 않았다. 처음에는 3000만 원 정도에 사서 고쳐볼까 했는데 좋은 집이 없었고 5000만 원 정도. 리모델링 안 하고 들어갈 수 있는 집을 찾았으나 마음에 드는 집이 없었다.
마음에 드는 신축 건물은 있었으나 2억 가까이했었다. 세 번째는 방법은 연세나 월세를 구하는 것이었다.텃밭 있는 단독주택을구하는 게 목적이었고 정 안되면 아파트라도 들어가 볼까 생각 중이었다.
구옥들은 세입자를 받을 수 없을 정도의 폐가였기에 전월세로 내놓을 수가 없는 정도니 매물이 적었다.
그렇게 연세집을 구하려던 어느 날 저희 부부는 운암산 등산을 했습니다.박지성스타디움에 차를 세우고 부드러운 흙길을 따라 가파르지 않은 산길을 걸을 수 있는 참 좋은 등산코스를 가지고 있다. 운암산 등산도 가능하고 싸목싸목길을 걸을 수도 있어 우리 부부의 최애 트레킹 코스다.
등산로 중간쯤 중섯재라는 곳이 있는데 분청사기박물관 쪽에서 올라오면 차도 이곳까지 운행할 수 있다.이곳에는 색소폰 연습을 하는 분이 매일 올라와 연습을 하고 계신다. 그래서 인사를 하고 노래 한곡 부르고 커피 한잔 마시고 시원한 그늘에서 쉬고 있었다.
경찰공무원으로 퇴직하시고 취미생활을 열심히 하신다. 날이 갈수록 색소폰 실력이 늘어갔다.
부탁하셨나 봅니다. 남편은 그분에게도 방 있으면 소개해 달라는 부탁을 해놓았다. 이곳에서 쉬며 색소폰 연주를 감상하고 이야기하시던 다른 분도 계셨는데 우리처럼 운동하러 오신 분이었다. 습니다.올해 정퇴하신다는 면장님이신데 현재 공로연수 중인분이었다. 이야기하다 농담처럼
"우리 집에 들어오시죠 " "정말요, 우리는 너무 좋지요." 1년 계약한 어부세입자가 연고지를 바꾸면서 다른 곳으로 이사 간다고 하신다. 주소를 받고 가보았더니 세입자는 없었고 밖에서 바라본 집은 이제까지의 집과 달리 너무 좋았다. 가슴이 무척 설레는 것이었다.
면장님께 전화를 걸어 보증금과 연세를 먼저 계좌이체를 했다.보증금은 1000만원 월세는 50만원 년 240만원이다. 10년을 산다면 2400만원이니 집을 사는 것보다 나을 것 같다.
작은 집
그런데 전세입자분이 친절하게 집을 보여준다고 하여 내부에 들어가 보니 퀴퀴한 냄새도 나고 벽지와 장판에 군더군데 곰방이 도 있었다. 하지만 도배장판을 하는 남편이 있기에 보수를 할 생각으로 대단하게 느끼지는 않았고 몇 달을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다가 입주했다.
우리가 입주할 당시는 지독한 장마철이었다. 그래서 즉시 도배장판을 하지 못하고 기다렸다. 곰팡이가 피어있는 벽지에 락스를 뿌렸더니 서서히 곰팡이는 없어지고 하얀색을 되찾았다. 장판은 걷어내어 아래쪽에 있는 뿌리 곰팡이를 제거하고 잘 말렸더니 서서히 엷어졌다. 장판 걷고 보일러 틀고 바닥을 말렸는데 여름에 더워서 고생 많이 했다.
집은 2년 전 리모델링 한 집이라 도시 아파트처럼 깨끗해졌다. 바닥에 방통작업이 안되었는지 고르지 못한 것이 흠이기는 하다.
유자나무 5그루가 있는 텃밭은
온갖 풀이 덮여 밀림이 되어 있었다. 풀을 낫으로 베고 검은 비닐을 걷어 내고 고랑을 만들려고 하는데 온갖 건축 쓰레기들이 묻혀 있었다.
한 달 정도의 노력으로 밭처럼 만들었다.
양배추는 풀이 무서워 검은색 비닐 멀칭을 하고 심었다. 50 포기 정도 심었는데 폭염이 시작되니 잎이 타들어 시들시들했다.. 다행히 다음날 아침에는 살아 있었다. 너무 마음이 아파 차광막을 씌워 주었다. 그래도 한 달 동안 자라지도 않고 시들었다 살아났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땅이 나빠 그런가 하고 포기할 정도였다.
파는 장마 전에 심어서 튼튼하게 자랐다.
이곳에 가끔 아주 작은 새가 다녀가기도 했고 땅 속에 지렁이는 많이 있지만 이 작은 새가 먹는지 의문이다. 나비도 다녀가고 좀 큰 새도 다녀간다. 고양이도 한자리 잡고 쉬었다 가기도 한다. 이제 텃밭을 가꾸고 남은 시간 쳐다보느라 심심할 틈이 없다.
유자나무가 네 그루 있는 더 아무것도 안 했는데 초록 열매가 주렁주렁 열려있다. 그런데 약을 안쳐서 나중에는 껍질이 예쁘지 않은데 유기농 유자인가?
이사 후 집안 정리는 끝나가고 차박 준비를 한다. 올해 날씨는 제가 평생 만나보지 못한 날씨다. 한 달 내내 장마로 장판이 축축하여 신경 쓰이더니 장마가 끝나니 폭염이 시작되고 차박은 가을에 떠나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