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널리고 널린 행복하기 위한 방법들을 내 것으로 만들면 행복할까 싶었지만, 행복하지 않았다.
스스로 아무리 성찰을 해봐도 알 수가 없었다.
내게 필요한 것은 지식이 아니라 지혜였다.
내 삶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이 삶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궁금했다.
그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 현자를 찾아가야 하나? 요즘 유명세를 달리는 스님을 찾아가야 하는가? 아니면 철학자를 찾아가야 하는가?
유명한 분들은 다들 바쁘셔서 접근성이 너무 낮았을뿐더러, 과연 내가 그분들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 인지조차 가늠할 수 없었다.
지혜.... 지혜는 어디에 있을까를 생각하고 찾아보다가 도서관을 찾았다.
수많은 책들 한가운데에 서서 나는 길을 잃은 것처럼 보였다. 어디서부터 읽어야 하며 누구의 책부터 찾아야 하는지 혼돈에 빠졌다.
유명한 고전부터 집어 들었다. 제목은 많이 들었으나 읽어본 적은 없는 책이었다.
한 권을 읽고, 두 권을 읽고, 세 권을 읽고, 그렇게 시작된 지혜에 대한 탐구는 현재까지 멈추지 않고 있다.
고전으로부터 시작된 독서는 소설, 시, 수필, 철학, 결국엔 심리학, 정신분석학까지 다다랐다.
나는 닥치는 대로 책을 먹어치우듯 독서를 했고, 한 가지 공통된 지혜를 깨닫게 되었다.
수많은 책들에 날카롭게 박혀있던 진리 한 가지. 그것은 바로, 나 자신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 그것이었다. 그러나 어떻게 나 자신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인지는 깨닫기가 힘들었다.
책 속의 그들은 다들 자신만의 방법으로 자신을 찾아가기도 하지만, 결국 찾지 못하고 실패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떠한 방법으로 나를 찾아야 하는 것일까를 생각했다. 생각에 생각을 반복하고 수많은 도서들을 뒤지고, 수많은 작가들의 생을 엿보아도 정답을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나의 내면은 점점 나락으로 떨어지는 듯했다.
결국 나는 병원을 찾았고, 전문가와 책상 하나를 사이에 두고 앉아 내가 왜 불행한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가 이해해야 할 것은 인간의 불행이 아니라, 내 마음이었다.
수많은 책들 속에 인간의 불행이 존재했다. 그 불행들은 때로는 갑작스럽게 때로는 예고된 상태로 인간에게 찾아왔다. 불행인 줄 알았던 불행이 결국은 행운이 되기도, 결국은 주인공을 더 나은 삶으로 이끌기도, 결국은 모두를 파멸시키기도 했다.
나는 인간의 불행을 연구했다. 그럼으로써 내 인생에 대한 물음표를 해결하고자 했다.
나는 이 불행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이 불행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를 생각하고 또 했다.
나의 성장과정은 빈곤과 방임의 연속이었고, 엄마의 형제들은 나를 정서적으로 학대했다.
어린 시절부터 나는 엄마의 감정 쓰레기통이었으며, 그 역할은 지금까지 변함이 없다.
어린 나이에 모두가 외면한 정신지체 이모와 외할머니의 대소변을 받아내야 했으며, 노환이었던 할머니에 대한 살해 충동에 시달려야 했다. 그 충동이 너무도 끔찍해서 가출을 했고,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서 돈을 벌었다. 시간이 지나 할머니는 돌아가셨고, 나는 그녀의 영정사진을 보며 단 한 방울의 눈물도 흘리지 않았다.
내가 흘려야 할 눈물은 대소변이 묻은 천기저귀를 빨면서, 무거운 할머니의 몸을 수십만 번 일으키며, 정신지체 이모의 식사를 차리며 말라버렸다.
엄마의 형제들은 그런 내게 "독한 년"이라고 했다.
그들은 할머니의 영정사진 앞에서 세상을 상실한 것처럼 울었는데, 누군가의 눈물이 그토록 천박하게 느껴진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들은 장례식이 끝나고 그 눈물이 마르기도 전에 서로 조의금을 갖겠다며 다투기 시작했다.
아주버님이 재수 씨에게, 재수 씨가 아주버님에게, 형이 아우에게, 아우가 형에게 욕을 했다.
욕설이 난무한 현장에서 나는 엄마의 말을 떠올렸다.
" 삼촌들은 니 아버지나 마찬가지다 "
그들 중에 하나는 어린 나의 가슴을 보며 성적인 희롱을 하기도 했다. 옆에 있던 엄마는 그와 함께 웃었다. 나는 몹시 수치스러워서 가슴을 칼로 도려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그들은 웃었다.
그들은 내가 있거나 말거나 엄마에게 재혼 이야기를 꺼냈으며 내가 마치 엄마 삶의 걸림돌인 것처럼 느껴지게 만들었다.
진로를 정해야 하는 나이가 되었을 때, 엄마는 내게 말했다.
" 공부만 열심히 하면, 삼촌들이 대학은 보내줄 거다."
그때, 나는 대학은 절대 갈 수 없겠구나. 절대로 안 되겠구나. 하고 공부를 놓았다.
그 이후로 수업시간은 수면으로 채워졌다.
그 모든 순간들에, 자신의 형제들이 자신의 딸에게 "독한 년"이라는 욕을 할 때, 자신의 남동생이 자신의 어린 딸에게 성적인 희롱을 할 때, 자신의 형제들이 서로에게 미루던 자신의 엄마를 자신의 딸이 책임지려 할 때, 그 모든 순간에 나의 엄마는 나를 보호해줘야 했다. 그것이 부모의 의무다. 힘이 없는 내 아이가 그러한 '취급'을 받게 해서는 안됐다.그것은 명백한 그녀의 실수였다. 나의 유년시절은 온통 그녀의 실수로 얼룩져있다.
정서적 학대를 당하던 순간으로부터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나는 아직도 그들을 떠올리는 것이 고통스럽고 내면의 분노가 용암처럼 부글거리며 끓어오르는 것을 느낀다. 죽을 때까지 그들의 모습을 보고 싶지 않지만, 여전히 나의 엄마는 그들을 "아버지"처럼 대하기를 바라고 요구한다.
세상의 그 어떤 아버지도, 딸을 그런 식으로 대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들은 내 아버지가 아니라고 말했다.
엄마는 다들 살기가 어려워서, 형편이 그러다 보니 그런 거라고 내가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녀는 내가 이해하지 못하면 나만 속이 상하고, 그러면 그건 내 손해라고 말한다.
나는 울면서 말했다.
그 상처는 절대 없어지지 않을 것이고, 잊을 수도 없을 것이며 그들은 내 아버지가 아니고, 엄마 당신의 형제들일뿐이다. 그들에게 잘해주고 싶으면 엄마가 잘해주는 것은 막지 않겠으나 내게 그 어떠한 바람도 갖지 말라며 두 시간에 걸쳐 나를 설명했고 이해시키려 노력했다. 그리고 몇 달 뒤, 그녀는 다시 내게 그들 중 하나가 입원한 병원에 함께 가자고 요구해왔다.
나는 이제 화를 낼 기운도 없어, 조용히 거절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가슴 저 아랫부분의 통증을 자각하며 스스로에게 말했다. 이 관계에는 어떤 희망도 없다고.
엄마의 엄마, 그러니까 나의 외할머니는 불행한 삶을 살았다.
남편은 무능했고, 자식들은 여덟이나 되었으며, 어떤 아이는 아플 때에 병원을 데려가지 못해 정신장애를 앓게 되었다. 일제의 통치가 일어나던 시절이었으며, 가난하고 배고프던 시절이었다.
자식의 애착은커녕 굶어 죽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던 시절이었다.
나의 엄마도 불행한 삶을 살았다. 한국전쟁을 겪어낸 세대였다.
많은 형제들 틈바구니에서 큰아들은 큰아들이기 때문에, 막내는 막내기 때문에 공부를 했지만 자신은 할 수 없었다. 지긋지긋하게 일했으며, 먹을 건 늘 부족했다.
첫 번째 결혼은 실패했고, 두 번째 결혼 역시 실패로 끝이 났다. 산 입에 거미줄을 칠 수 없어 공장에 다니면서 일을 했고, 딸 하나를 겨우겨우 키웠다.그 불행의 대물림은 나에게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나는 아무것도 선택한 것이 없었지만 불행해야 했다. 그저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거란 아쉬움만 품을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그녀의 말이 옳을지도 모른다.
다들 가난해서, 가난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옹졸하고 절대 베풀 줄 모르며, 손에 쥔 것은 악착같이 놓지 않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이 가난하다고 해서 내게 함부로 할 권리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가난하다고 해서 힘없는 약자에게 함부로 해도 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인간의 불행을 이해하기 위해, 더불어 내 인생의 불행을 이해하기 위해, 정신분석과, 심리학 서적을 파고들었는데, <사례 중심의 이상심리학>이란 책에서는 미국 정신의학회에서 발간한 DSM-5에서 분류하는 모든 종류의 이상심리와 그것이 발생하는 원인에 대해 상세히 기술한다.
정신장애의 진단 및 통계 편람(Diagnostic and Statistical Manual of Mental Disorder:DSM)은 미국 정신의학회(American Psychiatric Association:APA)에서 발간한 책자이다.
이 책자의 목적은 인간의 심리적 증상과 증후군을 위주로 정신장애의 분류체계를 확립하여 진단, 치료, 경과 과정, 예후 등을 보다 과학적이고 효율적으로 적용하려고 한 것에 있다.
DSM은 진단체계의 일관성, 신뢰도와 타당도 등 여러 가지 비판을 받고 있지만 오늘날 정신의학계는 물론 인접 학문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는 가장 권위 있는 지침서로 활용되고 있다. <사례 중심의 이상심리학 中>
이 책에는 이상행동의 판별 기준으로부터 시작되어 정신장애의 범주와 유형, 신경발달장애, 정신분열 스펙트럼 장애, 양극성 및 관련 장애, 우울장애, 불안장애, 강박 및 관련 장애, 외상-및 스트레스 사건-관련 장애, 해리장애, 신체증상 및 관련 장애, 급식 및 섭식장애, 배설장애, 수면-각성 장애, 성-관련 장애, 파괴적 충동 통제 및 품행장애, 물질-관련 및 중독 장애, 신경인지장애, 성격장애, 기타 문제들까지 해설하며 모든 이상심리의 원인을 이렇게 정의한다.
리스크 팩터(risk factor)는 '위험요인'이라고 하는데, '정신장애를 발생시킬 가능성을 증가시키는 어떤 조건이나 환경'을 뜻한다. 예컨대 위험요인은 기질적(예:유전자 이상, 평균 이하의 지능, 까다로운 기질), 인지적(예: 부정적 사고방식, 잘못된 귀인), 심리사회적(예:양육 미숙, 학대와 방임, 부모의 무질서, 별거, 이혼, 스트레스), 인구통계학적(예:성별, 나이, 결혼 여부, 자녀의 존재), 기타 여러 영역들(예: 신체적 콤플렉스, 빈곤, 사회적 불평등, 문화적 배경)의 모든 맥락에 걸쳐 있다.
불행의 대물림을 끊어내기를.
인간이 경험하는 이상심리의 원인은 무수히 많다.
무수히 많은 원인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원인 중 하나가 바로 사회경제적 빈곤이라고 책은 말한다.
부가 대물림되듯이, 빈곤도 불행도 대물림된다.
그런 현실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극복하고 싶었다. 가난을 손가락질하는 많은 사람들을 향해 보여주고 싶었다. 가난도 극복할 수 있다고, 결코 가난이나 내가 가진 조건이나 내가 선택하지 않은 부분들에게 무릎을 꺾고 싶지 않았다.
가난한 많은 사람들이 어려운 마음을 갖지만, 모든 사람들이 그런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그런 이들을 보기도 했다. 그래서 더 굴복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기 위해 나 자신을 채찍질하며 살았다. 그 시절을 통과한 지금은 안다. 그것이 나에 대한 일종의 학대와도 같았음을.
나의 치료는, 그동안 거부해왔던 나를 받아들이는 과정이다. 잃어버렸던 나를 찾는 과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