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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흔들리는 민들레 Jul 15. 2024

맺는말. 타인의 고통은 결코 대신해 줄 수 없다.

당신과 나의 고통





이주 전, 작은 아이의 단짝 친구가 폐렴으로 입원을 했다. 그 소식을 듣고 불길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지만 애써 모른척하고 있었다. 워낙 붙어 다니던 아이들이라 불길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이 친구의 입원이 생각보다 길어지면서 점점 더 불길한 느낌이 강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며칠 뒤 아이의 기침이 심해졌다. 동네 소아과에 갔더니 입원치료를 해야 한다고 했다. 요즘 큰 병원에 입원하는 게 파업으로 만만치가 않아 부담스러웠다. 제일 가까운 대형병원에 전화를 해봤더니 아예 소아병동이 없다고 했고 조금 먼 곳에 전화했더니 선생님이 휴가 중이라고 했다. 일단 응급실을 통해서 와보라고 했지만 내키지가 않았다.


수소문 끝에 아동전문병원으로 갔고 엑스레이를 찍어보기도 전에 청진단계에서 바로 입원결정이 났다. 그리고는 딱 한 개 남은 병실에 겨우 입원을 할 수 있었다. 기적처럼 느껴졌다.






0세부터 15세까지 다양한 나이의 소아청소년들이 다양한 증상으로 입원해 있었다. 아이가 가끔 복통이 있어 병동 복도를 걸어 다니고 있었는데 12개월 아이가 기저귀를 차고 엄마 손을 잡고 걸어가는 게 보였다.

통통한 엉덩이 뽀글거리는 머리카락, 내 손바닥보다 작은 발로 걷는 게 너무 신기해 보였다.

간호사님들은 오징어잡이 배처럼 수액을 메단 카트를 밀고 다니며 병실을 돌면서 아이들 체온을 재고, 약을 나눠주고 수액을 교체했다.


아이는 삼일이 지나자 집에 가고 싶다고 오십 번쯤 말하기 시작했다. 들어주고 달래고 어르며 시간을 보냈다. 잠이라도 좀 푹 자면 좋을 텐데 밤에도 잘 안 자고 깨다 자다를 반복했다. 민감한 아이라 조그만 소음도 민감하게 감지했다.


아이는 아팠고, 퇴원하고 싶어서 고통스러웠다. 그건 아이의 고통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아픈 것을 보는 건 힘든 일이다. 그러나 대신해 줄 수 없다. 그건 아이가 견뎌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기다림이다.


많은 순간을 사랑하는 이들의 고통을 덜어주고 싶어 그들의 고통을 끌어안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건 사랑도 그들을 아끼는 마음도 아니었다. 내 필요이자 충족이었다. 타인의 고통을 민감하게 감지하는 기질의 필요였던 것이다.


 시고통에 대해 쓰면서 내 안의 고통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글을 읽을 누군가가 고통을 잘 통과하기를 기도하면서, 조금 더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잘 살아내기를 기도하는 마음이었고 또 나 자신 역시 그러하기를 바랐다.


진짜 사랑과 아낌은 대신해 주는 일이 아니라 견디는 일이다. 그 사람이 고통을  통과할 때까지 묵묵히 기다려주는 일이다. 이 긴 챕터의 글들을 통해 나는 고통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통과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이제 나를 묵묵히 견디고 기다려주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사랑이라는 걸 깨달았다. 많은 시간 나를 사랑하지 못해 타인을 사랑하려고 했지만 이제 나는 나를 사랑하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 사하다. 고통 덕분이며 독자님들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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