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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흔들리는 민들레 Jul 16. 2024

4. 나는 전적인 피해자가 아니다.-주도권 갖기

나르시스트와 살아야 한다면




내재된 분노


내재된 분노


나는 어딜 가나 눈치를 봤다. 그래도 내면에는 분노발작버튼이 있어서 불합리하거나 부조리한 것을 보면 가만있지 못하는 습관이 있었다. 이상하지 않나, 그렇게 비난만 받으며 자란 아이가 왜 부조리 앞에서는 손을 들고 그걸 바로잡으려 했을까. 기질 탓도 있겠지만 그건 어쩌면 자랄 때 경험한 부당한 대우를 바로잡지 못했음에 대한 내재된 분노 때문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엄마는 언제나 나를 깎아내렸고 그건 숨 쉬는 일처럼 무척 당연한 일이어서 학창 시절에는 모든 아이들이 그렇게 자라는 줄 알았다. 명절날 내게는 그런 질문들이 날아왔다. 그동안 엄마 말 잘 들었니? 엄마가 너 때문에 저렇게 재혼도 못하고 고생하면서 사는데 네가 말을 잘 들어야 하지 않니? 공부는 어느 만큼 하니? 엄마가 너 때문에 고생하는데 공부 열심히 해서 엄마 호강시켜 줘야지? 이상하게도 같은 또래의 사촌들에게는 그런 질문이 이어지지도 뭔가 불필요한 존재를 보는 것 같은 눈빛도 없었는데 나에게 주어지는 그들의 태도가 알 수 없는 불쾌감을 주었다.


그런데 더 불쾌했던 것은 엄마의 태도였다. 엄마는 그런 자신의 사정이 나 때문이라는 듯 그들의 말에 아무 말도 덧붙이지 않았다. 그들이 돌아가고 난 후에도 아까 속상했냐거나 기분이 안 좋진 않았냐는 등의 질문은 없었다. 나는 급기야 명절마다 독서실에 가서 공부하는 척(?)을 하면서 하루를 굶었다. 그들과 밥을 먹으면 체할 것 같고 불필요한 취급을 받고 싶지 않아서 그들이 오면 인사만 하고 가방 가득 집현전에서 빌린 책들을 넣어 독서실에 갔다. 밤을 새우며 책을 읽으면 배가 고팠다. 그래도 돈을 아끼려고 아무것도 안 사 먹었다. 그들이 돌아가면 가야 할 집에서 이어질 엄마의 경멸 어린 시선이 예상되어서  그러기도 했다. 꼬박 하루를 굶고 돌아간 집에서 엄마는 나를 경멸 어린 시선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왜 명절날 집을 비우냐는 것이었다. 왜, 사랑받을만한 행동을 하지 않느냐는 질책 섞인 질문이 거의 이틀을 굶은 내게 화살처럼 날아들었다.







꽃이 나를 위해서 존재하나?



존재의 이유


부당하다. 그건 너무나 부당하다. 나의 존재가 엄마를 위한 것이어야만 하나? 엄마의 삶이 힘든 것이 나 때문인가? 내가 공부를 잘하는 건 엄마를 위해서고, 내가 말을 잘 듣는 것도 엄마를 위한 것이어야 하나? 엄마를 호강시켜줘야 하는 것이 나여야 하나? 나는 그녀를 위한 존재인가? 그렇다면 그들의 자녀는 왜 그런 존재가 아닌가? 자신들의 삶은 힘들지 않으니까?

자신들의 삶이 힘들지 않다면 왜 고생하는 누나나 여동생을 돕지 않나? 나는 그런 말들을 들으면서도 복종하고 사랑받기 위해 노력해야 했던가? 내가 왜 그래야 하나?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지는 것이 어른이다. 내가 자라며 봤던 어른들 중 누구도 자기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았다. 엄마는 자신의 선택으로 낳은 자녀에 대해 정서적으로 책임을 지지 않았다. 또 그런 엄마를 안타까워했던 그녀의 형제들은 자신의 안타까움(감정)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았다. 정말 안타깝고 마음이 아팠다면 어린 조카에게 의무와 책임을 지울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도움을 모색했어야 옳다. 그게 자신의 감정에 대한 책임이다. 자기감정에 대해 책임지는 것이 어른이다. 들은 책임져야 할 자신의 것들을 책임지지 않기 위해 힘없는 아이에게 그 책임을 전가했다.


엄마는 지금도 형제들에게 내 험담을 하고, 나는 쓰레기가 되었다. 그녀는 여전히 자기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고 있는 것이다. 에 대한 그들의 정의는 진짜 내 존재에 대한 정의가 아니라 그들의 자기 정의이다. 내가 그동안 분노하고 갈등했던 것은 그것이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며 그래서 나는 엄마를 버렸다. 그들에게도 기회를 주어야 하지 않나, 안타까운 누이를 돌볼기회, 그리고 형제자매들에게 사랑받을 얼마 남지 않은 마지막 기회, 자신들의 감정을 책임질 기회. 그들은 나의 어린 시절을 빼앗았지만 나는 그들의 기회를 빼앗지 않으려고 한다. 나는 그들과 다르다.






책임?그게 뭐지?


나르시스트의 책임


나르시스트는 자신의 책임을 수용하지 않는다. 열등과 우월의 관점을 모든 상황이나 대상에 적용하기 때문인데 자신은 우월하므로 책임 같은 건 필요하지 않다. 그들에게 책임은 열등을 의미한다. 우월한 사람은 실수하지 않으며 그러므로 책임질 이유도 필요도 없는 것이다. 혹은 나의 친정엄마처럼 그렇게 생각하기도 한다. 자신은 우월하므로 실수를 하지 않으며 그러므로 모든 관계나 상황에서 피해자이다, 피해자에게는 어떤 책임도 없다고 생각한다.

타인의 책임을 대신해 줄 필요 없다. 내 삶 책임지며 살아야 할 일만도 벅찬데, 타인의 책임까지 대신해 줄 필요는 없다. 나는 그들을 구원할 수도 그들의 고통을 줄여줄 수도 없다. 삶에서 개인이 지고 가야 할 책임은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다. 그게 삶의 본질이다.



전적인 피해자는 없다.


이 글을 쓰면서도 내가 혹시 나를 피해자의 위치에만 두고 있는 것은 아닌지 경계한다. 그렇다. 나는 그들로부터 피해를 입었다. 그건 사실이다. 그러나 전적으로 피해자는 아니다.

나는 보이지 않는 선택을 했다. 그들과 같이 있는 것이 고통스러우면서도 함께 있기를 선택한 것이다. 나는 그들을 떠나지 못했고 버리지도 못했다. 학대를 당했다고 해도 성인이 된 이후의 일은 내 책임이기도 하다. 타인의 감정, 타인의 삶을 책임지기 이전에 나는 내 삶을 책임져야 했다. 내 감정에 책임을 가져야 했다. 그런데 나도 그들처럼 그렇게 하지 못했다.

뼈 아픈 자각이기도 했고 그것이 자책이 되기도 했다. 그런 뼈아픈 자각이 나를 학대로부터 걸어 나오게 했다. 이제 그만.이라고 말할 수 있게 했다. 불교에 그런 말이 있다. 같은 화살을 두 번 맞지는 않아야 한다고. 앞으로 은 화살에 맞는 일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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