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투명한 자유 Jun 25. 2024

친정엄마

그 아리고 애틋한 이름

"엄마가 갑자기 호흡곤란이 심해  응급실 가는 차 안에서...

방금 돌아가셨어.  얼른 올라와."


지방에서 살고 있는 나는 추석 연휴가 끝나 직장에 복귀했고, 오후에 다급한 목소리의 전화를 받았다.

늘 마음의 준비를 한다고 했어도 너무도 갑작스레 접한 부음이었다.

임종을 지켜드리지 못한 미안함과 뭐부터 해야 할지 모르는 혼란스러움이

교차한 체 아이들을 데리러 어린이집에 가기 전에 집에 들러 옷가지를 챙기는데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아 나사가 풀린 로봇처럼 옷장의 옷들을 마구 쓸어 담고 또 담았다.

그런데 정작 슬퍼할 시간조차 제대로 갖지 못하고 정신을 부여 잡기에 바빴다.

나도 엄마이기에 자식들을 챙기느라 정신줄을 놓을 수 없는 게 그리 서글플 수가 없었다.


엄마가 되고 나니 돌아가신 엄마가 매일 그립다.

30년을 넘게 엄마의 딸로 살다가 갑자기 아내가 되고 엄마가 되니,

오로지 나만 챙기던 삶에서 누군가를 온전히 보살피고, 이끌고, 책임지는 삶을 살게 된다.

여자가 엄마가 되기 전엔 상상도 못 할 희생과 헌신의 삶 말이다.

'친정 엄마'라는 말만 들어도 너무 보고 싶고 그리워서 눈물이 난다.

난 둘을 키우면서도 이렇게 힘든데 우리 엄마는 셋을 혼자서 어찌 키우셨을까?     

"엄마 거기서는 이제 아프지 않고 행복하시죠? ”


다섯 살인가 여섯 살 때 엄마가 암 수술을 하셨다.

기억이 단편적으로 나는 어린 시절인데 엄마가 입원해 계시는 동안

언니랑 유치원에서 배운 천자문을 병원 침대 앞에서 의기양양하게

외웠던 기억만은 생생하게 난다.

엄마가 기뻐하시던 모습에 마냥 신이 났었다.

나는 엄마 옆에서 조막만 한 손으로 어깨와 다리를 주물러 드리고

한번 주무르고 그때마다 "엄마 시원해?”를 끊임없이 확인하던 속없는 막내딸이었다.     

어릴 적 아픈 엄마를 보아 왔기에 엄마가 아플까 늘 걱정이 되었고

엄마가 걱정하시는 일은 안 하고 엄마가 행복해하시는 일이 무엇일까 고민하며

그 시기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려고 노력하며 살았다.

"안 낳으려던 막내가 제일 엄마 마음 편하게 해 주네."

라는 말 한마디에 엄마가 마음 편하게 웃어 주셔서 그것만으로도 기뻤다.

학생 때는 돈을 못 버니 엄마한테 손 편지를 꽤 나 자주 썼고

내가 할 수 있는 일 중에 엄마가 기뻐하시는 일인 공부를 열심히 하려고 했다.  


그렇게 학생 시절을 지나 직장인이 되고 결혼을 하고 아이가 바로 안 생겨 어렵게 아이를 낳고

나도 엄마가 되면서 엄마의 일생을 더 잘 이해하려고 노력한 것 같다.

나보다 어린 나이에 세 아이의 엄마가 된 우리 엄마!

엄마에 대한 나의 기억은 다 연민으로 물들어 있다.

여자로서의 일생이 가련했다.

자식 셋 먹는 것 입는 것 신경 쓰시느라 태어날 때부터 약한 몸으로 평생을 일만 하신 게

정말 안쓰럽고 마음 아팠다.

내 딸들만은 많이 배우고 다른 삶을 살기를 원하셨기에 기대에 부응하고자 노력했다.     

어려웠던 그 시절 여자는 안 가르쳤다며

못 배운 것에 대한 여한이 많으셨고 삐뚤삐뚤

쓰는 글자 때문에 글씨 쓰는 자리에 가시는

것을 두려워하셨다.

교육만 제대로 받았어도 간호사가 되는 게 꿈이라고 하셨었다.

꿈 많던 소녀였던 엄마의 젊은 시절을

돌리고 싶었다.

배움에 대한 열망이 가득했던 엄마는

공부하라고 말 안 해도 열심히 하는 막내딸을 이뻐하셨고 집안 형편상 다니던 학원을

못 보내게 되어 미안해하시며 우셨던 날이 기억난다.   

기억나지 않는 엄마의 젊은 시절 사진을 보니 결혼하지 않으셨다면 지금의 나도 존재하지 않겠지만 엄마를 위해 아프지 않으시던

그 젊은 시절을 돌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한다.

엄마를 추억하는 시간은 그립고도 아프다.

‘ 다음 생엔 엄마가 내 딸로 태어나 주셔요.

진짜 더 많이 사랑해 주고 엄마하고 싶었

공부 다 하게 해 드릴게요.’   


평생 운전면허가 없어 운전하는 딸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셔서

모시고 여기저기 다녔었는데 그땐 이미 몸 여기저기에 병색이 완연했을 때였다.      

딸이 운전하는 차를 타는 건 좋아하셨어도

몸이 힘드니 장거리 여행은 힘들었고 평소 좋아하시던 찜질방이나 사우나로 설득해야

겨우 따라나서셨다.  

그렇게 기다리던 막내딸의 임신 소식을 듣고 그것도 아들이라고 더 좋아하셨던 기억이 난다.

임신 중기 몸이 더 무겁기 전에 엄마 모시고 나들이를 자주 했었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건 61세 환갑 때이다.

인생 60부터라고 남들은 자식들 다 키우고

이제 좀 여행도 다니고 여유롭게 지낼만할 시기인데 말이다.

"그릇을 자꾸 떨어뜨리고 젓가락질이 잘 안 된다."

하셔서 병원을 모시고 갔을 때 지방 병원은

오진이 심하여 목디스크라고 판정하고

치료를 했었다.

치료해도 차도가 없고 몸이 아픈 상태에서

큰 딸이 쌍둥이를 낳자  몸조리와 육아를 도와주러 네 집에 머무셨고

결국은 집안일과 육아가 버거우셔서

다시 서울의 대학병원 신경과를 찾아갔다.     

결국 루게릭 판정을 받으셨고 10만 명에

한 두 명 꼴로 걸리는 병이 어쩌다 평생 아프시고 고생만 하신 우리 엄마에게

찾아온 건지 세상이 다 원망스러웠다.

몸을 움직이게 하는 운동 세포만 선택적으로 사라지는 질환이라 보통 처음에는 하체를 쓰지 못하고 앉아만 있다가 결국은 상체 쪽 근육 마비 순으로 진행하게 된다.

음식을 삼키는 근육도 마비가 되어 주사기로 유동식 식사를 하다가 호흡곤란이 와서 혀도 굳고 호흡기 착용을 위해 목을 뚫어야 하기에

목소리를 잃게 된다. 결국 운동세포가 소멸되어 생명이 마감되는 무서운 질환이다.    


엄마의 경우 병의 진행 속도가 빠른 편이라

숨 차 하시고 걷는 것도 바로 못하셨다.

투병 시작 초창기에 소파 한쪽 구석에 늘 앉아만 계셔야 했으니

꼼짝달싹할 수 없는 상태로 얼마나 불안하셨을까?

스스로 힘으로 걸을 수 없을 때의 그 막막함..

완치란 없고 나중에 근육이 빠지고 뼈만 남게 돼서 죽음을 맞이하는 걸

김명민과 하지원이 나오는 영화 "내 사랑 내 곁에"를 보셨기 때문에

간절한 눈빛으로 나에게 부탁을 하셨다.     

"베란다에서라도 뛰어내리고 싶은데 몸이

말을 안 들으니 죽고 싶어도 쉽지가 않구나.

엄마 좀 편하게 보내주라.

너밖에 말할 사람이 없다. 제발 부탁한다.

지금부터 수면제 좀 처방받아서 모아줘!"     


그 말을 듣는 데 마음이 찢어질 것 같았다.

자식이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을 엄마는

원하고 계신 것이니..     

그 후 8년이라는 투병 생활 내내 늘 오늘이 마지막일 것  같은 마음으로 최선을 다했다.

엄마는 하루가 다르게 야위어 가고 앉는 것도 힘들어 누워만 계시는 나날이 늘었다.

온몸으로 통증이 심해 열이 났다가 등이 가라지 듯 아프신지 진통제 없이는 하루하루가

길게 느껴졌다. 병원도 여러 번 옮기고 간병인도 몇 달에 한 번은 바뀌었다.

고통스러워하시는 엄마를 보면

더 살아계셔 달라는 것도 자식인 내

욕심인 것만 같아 마음이 늘 무거웠다.     

루게릭 판정을 받은 그 해 나는 뱃속에

큰애를 임신 중이었는데

몸도 마음도 부서질 듯 위태위태한 나날을 보냈다.

임신해서 엄마 걱정에 참 많이 울었었다.

당장 내가 낫게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생각에 괴로웠고 주말마다 친정에 엄마 보러 만삭 때까지 열심히 광주를 다녔다.

주말에 엄마를 보고 돌아오는 길엔 늘 오늘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밤이 두려웠다.

자다가 엄마의 부음을 들을까 불안함에 잠도

깊이 못 잤던 것 같다.    


루게릭이란 환자 본인에겐 참으로 잔혹한 병이 아닐 수 없었다.

기억이 없는 것이 차라리 나을지도 모르겠다.

어떤 질환도 가족들에겐 마음 아프고 고통스럽겠지만 환자 본인에게

가장 잔인한 최후가 어떤 것일까에 대한 생각도 많이 했다.  

앞으로 나에게 닥칠 죽음에 대한 고민도 해봤다.

잘 죽는 것에 대한 준비, 인간의 존엄은 최소한 지키고 죽음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 등을 하며 죽음에 점차 회의적이 되었다.

남겨진 자의 슬픔이기만 해서는 안 되기에 엄마를 기억하고 사랑하는 일은 기록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동안 더 엄마를 추억할 수 있어 이 글을 쓰는 시간이 소중하고 감사하다.


정신은 또렷하고 맑은데 근육이 굳어져서 움직일 수 없는 몸속에 갇히게 되고 결국 호흡을 위해 목소리를 잃고 눈동자만으로 의사소통을 하는 상황에까지 가게 되었다.     

추석 명절에 온 가족이 다 모인 자리에서 한 명 한 명 눈동자로 다 기억하고 간직하시려는 듯 뚫어지게 보셨던 모습이 애처로웠다.

목소리가 안 나오니 불러 세울 수조차 없는

상황에 눈동자만 깜박이며 자식들 모습을  

눈에 담으셨다.

그게 마지막일 줄 알았더라면 조금이라도 엄마 옆에 꼭 붙어 한마디라도 더 할걸..  

나도 아들 둘이 내 옆에만 달라붙어 있을 때라서 그러지 못했던 것이 못내 죄송스럽고 마음이 아린다.     

     

'보고 싶은 엄마! 지금은 볼 수 없지만 마음속에 그대로 살아계시기에 그리고 지금은 그곳에서 안 아프시기에 엄마를 생각하면 행복한 기억만

하려고 노력한답니다.

늘 힘들 때 엄마라면 지금쯤 나에게 어떠한

말씀을 해 주셨을까를 떠올리며 엄마의 목소리를 기억하려고 애를 써요.'     

     

내가 기억하는 가장 따스한 사랑이 아닐까 생각한다.   

글을 쓰는 이 순간에도 엄마가 사무치게 그립다.





매거진의 이전글 한 달에 한번 엄마를 만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