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년 7/3일
저는 부모님과 함께 23년 7월 3일 ~ 7월 22일까지 남미 여행을 했습니다.
그 소중한 추억을, 마음을, 감사함을 이렇게 기록해 봅니다.
(( 저의 일기를 바탕으로 글을 작성하였습니다.))
오랫동안 버킷 리스트로 간직해 온 부모님과의 남미 여행!
코로나로 늦어졌지만 드디어 실천 완료했습니다.
'이번 생의 효는 여기까지'라는 말을 무한 반복했지만, 막상 여행이 끝나고 나니 좋은 추억과 아쉬움만 남습니다.
페루 마추픽추를 가는 것은 오래전부터 아빠와 저의 꿈이었습니다.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요. '마추픽추 보러 가자'라는 말을 수도 없이 했고,
'30살 기념, 환갑 기념으로 남미 여행을 가자'라고 이야기하곤 했습니다.
그러던 중 코로나가 발생하였고, 남미는 기약 없이 미루어지게 되었습니다.
22년 해외여행이 풀리면서 더 이상 남미 여행을 미룰 수 없어 큰 결심을 하고 23년 7월 드디어 남미 여행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너무 닮은 아빠와 저, 그리고 고산병을 이겨내고 여행을 함께한 엄마,
평범한 대한민국 한 가족의 20일간의 남미 여행 이야기입니다.
비행기 티켓을 2월에 구매하였으니 5개월 정도를 준비한 여행이다.
마음으로는 몇 년 동안 준비를 했지,
나는 원래도 계획적인 사람이지만 부모님과 함께하는 여행에 만발의 준비를 했다.
남미를 향하는 시작의 미국 환승부터 다시 한국으로 들어오기 직전 도하투어까지 모든 것을 계획했다.
그렇게 나름 확실한 준비를 마쳤다고 생각을 했고, 마지막까지 짐 확인을 한 뒤, 우리는 공항으로 향했다.
청주에서 인천공항까지 2시간의 버스.
체크인 시간을 고려하더라도 여유 있게 공항에 도착을 했다.
작은 캐리어 두 개와 배낭여행용 백팩으로 수하물을 부칠 필요도 없었다.
문제는 비행기 좌석.
24시간 이전에 좌석 선택을 할 수 있어서 전날 밤부터 체크인에 도전을 했다.
그런데 다 같이 앉아갈 좌석이 없었다.
이상했다. 한 번에 예약을 했는데 좌석이 왜 이렇게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인지.
아침에 집에서 아시아나 고객센터에 전화까지 했는데, 공항 카운터에서 직접 확인을 하라는 대답을 들었다.
공항에 도착 후 셀프 체크인에서 먼저 해보았는데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바로 카운터로 향했고, 정말로 좌석이 없었다.
맙소사, 인천에서 LA까지는 11시간의 비행이다.
멀리멀리 앉아서 떨어져 가고 싶지 않았다.
(당연히 부모님도 원치 않으셨다.)
'만석이고... 자리가 없네요...'라고 말하던 항공사 직원이 우리 가족을 슥- 훑어? 보았다.
특히 엄마, 아빠를
그러더니 '세 분 다 건강하시죠? 혹시 비상구 좌석 괜찮으세요?'
'네!!!!!!!!!!!!!!!! 얼마 추가인가요?'
다행스럽게도 비상구 자리가 남아있었다.
1인 15만 원씩 추가 결제하고 비상구 자리를 결제했다.
역시 돈이 최고다.
사실 항공권을 예매할 때 추가 금액을 내고 사전 좌석 지정을 할 수 있었는데,
그래서 나는 당연히!
'우리 가족 붙어갈 자리는 있겠지' 하고 좌석을 지정하지 않았었다.
덕분에 돈 더 쓰고 더 편한 자리에 앉았다.
비행기를 기다리는 동안 미리 준비했던,
여행 기간 동안 주의사항을 적은 서약서에 서명하고 사진도 찍으며 시간을 보냈다.
아빠도 기분이 좋으셨던지 사진 찍는 것에 나름 적극 동참해 주셨다.
(그렇지만 이 서약서는 페루에 도착하기도 전에 무용지물이 되어 버렸다. ㅎㅎ)
드디어 보딩 시간! 비상구 자리에 착석을 했다.
친절한 승무원이 비상구 주의 사항을 안내해 줬고,
11시간의 비행 동안 그나마 조금은 편한 비상구에 앉는다는 것이 기분 좋았다.
첫 번째 기내식은 이륙을 하자마자 나온 느낌?
와인 한잔과 함께 가볍게 시작했다.
(이 맛에 장거리 노선 타는 거지 ㅎㅎ)
두 번째 기내식까지 마치고,
중간중간 앞쪽에서 스트레칭도 시원하게 하면서 11시간의 비행 끝에 LA에 무사히 도착했다.
남미로 향하는 길에 첫 번째로 걱정했던 미국 환승 심사가 다가오고 있었다.
주어진 환승 시간은 3시간이었다.
수하물을 찾을 필요가 없기 때문에 시간은 여유가 있었다.
그렇지만 나의 초조함이 티가 났는지 엄마 아빠도 긴장한 듯 보였다.
'여유 있다. 천천히 해도 된다.'
그렇게 아빠에게 신신당부를 했는데, 아빠는 사람들이 일어나는 모습을 보고 짐을 내리러 바로 출동했다.
(비상구 자리라 짐이 앞쪽 짐칸에 있었다.)
그리고 아빠의 뒤에 다른 승객이 바로 줄을 섰다.
나는 마지못해 따라 일어났고 여유 있는 공간에 서 있었다.
그런데 아빠가 짐을 꺼내면서 가방으로 뒤에 승객을 살짝 쳤다.
어찌나 그 모습이 답답하고 거슬렸던지... 보고 싶지 않은 모습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엄마가 서두르라고 했단다. 하...)
포기하고 나도 엄마, 아빠 뒤에 붙어 바로 비행기에서 내렸다.
그리고 잔소리를 시작했다.
‘내가 누누이 말하지 않았냐, 서두를 필요 없다. 여유 많다 우리. 공항에서 오래 기다려야 한다. 앞으로 절대 그러지 말아라. 급하면 내가 말해 주겠다.’ 폭풍 잔소리를 했다.
여행의 시작을 알리는 잔소리,
야심 차게 준비한 서약서가 11시간 만에 무용지물이 되었던 순간이었다.
나부터 잊었었구나. 반성하자 에라이 효년....
열심히 걸어 미국 입국 심사하는 곳에 도착했다.
입국 심사는 준비해 간 Esta visa 프린트도 보지 않은 채 끝이 났다.
(? 비자 발급에만 거의 8만원 정도가 쓰였는데?)
** 미국은 환승 시에도 Esta visa가 필수다.
인터넷으로 쉽게 발급 가능하며 프린트물도 준비하는 게 좋다고 한다.
그리고 인터넷에는 비자가 있는데도 입국 심사에서 고생을 한 이야기들이 많이 있다.
나도 그 글들을 보고 많은 걱정을 했다.
질문은 ‘너희 가족 돈 얼마 가지고 있어?’ 하나였다.
도대체 나는 어떤 부분을? 왜? 걱정한 것인지.
물론 인터넷 후기에 미국 비자 때문에 고생했던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있기에,
‘우리가 운이 좋은 건가...?’ 생각이 들었다.
너무 쉽게 통과해 허무할 정도였다.
LAX 공항에서 두 시간 정도 시간을 보내야 했다.
두 번의 기내식으로 배도 고프지 않고, 짐을 끌고 다녀야 하니 공항을 돌아다닐 생각조차 못 했다.
잠시 공항 밖으로 한 발짝 나가서 ‘LA 공기다~’ 하고 셋이 웃고 들어왔을 뿐.
‘LA 공항에서 미국 피자 맛 좀 볼래!’라고 생각했던 것도 배가 고프지 않아 싹 사라졌다.
다만 ‘미국 스타벅스 맛만 보자~’ 하고 스타벅스 커피 한 잔을 했다.
응? 스타벅스는 어떻게 이렇게까지 맛 똑같을 수가 있나?
내가 커피 맛을 모른다고는 하지만 특별함이 하나도 없었다.
LA에서 Lima로 향하는 라탐 항공의 좌석은 또 실패였다!
도대체 왜 이렇게 좌석을 배치하는 것이며 얼마나 빨리 줄을 서야 하는 것인가.
이번에는 정말로 셋이 다 떨어져 앉았다.
한 줄에 한 명씩, 아빠, 엄마는 3석 자리의 가운데 좌석,
나는 복도 쪽 좌석이었다.
그렇게 비행기 탑승을 했는데!
가운데 자리인 엄마의 좌석에 복도자리 여성분이 창가 앉은 분 이랑 친구라며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다시 한번 좌석 배치의 의문)
나는 엄마가 복도 쪽에 앉아도 되냐며 확인을 했고, 엄마는 복도 쪽에 앉았다.
그리고 내 자리인 복도 쪽 좌석에 어떤 아주머니가 떡하니 앉아서는 본인이 복도 쪽 앉고 싶다고 승무원에게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네?)
알고 보니 가운데 좌석의 아주머니였다.
승무원은 그럴 수 없다며 내 자리를 마련해 주었고,
순간 나는! 그 아주머니에게 ‘우리 엄마 자리가 여기다 (내 바로 앞 복도 옆) 바꿔 가시겠냐’ 물어봤다.
그 아주머니의 표정이 밝게 싹 변하며 본인은 너무 좋다고, 승무원에게 말을 하라고 했다.
나는 얼른 승무원에게 말을 했고, 역시나 승무원은 문제없다고 했다.
그렇게 나는 엄마랑 둘이 앉아 가는 줄 알았는데...
엄마는 혼자 앞쪽 자리에 앉은 아빠가 신경 쓰였나 보다.
'아빠만 혼자 떨어졌네?'라고 말씀하시길래,
바로 엄마, 아빠를 같이 앉게 해 드리고 내가 아빠 자리였던 가운데로 쏙 들어갔다.
이것은 모두에게 최고의 선택이 되었다.
엄마, 아빠는 붙어 가셔서 마음이 좀 편하신 듯했다.
원래 아빠 좌석의 왼쪽에 키도 매우 크고 체격도 좋으신 외국인 중년 남성분이 있었는데,
내가 가운데 앉겠다고 하자 표정이 매우 밝아졌던 것을 난 느꼈다. (기분 탓인가?)
이곳에 아빠가 앉아 계셨다면 두 분 다 매우 불편하게 9시간 동안 비행을 해야 했을 것이다.
나는 그 가운데 앉아서 꼼짝도 하지 않고 기내식 먹을 때도 최대한 몸을 움츠리고 먹었다.
(아저씨 쪽 팔걸이에 팔 한번 못 올렸다.)
정말 9시간 동안 좌석에서만큼은 기지개 한 번을 펴지 않았다.
기내식 시간, 첫 번째 기내식은 내가 먼저 받았다.
그리고 핸드폰으로 부모님이 드실 만한 '비프'를 써서 보여드렸는데 보이지 않으셨나 보다.
일단 난 받아서 먹을 준비를 하고 귀는 뒤로 향해 있었다.
승무원의 '쏘리, 아이 돈 언더스탠드'를 듣고 바로 상체를 일으켜 뒤쪽을 보며 '비프 비프'를 말했다.
이후 술은 알아서 하셨기를 바랐다. (위스키 드셨단다.)
나는 짜증이 뒤 섞인 여러 가지 감정이 들었다.
생리 전 증후군 때문이라고 핑계를 대보지만.....
(생리 일주일 전이었고 이건 여행에 큰 영향을 미쳤다. - 핑계야....!!)
물론 생리 전 일주일이 아니었어도 그랬을까 싶기도 했다.
부모님이 언어의 장벽에 부딪혀 기내식 메뉴 고르는 것도 어려워하실 줄이야.
부모님 덕분에 영어를 할 수 있게 된 나로서는 참 많은 생각과 안타까운 감정이 들었다.
속상하고 답답한 그 심정을 기내식과 와인으로 달랬다. ㅎㅎ
레드 와인과 물까지 따로 달라고 해서 야무지게 기내식 먹기.
옆에 중년의 아저씨도 나와 같이 레드 와인과 물을 시켰다.
그런데 아저씨는 두 번째 기내식도 나랑 똑같이 커피와 물을 시켰다.
(따라 하신 거 아니냐고요 ㅎㅎ 짠을 하고 싶었다.)
엄마, 아빠께 태블릿으로 영화를 보여 드리고,
나는 스페인어 정리해 온 것을 폰으로 찍어서 열심히 보았다.
자리가 너무 불편했던 탓인지 도저히 잠에 들 수 없었다.
남미 여행을 위해 약 9개월? 정도 스페인어 공부를 했다.
영어가 통하지 않는다는 남미. 부모님을 모셔야 한다는 부담감.
다행히 스페인어는 재미있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는 데, 중간에 난기류로 인해 비행기가 크게 흔들렸다.
갑자기 쿵!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작은 비행기를 탈 때 몇 번의 경험이 있지만 그건 난기류가 아니었다.
이게 진짜 난기류다.
(물론 아무 사고도 없었으니 이것도 별 일 아니었겠지)
나도 너무 놀랐고, 비행기의 모든 사람들이 깜짝 놀랐다.
옆자리 아저씨도 약간 큰소리를 내며 내 쪽에 있는 팔걸이를 깊게 확! 잡는 바람에 아저씨 팔꿈치가 내 옆구리까지 파고들었었다.
그때 나에게는 아빠의 소리가 가장 크게 들렸다.
나는 놀라는 와중에도 웃음이 나와서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나중에 물어보니 살짝 졸다가 쿵! 하는 바람에 너무 놀라 큰소리가 나왔단다. ㅎㅎ
놀랐지만 속으로 어찌나 웃기던지 '스카이 다이빙하겠어?'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그렇게 큰 이벤트를 한번 남기고 9시간 정도의 비행 끝에 리마에 도착했다.
길고 길었던 20시간(+환승 3시간)의 비행이 끝이 났고 7/4일 남미의 문 ‘페루-리마’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