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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필로니 Oct 30. 2024

야구장 헌팅남

헌팅에서 웨딩까지

엘지vs롯데. 엘지의 승리. 지금도 있는지 모르겠으나 잠실야구장은 야구가 끝나면 경기장 앞에 포차 같은 게 열렸었다. 그곳에서 1차 하고 신천으로 2차 하는 게 룰이었던 시절. 친구와 나는 가볍게 1차를 끝낸 후 신천을 향하려고 일어났다.  


"신천 가세요? 같이 한 잔 하실래요?"


웬 남자 두 명이 우리에게 말을 걸어왔다. 어우 뭐야 귀찮게. 됐어요~ 라고 튕기고 싶었지만 키가 컸다. 친구와 긍정의 눈빛을 주고받은 후 마음 같아선 "오케이! 콜!" 하고 싶었지만 품위는 지켜야 했고, 무난하게 대응했다.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어머. 나이도 동갑이다. 자연스럽게 대화를 하며 함께 신천 쪽으로 걸어갔다.


그렇게 동갑내기 남녀는 네 명 모두 엘지트윈스 어린이 회원 출신이라는 귀여운 공통점 덕분에 꽤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로부터 1년 뒤 나는 그 남자 중 한 명과 결혼을 했다.



 




만나자마자 금방 결혼하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했었다. 결혼을 그렇게 쉽게 결정한다고? 그런 내가 사귄 지 6개월 만에 결혼 날짜를 잡고, 또 6개월 후에 결혼을 했다.


4월 헌팅

5월 오늘부터 1일이다 선포

이듬해 5월 결혼


만남의 계기가 헌팅이라 그런지 처음엔 그를 가볍게 생각했었다. 그런데 만나면 만날수록 사람이 참 괜찮은 거다. 사랑이야 뭐 초반엔 누구나 한다. 어떤 남자든 처음엔 상대에게 지극정성이다. 그걸 믿으면 안 된다.


평소 삶의 태도를 봐야 한다. 그는 뭘 하든 책임감이 있었다. 게으르지 않았다. 거짓말도 못했다. 그래서 믿음이 갔다.


그렇게 헌팅남에게 조금씩 신뢰를 쌓고 있을 무렵 아빠가 췌장암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 사실을 알게 된 지 20일 만에 돌아가셨다.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아빠와 이별하는 과정에서 그는 엄마와 오빠보다도 더 내게 힘이 되었다. 여자친구를 위로해 주는 수준을 넘어서 우리 가족 모두에게 든든한 존재였다.


이 커다란 일이 계기가 되어 우리는 내년에 결혼하기로 약속을 했고, 5월 어느 날 비행기 프로모션이 있어 그때를 신혼여행 가는 날로 잡았다. 결혼 날짜는 그 전날이 되었다.


첫 만남이 새털같이 가벼워서 그랬는지, 결혼날짜도 참 가볍게도 잡았다. 한숨을 쉰 어머님은 다행히 그날이 길일이어서 허락해 주셨고, 우리 집도 어이없어하며 받아들여주셨다.



가볍게 만나 철없이 날을 잡은 우리는 올해 10주년을 맞이했다. 10주년이면 굉장히 특별한 이벤트를 벌일 줄 알았던 순수했던 시절도 있었으나, 우리는 서로에게 책 한 권씩 선물해 주고 아이들과 맛있게 저녁을 먹는 것으로 소소하게 하루를 보냈다.


만남은 헌팅, 결혼 날짜는 항공사 프로모션에 맞춰서.


가볍고도 가벼운 우리의 시간은 결혼을 하고 아이들을 낳고 키우며 그 무게를 조금씩 더해갔고, 아이들을 위해 좋은 어른이 되고 싶어 매일 책을 읽고 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멋진 부모가 되었다.


우리는 늘 가볍게 하루에도 수십 번씩 서로에게 장난을 치고, 무거워지기 위해 늘 책을 읽는다. 서로가 좋았던 부분을 읽어보라며 책을 건네주고, 읽고 공감의 대화를 나눈다. 어떻게 지혜롭고 현명하게 살아가야 할지, 아이들에게 거울이자 환경인 우리의 삶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지 함께 생각한다.


야구장 헌팅남이었던 여보. 우리 지금처럼 가볍게 재미를 찾고, 무겁게 의미를 찾는 미미한 결혼생활, 미미한 육아생활을 이어나가도록 해요.


그날 헌팅해 줘서 고마워 여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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