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 속에서 책 읽는 기쁨을 알아버린 딸
“아~~ 엄마! 너무 좋아!”
아이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뭐가 그리 좋냐고 물었다.
“여기서 책읽는게~~~ 아 너무 좋아 엄마~~”
선베드에서 책을 읽다가 갑자기 너무 행복한 기분을 느낀 초1 딸은 작은 손에 책을 들고 활짝 웃고 있었다.
일주일도 아니고 한 달 여행은 처음이다. 그래서 책을 좀 챙겼다. 더 챙기고 싶은걸 남편이 무겁다고 반대해 추리고 추린 책들.
운명처럼 만난, The Little Princess
<어린 왕자> 책은 채니를 아무리 찔러도 넘어오지 않는 책이었다. 그런데 말레이시아에 어린 왕자 전시회가 있다는 걸 알게 되어 책을 혹시나 하고 챙겨 보았다. 마침 남편이 읽던 중이었고, 채니가 안 읽으면 남편이 읽을 책이었다.
사실 나는 어린 왕자를 그다지 재밌게 읽지 않았다. 원서로 읽어서, 공부하는 마음으로 읽어 그런 것 같다. 그런데 책으로 읽은 주옥같은 문장들을 이 전시회에서 다시 만나게 되면서 어린 왕자의 마음을 비로소 제대로 바라보게 되었다.
더 기쁜 건, 채니가 이 전시회를 본 후 숙소로 돌아와 어린 왕자 책에 푹 빠져들었다는 것이다. 이 책은 영어 공부용 책이라 왼쪽 페이지는 영어로, 오른쪽 페이지는 한글로 되어 있는 책이다. 채니가 영어로 된 부분을 읽는지 한글 부분을 읽는지 궁금해서 물었더니 채니가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나? 둘 다 읽고 있는데?”
채니는 해석이 안 돼서 한글 페이지를 읽는 게 아니다. 그냥 거기 적혀 있으니 다 읽는 거였다. 앞뒤로 꽉 막힌 소시지 같은 우리 딸은 그저 글자가 있으니 다 읽을 뿐이었다. 남편 눈치 보며 책을 줄이다가 한글 책을 적어져 아쉬운 부분이 있었는데 잘됐다 싶었다.
낯선 도서관에서 보낸 4시간
쿠알라룸푸르의 한 도서관을 방문했다. 이슬람 사원을 가보려 했는데 거긴 관람이 끝났는지 볼 수가 없었다. 돌아다니며 더 알아보기엔 너무 더웠고 그렇게 우리는 시원한 도서관에 들어가게 되었다.
잠깐 더위를 식히고 나올 예정이었으나 한글책 하나 없는 낯선 도서관에서 우리는 무려 네 시간이나 있다 나오게 되었다.
비결은 채니가 그토록 원하던 <girls who code> 책을 내가 찾아준 것. 영어학원에서 빌려 봤는데 너무 좋아해서 사달라고 했지만 한국에서 구할 수 없어 읽지 못한, 채니에게 꽤나 애틋한 책이었다. 그런데 그 책이 우연히 엄마 눈에 띈 것이다. 채니에게 갖다 줬더니 너무 좋아하면서 냅다 읽기 시작했다.
책을 대출해 갈 수도 없는 외국인이라 채니는 그 자리에서 다 읽고 싶어 했고, 얇지 않은 책이라 오래 걸렸다. 잠시 후 둘째 예니가 나가자고 징징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채니의 독서 시간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 예니를 데리고 나는 최대한 좋아할 만한 책을 찾아내어 열심히 읽어주었다.
한참이 지난 후 채니는 책을 다 읽었고, 이제 그만 나가자고 했다. 하지만 이번엔 동생인 예니가 책에 빠지고 말았다. 채니에게 말했다. 네가 책에 빠져있는 동안 동생이 기다려주었으니 지금은 네가 기다려주어야 한다고.
채니는 이해했고, 다른 책들을 찾아보며 도서관에서의 시간을 즐겨주었다. 그렇게 우리는 한글 책이 단 하나도 없는 이 낯선 도서관에서 무려 네 시간이나 머물다 나왔다.
엄마의 독서를 바라보는 아이
나는 바닷가에서 놀면서 틈만 나면 책을 읽고 있다. 폰을 붙들고 있고 싶지 않아서다. 여행 일정을 책임지고 있는 남편은 책을 많이 읽지 못하지만 나는 일정 중에 여유시간이 생길 때마다 읽고 있다.
여유롭게 책을 읽는다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파도 소리를 들으며 책을 읽는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 세포 하나 하나로 느끼고 있다. 이런 엄마의 모습을 보는 아이들은 무슨 생각이 들까? ‘책 읽기는 재미있는 거구나’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책 좀 읽으라고 백 날 떠드는 것보다, 독서의 의미에 대해 일장 연설을 늘어놓는 것보다 효과는 훨씬 더 좋다.
엄마를 닮고 싶어 하는 아이. 그냥 책을 즐기는 것만도 기특한데 야외에서 살랑이는 바람을 맞으며 독서하는 맛까지 알아버리다니. 이토록 예쁜 너를 어쩌면 좋을까.
결국은, 판 깔아주기 & 찔러보기
채니가 여행지에서도 이렇게 책을 잘 읽는 이유는 해외여행 중에도 독서시킨답시고 이런저런 계획을 세우고 억지로 책을 읽힌 게 아니다. 내가 추구하는 책육아의 핵심기술인 ‘찔러보기’를 시전 했을 뿐이다.
‘찔러보기’는 ‘판 깔아주기’가 선행되어야 한다. 어린 왕자 전시회가 있길래 집에서 어린 왕자 책을 가져가는 판을 깔았다. 그리고 전시회에서, 엄마가 어린 왕자 책을 읽으며 만난 문장들을 보고 좋아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아빠는 여행지에서 어린 왕자 책을 읽는 판도 깔았다. 그러고 나서 ‘책이 있으니 볼라면 보고 싫으면 말아라’라는 ’찔러보기‘를 했다. 그 결과 채니는 어린 왕자 책을 영어와 한글로 완독 했다.
해외 도서관 방문이라는 판을 깔아주고, 평소 사고 싶어 했던 책을 찾아 슬쩍 갖다 주는 찔러보기를 했을 땐 girls who code 책을 앉은자리에서 다 읽어버렸다.
나는 채니에게 어떤 책을 읽으라는 강요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권유한 적은 있으나 안 읽으면 말았다. 하지만 판을 깔아주고 찔러보는 건 수도 없이 했다. 그냥 찌르면 안 된다. 판을 잘 깔아줘야 잘 먹힌다. 아이는 엄마가 판을 깔아주는지, 자기가 찔림을 당하는(?) 지도 몰라야 한다는 게 핵심이다.
채니는 고맙게도 독서를 즐기는 아이로 잘 자라주고 있고, 이번 여행에서는 놀라울 정도로 책을 많이 읽고 있다. (물론 여행 와서 책만 읽는다는 건 절대 아니다. 여행에 온 것 치고 많이 읽는다는 것이다.)
실컷 물놀이하고, 체험하고, 동생이랑 유튜브도 보고, 만들기도 하고 남는 시간에 꼭 책을 읽는다. 여행지에서 이런 적은 처음이다. 곧 2학년이 되는데 한 뼘 더 자란 느낌이 든다. 역시 여행은 아이들을 자라게 한다. 몸도 마음도 생각도 많이 자라고 있는 중인 아이들에게 또 어떤 책을 깔아줄지 오늘도 즐거운 고민을 해본다.
여행지에서 해리포터 원서 2권과 초등신문 독서에 관해 판 깔아주고 찔러본 이야기가 (2) 편에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