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틀을 벗어나는 아이가 되기를
"혼자 교무실에 들어가서 제출하고 올 수 있지?"
"응~ 당연하지. 내가 알아서 하고 올게."
순간 멈칫했다. 예상했던 답이 아니었다. 당연히 "힝~ 엄마가 같이 가줘."라고 할 줄 알았는데.
1학년 종업식 전에 한 달 살기 여행을 하게 된 아이는, 체험학습 보고서를 방학 중에 교무실에 제출해야 했다. 그리고 종업식 때 받지 못한 통지표도 받아와야 했다.
긴 연휴가 끝나고 학교에 보고서를 제출하러 가기로 한 날 아침이었다. 학교에 갔다가 엄마랑 카페 데이트를 하기로 해서 나도 같이 외출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는 당연히 교무실에 같이 들어가서 용건을 처리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 한 번 혼자 해보라고 말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당연히 혼자 못한다고, 엄마가 같이 들어가 달라고 말할 줄 알았다. ‘그러면 같이 들어가서 옆에만 있어주고 일 처리는 스스로 할 수 있게 독려해 줘야겠다.’라는 시나리오를 신나게 쓰고 있었다
그런데 엄마의 예상과는 달리, '당연히' 자신의 일이니까 자신이 들어가서 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우리 학굔데~ 당연히 내가 할 수 있지~”라며 엄만 뭐 그런 걸 가지고 걱정하냐는 말투였다. 민망했다. 나는 '당연히' 아이가 1학년 밖에 안되니 엄마가 해줘야 하는 일이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교무실 앞에 도착했다. 아이는 교무실 문을 열고 씩씩하게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하며 들어갔다. 엄마 좀 훔쳐볼 수 있게 교무실 문은 좀 열어놨으면 했는데, 야무지게 문도 닫고 들어갔다.
애미는 잘 보이지도 않는, 유리창에 붙여놓은 시트지와 창틀 사이의 0.5mm의 틈으로 애잔하게 어린 딸의 모습을 지켜봤다. 누가 봤다면 수상한 사람이라 신고당했을 수도. 교무실 안에서 다른 선생님이 나오시길래 얼른 문에서 떨어졌는데도 그 선생님이 나오시다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얼마나 붙어 있었으면.. 죄송합니다 슨생님.
그렇게 나오신 선생님 덕분에 열린 문으로 아이를 잘 지켜볼 수 있었다. 조그만 내 아이는 자신이 쓴 보고서를 야무지게 제출하고, 통지표를 받아왔다. 그리고 스스로 해냈다는 사실에 뿌듯해했다. 하마터면 이렇게 또 한 뼘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엄마가 빼앗을 뻔했다.
학교를 나오기 전, 아이는 나를 이곳저곳을 데리고 다녔다.
"엄마 여기서 내가 실내화를 이렇게 신어."
"힝~ 우리 반~ 보고 싶다 엄마."
"엄마 저기 텃밭 쪽으로 지나가자. 저기 내가 추억이 있어서 그래."
"엄마 운동장을 가로질러서 나가자. 여기도 추억이 있어."
학교에 대한 애정이 듬뿍 느껴졌다. 내 아이가 처음 만난 큰 세상인 이 학교를 정말 사랑하는 것 같아 마음이 따뜻해져 왔다.
그 따뜻한 마음을 고이고이 가지고 카페에 들어가 달콤한 디저트를 먹으며 수다를 떨고 30분 정도 각자 책을 읽고 나왔다.
집으로 돌아가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아파트 단지 내 독서실을 이용해 보기로 했다. 도서관은 많이 갔지만 칸막이가 있는 독서실은 한 번도 가보지 않아 그냥 체험 삼아 갔다 금방 나오려 했다.
아이를 자리에 앉혀놓고 화장실에 다녀오는 동안 아이는 벌써 책 읽기를 시작하고 있었다. 말 한마디 해서는 안되고 웬만한 소리도 내서는 안 되는 곳이니 아직 초등학교 1학년인 아이는 답답할 수도 있겠다 생각했다. 카페에서 이미 30분 독서를 하고 왔으니 여기서는 길어야 20분 정도 있다 가겠지 싶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 아이가 내 어깨를 톡톡 쳤다. '아 이제 집에 가자고 하려는 모양이구나.' 하고 아이를 보았더니 아이가 속삭였다.
"엄마, 허리 펴~"
구부정하게 책을 읽던 엄마의 자세를 지적했다. 그리고는 다시 자신의 독서를 이어나갔다. 그렇게 우리는 1시간 20분을 책을 읽었다.
그 정도로 오래 독서실에서 책을 읽을 수 있을 줄 몰랐다. 말을 하지 않아야 하는 그 답답한 곳에서, 카페에서도 책을 읽고 온 상태에서 또 그 긴 시간 책을 읽다니. 내 딸이지만 좀 멋있었다.
어렸을 때야 몇 시간이고 책에 빠져 지낸 적은 많았다. 책이 곧 놀이고 자신의 세계였으니까. 하지만 오히려 나이를 한 살 한 살 더 먹으며 세상에는 재미있는 것이 너무 많다는 걸 깨달으면서, 그리고 친구가 좋아지면서, 독서시간은 상대적으로 줄어들었다. 그래서 오랜만에 같이 한 이 고요한 시간이 너무나 반가웠다.
아이와의 행복한 하루를 마무리하며 생각했다. 교무실에 혼자 들어가지 못할 거라 단정 짓지 말아야지. 독서실에 오래 있지 못할 거라 지레짐작하지 말아야지. 아이 옆에 착 붙어서 아이가 스스로 세상을 배워나갈 기회를 빼앗지 말아야지 하고.
아이와 나의 아름다운 거리를 유지하는 지혜로운 엄마가 되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