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서에서 라이팅까지
우리 아이는 낙서를 참 좋아했다. 두 살 무렵, 자기 손으로 뭔가를 만들어낸다는 게 신기했던 시절부터 종이를 꽤 열심히 채워갔다. 다행히 벽이 아니라 종이에.
나는 그 낙서하는 모습이 그렇게도 예뻤다. 조그만 손으로 색연필을 세게 쥐고 종이가 뚫어져라 그어대는 모습, 자신의 의도로 무언가가 만들어지고 있는 현장을 초롱초롱한 눈빛과 집중한듯한 입을 가지고 지켜보는 그 모습이 너무나도 사랑스러웠다.
그 낙서가 조금씩 형태를 갖춰갈 땐 물개박수를 달고 살았다. 어머 우리 딸 이렇게 예쁜 동그라미를 그렸어?" 하며 오두방정을 떨었다. 우주를 좋아할 땐 시커멓게 색칠만 해도 블랙홀을 그린 거냐며 난리를 쳤다. 아이의 기분을 좋게 해 주려고 인위적으로 한 행동만은 아니었다. 도치엄마의 눈엔 정말로 그게 블랙홀로 보였으니까.
아이는 그저 낙서를 했을 뿐인데, 하찮아 보였던 그 끼적임이 어느새 한글을 익히는 손이 되었고, 영어를 배우기 시작하면서는 라이팅으로 이어졌다.
낙서랑 영어 라이팅이 무슨 상관이냐고 할 수도 있다. 그런데 난 별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자신 있게 무언가를 표현하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졌던 경험은 다시 쓰고 싶게 만들고, 계속 그리고 싶게 만든다. 그 힘이 쌓이고 쌓여 언어가 된다.
그래서 나는 고쳐주지 않았다. 한글을 뒤죽박죽 써도, 영어 알파벳 J가 왼쪽이 아니라 오른쪽으로 꼬부라져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칭찬했다. 아이의 글자 하나하나를 보지 않고 전체를 보았다.
아이가 기죽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나는 아이가 글씨를 쓸 때마다 정말로 기특했다. 삐뚤빼뚤한 글자들이 모인 한 장의 종이조각이 내게는 세상 무엇보다 대단해 보였다. 시간이 지나 아이가 늘 틀리던 글자들을 곧잘 쓰게 되었을 땐 아쉽기까지 했다. 그 귀여운 글자들을 다시는 볼 수 없다는 생각에.
아이는 평생 잘못 쓰지 않는다. 지나가는 시기일 뿐이다. 작은 걸 고치느라 큰걸 잃을 수는 없다. 아이는 자신이 뭘 쓰기만 하면 엄마가 궁금해하고 좋아하니 자꾸만 쓰고 싶다는 마음이 자라났을 것이다. 그리고 조금 더 자라서는, 내가 틀리게 쓴 글씨를 고치지 않은 이유가 사랑이었다는 것도 동시에 알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쓰기'를 좋아하는 아이는 책 만들기가 취미가 되어 A4용지 몇 장을 반으로 접어 매일매일 책을 만든다. 영어책이 되기도 하고, 한글책이 되기도 한다. 상상으로 빼곡한 판타지 소설부터 동생을 위한 워크북까지, 주제는 다채롭다. 그렇게 생활 속에서 한글 문장, 영어 문장을 쓰는 게 아이에겐 자연스럽게 놀이가 되었고, 그러다 보니 글도 아주 잘 쓰게 되었다. 라이팅을 따로 배운 적이 있냐는 질문도 종종 들었다.
하지만 내 눈에는, 영어학원에서 종종 받아 오는 Best Writer 상보다, 태국의 어느 섬에서 모래놀이를 하다가 글감이 떠올라 숙소에 돌아오자마자 영어로 세 페이지분량의 스토리를 단숨에 써 내려가는 아이의 모습이 더 멋지다.
참 부럽다. 생각이 그렇게 반짝거리는 것도, 그 반짝이는 생각을 글로 표현하는 데 주저함이 없는 것도.
딸아, 엄마는 너의 1호 팬이야. 너의 모든 글이 소중하고 재미있단다. 너의 머릿속에 있는 생각들을 글로, 그림으로 언제든지 표현하렴. 엄마는 언제든 읽고, 감상하고, 감동할 준비가 되어 있단다!
다음 화 : 독서가 스트레스가 되지 않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