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제를 하지 말라고 했다.
이 글에서 사용하는 '영어유치원', ‘영유’라는 표현은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한 편의적 명칭입니다. 실제로는 교육부 인가를 받은 정식 유치원이 아닌, 영어교육을 중심으로 한 사설 유아교육기관을 지칭합니다.
독서가 스트레스가 되지 않게
학습식 영유를 다니며 성적 욕심이 없었다고 말하면 거짓말이다. 그렇다고 아이를 몰아붙이며 공부를 시키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내가 선택한 방식은 단순했다. 좋은 책을 찾아 가져다주는 것.
여기서 말하는 '좋은 책'은, 어느 출판사 추천 도서도, 무슨 상을 받은 책도 아니었다.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내 아이가 좋아하는 책, 그게 바로 좋은 책이었다. 아무리 세계적인 상을 받았다 해도 아이의 손이 가지 않으면, 내겐 좋은 책이 아니었다.
무턱대고 책을 살 수는 없으니 도서관을 애용했다. 우리 동네 도서관은 원서가 부족했기에, 타 지역 도서관까지 검색해서 상호대차를 이용했다. 공짜니까 마음껏.
아이가 좋아하는 책의 작가가 쓴 다른 책, 아이가 잘 읽었던 책과 같은 장르의 책, 아이가 요즘 관심을 갖고 있는 대상과 관련 있는 책 등 책 선택의 중심에는 항상 아이가 있었다.(피넛 버터에 빠져 그것만 먹을 때는 피넛버터와 관련한 책을 빌려온 적도 있다.)
그렇게 공들여 빌려온 책을 아이가 안 보면? 할 수 없다. 이번엔 실패. 하지만 그 실패도 정보였다. '이런 스타일은 안 좋아하는구나. 이것만으로도 얻은 게 있다. 다음엔 거르면 되니까.
그래서 책을 읽고 안 읽고는 전적으로 아이에게 맡겼다. 강요하지 않았다. 읽으면 좋고, 안 읽으면 안 읽은 대로. 책이 숙제가 되는 순간, 독서는 멀어진다. 그건 내가 제일 원하지 않는 방향이었다.
아이가 다니는 기관은 '리딩'에 힘을 많이 주는 곳이었다. 도서관 시스템도 잘 갖춰져 있었고, 매일 책을 빌릴 수 있는 환경이 조성돼 있었다. 이 점이 마음에 들어 선택했던 곳이기도 하다. 내가 매일 도서관에 가서 고생하지 않아도 되었다. 가끔씩 아이가 가져오는 책 중에 보석 같은 책이 있었다. 그런 책을 만나게 되는 확률이 높은 것, 그게 이곳의 가장 큰 장점이었다.
하지만, 그 '책 읽기'가 '숙제'라는 건 큰 위험성이 존재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숙제를 하지 말라고 했다
6세에는 책이 얇고 어렵지 않아서 독서가 숙제라는 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7세가 되면서부터는 이야기가 달라졌다. 리딩 실력이 향상되면서 읽는 책도 점점 어려워지고 두꺼워졌다.
책을 읽고 잘 읽었는지 확인하는 퀴즈도 풀어야 하는데 그걸 하기 싫어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래도 기본적으로 책을 좋아하니 책을 펴고 읽기 시작하면 어느새 이야기 속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점점 책은 더 두꺼워졌고, 책 한 권을 읽는 데 한 시간이 넘어가는 경우도 생기기 시작했다. 하루에 읽어야 하는 책은 네 권. 물론 얇은 책도 섞여 있었지만 그래도 너무 많았다.
그걸 다 하려면 아이는 온종일 영어책만 읽으며 하루를 보내야 했다. 아무리 책을 좋아하는 아이여도 노는 게 당연히 더 좋은 법이다. 강제로 앉혀 책만 읽히는 어린 시절을 만들어주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FM이다. 학원 숙제가 이만큼이면 그만큼 반드시 다 해야 하는 사람이다. 그런 내가 결단을 내렸다. 숙제를 다 하지 않기로. 책의 두께에 따라 하루에 한두 권만 읽기로 했다.
엄마 못지않은 FM 딸이 내 얘기를 듣더니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래도 되나?' 하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독서도 중요하지만 너의 자유로운 시간이 더 중요해."라는 내 말에 아이는 좋아했다.
그렇게 자체적으로 숙제 조정이 시작되었고, 점수가 더 높아진 초1 때는 하루에 한쪽도 읽지 않은 날도 부지기수였다. 학교 갔다가 영어학원 갔다가 거기다 영어책까지 읽는다면 초1 시기를 영어만 하다가 날려버리는 거 아닌가, 싶어서 강요하지 않았다.
아이의 독서는 자발적으로, 기꺼이 즐겨하는 취미활동이어야 한다. 그런데 아이가 이토록 좋아하던 책 읽기가 아이에게 스트레스로 다가온다고 상상해보니, 정말 끔찍했다. 그래서 도서관 시스템이 잘 되어있는 학원의 장점(다양한 책 만나기, 꾸준히 읽기)은 최대한 활용하고, 단점(독서가 스트레스가 될 수 있음)은 과감히 잘라내기로 한 것이었다.
책을 즐겁게 읽는다는 게 더 중요했기에, 읽은 내용을 확인하는 퀴즈는 풀지 않아도 된다고 판단했다. 퀴즈를 풀면 포인트가 쌓이고, 점수에 따라 배지를 받는다. 그걸 안 받아도 되는지 아이에게 물었다.
"응 엄마. 난 괜찮아. 그거 그냥 배지일 뿐이잖아."
다행히 아이는 배지에 연연하지 않았다. 그렇게 책 읽는 시간을 줄여나갔다.
또 한 가지 아이에게 당부한 게 있다. '재미있는 책만 읽기'다. 나는 리딩 테스트 점수를 잘 받기 위해 책을 읽히고 싶지 않았다. 아이에게 영어책도 결국엔 '책'일뿐이다. 나는 아이가 번역가의 개입이 없는 원서를 읽고 그 속에서 재미를 느끼기를 바랐다. 한두 챕터를 읽었는데 흥미가 생기지 않는다면, 그 책은 읽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나는 아이에게 '재미'가 중요하다는 것을 아이에게 알려주고 싶어서 아이가 책을 읽고 나면 "그 책 재미있었어?"라는 질문을 던진다. 내용 확인용 퀴즈를 많이 틀려도, 제대로 안 읽은 것 아니냐며 핀잔을 주지 않는다. 많이 틀렸다 속상해하면 "재미는 있었어? 그럼 된 거야."라는 말만 해주었다.
아이에게, 좋은 책이란 어떤 책을 말하는 것 같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아이는 "교훈을 주는 책!"이라고 답했다. 그래서 말해주었다.
"그래. 교훈을 주는 책은 좋은 책이야. 그런데 더 좋은 책은 ‘재미있는 책'이야, 네가 재미있게 읽었으면 그 책이 네게 제일 좋은 책이야. 재미없는 책 억지로 읽지 않아도 돼. 재미있는 것만 읽어. 알았지?“
영어에 대한 정서, 책에 대한 정서를 지키기 위해 나는 정말 애를 썼다. 당장 책을 많이 읽고, 영어공부를 더 시키면 점수는 잘 나오겠지만 그러다 영어가 싫어질 수가 있다. 마음이 한번 닫히면, 다시 열기까지는 시간이 오래 걸린다.
읽기 싫어도 읽어야 하는 시간은 중고등학생이 되면 자연히 온다. 빨라도 5, 6학년이면 충분하다. 그전까지는 책이 그저 재미있는 취미였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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