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달 보는 테스트에 임하는 엄마의 자세
이 글에서 사용하는 '영어유치원', ‘영유’라는 표현은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한 편의적 명칭입니다. 실제로는 교육부 인가를 받은 정식 유치원이 아닌, 영어교육을 중심으로 한 사설 유아교육기관을 지칭합니다.
점수는 엄마만 아는 걸로
아이가 다닌 원은 매달 두 개의 테스트가 있다. 먼슬리 테스트와 SR 테스트. 먼슬리는 배운 걸 테스트하는 시험이고, SR은 리딩 능력을 수치로 보여주는 테스트다.
아이의 성적에 연연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도 숫자로 딱 떨어지는 점수를 보면 마음이 흔들렸다. 한 달에 두 번씩이나 보는 시험이 부담스럽다고 느낀 적도 있었다. 그런데 오히려 자주 보다 보니 시간이 갈수록 점수에 무뎌지기도 했다.
수없이 시험을 보는 동안 아이에게 성적과 관련해 부정적인 말을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여섯 살 때는 시험 전에도 별 말 하지 않았다. 일곱 살이 되면서 덜렁대는 모습이 보여 "꼼꼼히 읽고 풀어보자"는 정도의 말만 했을 뿐이다.
잘했다고 보상도 해주지 않았다. 100점을 맞아도 결과에 대해 이야기해주지 않았다. 그저 "오늘 시험 꼼꼼히 풀었어? 최선을 다했어? 그럼 된 거야."라고만 말해주었다. 1등 했다고, 다 맞았다고 엄마가 너무 기뻐하면 다음 시험이 아이에게 부담이 될 것 같았다. 그런 마음을 안겨주기엔, 아이는 아직 너무 어렸다.
다 맞았을 때도, 몇 개 틀렸을 때도 늘 똑같은 반응을 했다. 그 덕분인지 담임 선생님이 그러셨다. 상위권 아이들은 시험 볼 때 긴장을 많이 하기도 하는데, 우리 아이는 테스트를 볼 때 정말 편하게 푼다고. 영어를 대하는 그 여유로운 태도가 부러울 정도라고.
SR테스트는 영유 엄마들의 심정을 들었다 놨다 한다. 그 점수가 아이의 영어 실력을 전부 말해주는 것도 아닌데, 어느새 그런 것처럼 인식되어 있다. 이렇게 글을 쓰고 있는 나조차 누가 몇 점 넘었다 하면 '오, 걔 영어 잘하네?' 하는 반응이 반사적으로 튀어나온다. 그게 다가 아니란 걸 알면서도.
우리 동네는 유명 학군지가 아니지만 아이들이 정말 잘한다. 심지어 웬만한 학군지보다 평균 점수가 높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정말 놀랍다. 그 작은 아이들이 어떻게 그렇게 높은 점수를 만들어 내는지.
내 아이보다 높은 점수를 받았다는 아이들의 얘길 들으면 또 흔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곧 마음을 다잡았다. 다른 아이들이 눈에 들어올 땐 내 시선을 내 아이에게로 돌렸다. 그러면 보였다. 자기만의 속도로, 차분하게 잘 가고 있는, 반짝거리는 내 아이가 보였다.
점수를 알게 될 수밖에 없을 땐
아이에게 시험 결과에 대한 얘기를 전혀 해주지 않았지만, 아이도 알 수밖에 없는 시기가 왔다. 테스트 결과에 따라 상장을 주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불만을 갖는 부모들도 있었다. 나도 썩 마음에 들진 않았다. 하지만 이 원에 계속 다니려면, 그 시스템은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부모인 내가 아이에게 어떻게 설명할지를 고민해야 했다.
나는 아이에게 이렇게 말했다. "상장은 별로 중요한 게 아니야. 다 맞아서 받는 상장이나, 한두 개 틀려서 받는 상장이나 별 차이 없어. 못 받은 친구들도 다 열심히 한 거니까, 앞에서 너무 좋아할 필요도 없고, 네가 못 받는다고 실망할 일도 아니야.“
고작 6살 아이가, 상장을 못 받아 기가 죽는 것도 싫었고, 상장을 못 받는 친구들 앞에서 우쭐해하는 건 더 싫었다. 옆에 앉은 친구를 경쟁자로 생각하기엔 너무 어린 나이였다.
상장을 받은 어느 날이었다. 다른 아이는 가방에서 상장을 꺼내 엄마에게 자랑했지만, 우리 아이는 조용했다. 그래서 그 아이만 상장을 받았구나 했다. 그런데 집에 와보니 우리 아이의 가방에도 상장이 들어있었다. 왜 너는 엄마한테 자랑 안 했냐고 물으니 그게 뭐 대수냐는 눈빛으로 날 바라보았다. 엄마가 그 종이 쪼가리 별거 아니라며? 하는 것만 같았다.
그거면 됐다 싶었다. 그래, 성적 같은 건 신경 쓰지 말자. 즐겁게 영어를 배우면 그걸로 된 거야. 영어를 대하는 지금의 네 반짝이는 그 눈빛. 엄마는 그거면 돼.
점수에 쿨하긴 개뿔
엄마가 말해주지 않는 이상 아이가 알 수 없는 SR 점수는 한 번도 말해주지 않았고, 배운 걸 확인하는 먼쓸리 테스트는 상장 때문에 결과를 알게 되었으니, 그때부턴 어떤 문제를 틀렸는지 알려줘도 괜찮겠다 싶었다
그래서 아이를 불러 "이 문제 한 번 풀어볼래~?" 하고 틀린 문제를 내밀어 보았다. 아이는 너무 쉽게 정답을 골랐다. 시험 때는 실수했던 것이다.
너무 아까웠지만 티 내지 않았다. "어, 맞았네? 근데 이거 테스트 볼 때는 틀렸더라~ 우리 강아지 실수했나 보네? 다음엔 더 잘 읽어보자, 우리 딸!" 하고 쿨하게 웃어넘겼다.
쿨하긴 개뿔. 전혀 쿨하지 못했다. 딱 한 개 틀렸는데 그게 또 너무 쉬운 거였고, 다시 풀어보라고 하면 너무 당연하게 맞혀놓고 '왜 이런 쉬운 문제릉 엄마가 또 풀어보래?' 하는 눈망울로 날 쳐다보면 아이스 아메리카노 벤티 한 잔 원샷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겉으로는 늘 그랬듯 쿨해야 했다. 영어는 100점 맞기 위해, 친구보다 잘하기 위해 하는 게 아니라 , 내 세계를 더 크고 재미있게 만들기 위해 배우는 거니까.
그리고 그 세계를 넓히는 과정이 기쁘고 자유롭길 바라는 건, 어쩌면 모든 엄마들의 마음일 거다. 누구보다 잘하려는 게 아니라, 그저 스스로 더 좋아지고 싶은 마음. 아이가 가진 순수한 향상심. 그걸 지켜주는 게 엄마가 할 일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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