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유 스피킹 터지는 시기

드디어. 터졌다. 스피킹.

by 필로니


이 글에서 사용하는 '영어유치원', ‘영유’라는 표현은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한 편의적 명칭입니다. 실제로는 교육부 인가를 받은 정식 유치원이 아닌, 영어교육을 중심으로 한 사설 유아교육기관을 지칭합니다.




갑자기 터진 스피킹


그날을 잊을 수가 없다. 친구 H와 영어로 대화하기 시작했던, 7세 4월의 어느 날. 아이들이 원에서 야외 수업을 하고 온 날이었다. 화분에 무언가를 심고 관찰하는 수업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우리 아이와 H는 아파트 단지 내의 작은 숲에서 놀고 있었다. 아이들이 그날 자연에 관한 영어 수업을 듣고 와 그런지 자연 속에서 노는 그 상황이 자연스럽게 수업의 연장이 되었다.



갑자기,

아이들이,

영어로 대화하기 시작했다.




집에서 인형을 가지고 혼잣말하듯 하는 영어와는 전혀 다른, 유창한 영어 대화였다. 나는 매우 놀랐지만, 호들갑 떨지 않았다. 아이들이 어른들의 반응을 의식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 예쁜 모습에 어떤 영향도 끼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조용히 가방에서 나의 책을 꺼냈다. 책을 읽는 척하며 핸드폰을 꺼내 폰을 교묘히 책 안에 감추고 동영상을 찍었다. 이 역사적인 순간을 기록하기 위해.



잠시 다른 데에 다녀오던 H의 엄마는 뭔가 부자연스러운 나의 행동을 멀리서 바라보며 '저 언니가 왜 저러나' 하며 오고 있었다. 가까이 왔을 때 아이들이 영어로 대화하는 걸 듣고 그녀는 내 행동을 바로 이해했다. 그리고 그녀 역시 아무 일 없다는 듯, 우아하게 모른 척을 했다. 그 순간만큼은 평생 호흡을 맞춰온 친구처럼, 우리는 눈빛 하나로 대화했다. 복화술도 동원했던 것 같다.



"으므 언니 이게 므슨 이이야?"

(어머 언니 이게 무슨 일이야?)


"그르그므으으 애드 드디어 트즈쓰"

(그러게 말이야 애들이 드디어 터졌어.)



"으들 즌쯔 드그느드 그츠"

(애들 진짜 대견하다 그치)


"응 느무 으쁘드 츰!”

(응 너무 예쁘다 참!)



엄마는 몰카 찍는 중

엄마들의 조용한 연기 속에서 아이들의 영어 대화는 계속 됐고, 그다음 날도, 그 다다음 날도 아름다운 대화는 계속되었다.




영어로 대화하는 초등학생들


H는 이사를 가고, 지금은 또 다른 영유 친구인 S와 영어로 말한다. 이 아이들 셋이 만나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다들 놀라서 쳐다본다. 아이들은 영어 실력을 자랑하려고 하는 게 아니다. 그저, 어릴 때부터 그랬기에 자연스러운 것이다. 서로의 얼굴을 보면, 영어가 먼저 튀어나오는 것뿐이다.



만약 그때, 7살의 그 봄날에 엄마들이 유난을 떨며 카메라를 들이대고 칭찬을 퍼부었다면? 아이들은 누군가를 의식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리고 곧, 영어 대화를 안 하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돌이켜 보면, 성적이 잘 안 나왔을 때 조용히 넘기는 것보다, 성적이 잘 나왔을 때나 무언가를 정말 잘했을 때 칭찬을 아끼는 게 백배는 더 어려웠던 것 같다. 나도 오두방정을 떨고 싶었다. "우리 딸 왜 이렇게 잘해쩡? 최고야! 또 다 맞아쩡! 오구오구 우리 딸!" 하고 싶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참았다. 엄마의 반응을 보고 아이 스스로가 성적을 의식하게 될까 봐 꾹 참았다.



지금은 2학년. 영유 졸업 후 초등연계반에 다니고 있다. 테스트를 잘 보고 상장을 받아오면 "수업 시간에 정말 열심히 들었구나. 잘했어." 정도로만 칭찬한다.



그리고 지인이 알려준 시험 결과에 대한 최고의 칭찬법도 종종 써먹는다.

"다 맞으니 네 기분이 어때? (아이가 기쁘다고 말하면) 네가 좋아하니 엄마도 좋아."



점수 때문에 기쁜 게 아니라, 네가 기뻐하니 엄마도 기쁜 것. 이보다 더 따뜻하고 현명한 칭찬이 또 어디 있을까. 점수보다 너의 기분이, 너라는 존재가 더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전해주는 칭찬이다.




엄마의 멘탈 관리


아이가 영유에 다니는 동안 블로그에 이런저런 글을 쓰면서 나 자신을 들여다보도록 노력했다. 아이의 행복이 최우선이라면서 그 방향으로 잘 가고 있는지, 과정에서의 문제점은 없는지, 과정이 어떻든 결과만 잘 나오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닌지, 지나고 보면 먼지 같은 이 영유 시절의 점수에 일희일비하고 있진 않은 지, 말이다.



글을 쓰다 보면 저 깊은 내면에 있는 진짜 나를 마주하게 된다. 부끄러운 내 욕망을 만난다. 그리고 그 순간 나를 책망하지 않고, 그럴 수도 있다고 인정해 주며 그 욕망을 흘려보낸다. 그러고 나면 다시 가벼워질 수 있다. 그렇게 글을 쓰고 산뜻해진 마음으로, 다른 아이들이 아닌 내 아이를 바라볼 수 있었다.



친구와 좋아하는 주제에 대해 영어로 신나게 말하는 그 표정, 머릿속에 떠오른 이야기를 집에 와서 영어로 써보는 그 모습, 좋아하는 책을 번역서가 아닌 원서로 만나며 세계를 넓혀가는 아이의 시간을 옆에서 간접 경험할 때마다 감사했다.



그런 모습을 보면,

시험 잘 보는 것 따위 중요하지 않..지는 않..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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